[묵상글]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전봉석 2020. 1. 3. 07:01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건축하는 자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느헤미야 4:17-18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시편 9:9

 

 

성을 재건하는 데 있어 북쪽의 사마리아 산발랏 일당이 획책하여 남쪽의 아라비아 사람들과 서쪽의 아스돗의 사람들이 분노하며 훼방한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허물어진 틈이 메꾸어져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7).” 그럼에도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의지하고 백성들을 격려하며,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건축하는 자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17-18).” 그 노고가 가히 눈물겹다.

 

슬픔은 우리로 순종을 이끌어낸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21:4).” 슬픔의 여섯 단계가 거부--> 분노--> 협상--> 절망--> 수용--> 희망으로 이어진다고 하는 엘리자베스 큐블러 로스 박사의 연구도 인상적이다. 이에 대해 C. S. 루이스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그와 같은 슬픔이 찬양하는 삶을 일깨웠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잠언은 일갈한다.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19:20).”

 

오늘 본문의 내용이 포로에서 돌아와 성을 재건하고 주의 백성이 연합하는 데 있어 그 분열과 반대에서 빚어지는 고통을 통해 더욱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시편의 말씀이 간절함으로 읽힌다.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9:9).” 우리를 보호하시고 굳건히 이 길을 갈 수 있도록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주를 바라고 간다는 것, 때로는 지긋지긋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여실히 그 필요성을 느낀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며 그런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에게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게 하려 하며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령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13:4-5).” 우리 곁에는 언제나 우리를 획책하려 하는 무리가 있다.

 

그러므로 무장해야 한다. ‘짐을 나르면서 그 각각의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고, 건축하는 자는 각각의 허리에 칼을 차고 늘 그 곁에는 위험을 알리는 나팔수를 세워야 한다.’ 이는 성경의 원리다. 사는 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6:13).” 그러려니 하고 안이하게 굴었다가는 언제 날로 코를 베일지 모른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4-17).” 고작 나의 하루 가운데도 여러 번 싸우고 다투며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 이어진다.

 

가령 아이를 대하는 데 있어 내가 또 그럴 줄 알았다. 보면 늘 변명이나 이유가 있는 아이가 있다. 시간이 다 돼서 결국 아프다고 못 오겠다며 전화를 하였다. 늦는 아이가 또 늦고 핑계를 대는 아이만 유난히 핑계가 끊이지를 않는다. 아파서 병원에 가야할 거 같다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 할까? 오든 말든, 쓰든 말든, 하고 내버려두면 될 일이겠으나 그게 또 그런 게 아니어서 먼저는 나를 무장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아니면 예전처럼 안 보면 그만일 것 같다. 그런 것이다. 아침에 오는 아이는 연신 재채기를 하고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도 아홉 시도 안 돼 글방으로 왔다. 다들 저 아이의 장애를 운운하고 그의 정신병력이나 여느 증세를 탓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모두가 저 아이만 못하다. 저 애만 정상이다. 정작 정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삶이 더 골치다.

 

누굴 탓하려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이는 여러 생각이 나를 못살게 굴더니 말씀 앞으로 이끌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14:23).” 오늘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은 이 땅의 죄다. 황충의 우두머리다. “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볼루온이더라(9:11).” 온 땅에 불법의 비밀이 활동한다.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살후 2:8).” 우리는 땅의 더러움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 다만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19:2).”

 

시편 2편을 읽고 설교 원고로 작성하면서 아이의 일이 결코 아이의 일로 그치는 게 아니고, 누구의 완고함이 결코 누구 하나의 이야기가 아닌 것에 대하여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1).” 저들의 기고만장함과 안하무인격인 것이 기겁을 하며 주를 바란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1:6-7).” 나에게는 아이에게 또는 누구에게서 돌아오는 실망과 좌절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단서가 된다. 정말이지 하나님이 아니시면 내가 왜 저런 아이를 상대하고 이런 사람을 참고 또 돌보아야 하나. 말 그대로 그러려니 하고 그러든가 말든가 내버려두면 그만일 텐데.

 

아내와 둘이 앉아 가정예배를 드리고 하루 동안에 있었던 일을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다 보면, 이러는 게 결국 우리에게 두시는 사명이구나, 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된다. 기껏 뒤집어엎을 듯 때려 치고 그만둔다던 아이나 아이엄마가 다시 연락이 와서 애를 보냈으면 한다는데, 안 왔으면 좋겠는데 온다는데 그럼 또 어쩌지? 하고 아내는 난감해하였다. 그게 참누가 들으면 고민거리도 아닌 것을 두고 우리는 이제 신중한 것이다. 생각 같으면 바른 소리를 퍼부어대고 옳다구나 하고 관두면 그만일 텐데, 그리 살 때는 그게 옳은 줄 알았던 일이 이제는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일이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시는 주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어쩌겠어? 오면 또 받아야지. 걔 없으니까 오히려 애들 분위기가 좋았는데하는 아내의 지청구에 나 또한 뭐라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나 역시 하루에도 열두 번씩 안 왔으면 하고 안 했으면 하는 마음이 공존하는 것이어서.

 

믿음으로 하자.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9:29).” 아니면 우리가 무엇을 보고 가겠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11:24).” 그래서 나는 속으로 읊조린다. 기도밖에 할 게 없다. 당최 저 애가 꼴 보기 싫고, 하기 싫고, 안 왔으면 좋겠고, 그냥 안 한다 그러고 말면 그뿐인 일에 대하여,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50:14).” 주밖에 달리 아무도 없는 데서 오히려 안도한다. 그러므로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6:18).”

 

곧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고난과 마음고생이 다 목적이 있다.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13:9).” 내가 주의 일을 하고 있는지, 주의 뜻에 온전히 거하고 있는지 하는 것은 실제로 고난을 더하심으로 알 수 있게 하시는 일이었으니, 내 안의 평안이 도리어 주를 생각함으로 위로가 된다. 내가 애써 무엇을 방도로 찾아 실행하였더니 해결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아이 한둘을 두고도 나는 씨름한다. 누구와 통화로 그저 이야기만 듣고 마는 일인데도 버겁다. 그것으로 기어이 나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간다. 비로소 아버지를 부른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8:15).”

 

그러므로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6:18).” 이에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9: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