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전봉석 2020. 1. 7. 06:56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느헤미야 8:10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편 13:5

 

 

주전 586년 학사 에스라는 모세 오경을 히브리어로 낭독한다. 성벽이 재건되고 모두들 성일에 모여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순종하여 초막절을 지킨다. 이를 13명의 레위인들이 아람어로 통역한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8:8).” 바벨론 포로 130년 동안 이스라엘은 모국어를 잃고 살았다. 백성들이 감격하여 울자 느헤미야가 축복한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10).” 곧 우리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안아주신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1:31).” 앞서 모세는 출애굽 후에 1년여 동안 광야를 지나 시내산에 이르러서 설교한다. 그 길이 어떠하였는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은 것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안아주셨다.’ 과연 백성들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모세는 그리 고백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일까? 저의 환경은 달랐을까? 오히려 여든이 넘은 노인으로, 그 수많은 백성을 이끌어야 하는 지도자의 무게감으로, 숱하게 모함과 욕설과 온갖 원망을 다 들어야 하는 자리였는데저가 느끼는 하나님은 저를 안아주시는 분이셨다!

 

광야와 같은 삶이 어찌 녹록하였겠나? 거긴 죽음의 계곡 같이 그 크고 두려운 광야다(19). 물도 없어 신음하였고(15), 굶주림으로 원망하였다(16). 천막생활로 늘 안정적이지 못하였고, 먹는 것과 입는 것은 항상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그런 데서 모세는 어떻게 그 하나님의 품에 안긴 것과 같이 생활할 수 있었을까? 먼저는 그 하나님이 보호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1:30).” 믿음은 그리 여기고 또한 그리 바라는 것으로 맛본 사람은 안다. 어찌 내 안에 그와 같은 믿음이 생겼는가, 나는 알지 못한다 해도 믿음이 주도하는 삶이란 참으로 놀랍다.

 

그런 그는 아버지 하나님의 품을 알았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31).” 그 하나님은 길이 없는 광야에서도 갈 길을 지시하신다.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33).” 우리가 머물 곳을 알리고 앞서 거기에 계신다. 39년 뒤 모세는 죽음을 앞두고 고백하는 것이다.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32:6).” 처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한 인물이 바로 모세였다. 그 하나님 아버지가 나의 처소가 되셨다. 나를 이끌어 그의 품에 안으셨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33:27).”

 

두 시에 오기로 한 아이가 늦게 와서 기다리다못해 볼 일을 보러 나서는데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순간 갈등을 하다 도로 들어왔다. 늘 늦는 애가 늦는다. 항상 이유가 있다. 아이에게 그건 태도의 문제라며 고치자고 일렀다. 물론 우리는 모세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은혜의 시절을 살고 있다. 아무리 인생이 광야 같다 해도 실제 광야 길과는 비교할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를 나의 구주로 삼아 사는 삶에서는 당대의 이스라엘 보다 복이 많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9).” 그럼에도 우리의 정신상태는 안이하여, 아이들을 대할 때면 먼저는 나를 돌아보고 저 아이의 이런저런 일을 뭐라 일러야 할지 난감하다.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되뇌는 까닭은 나는 어찌 해야 하는지 주께 묻는다.

 

누구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찬송과 경배로 드려지는데 누구는 안이하여서 투덜거리고 여전히 멀뚱하여 뭔 소린지 감을 잡지 못하는 일이었으니, 나는 아이에게 당부하였다. 내가 좀 나아서 뭘 좀 잘해서가 아니다. 나 또한 지질하여서 늘 마음뿐이라. 그래서 더욱 의도적으로 마음을 여기에 두는 일이다. 묵상이란 그런 것이다. 마음을 말씀에 두지 않으면, 우리는 저런 아이를 맡을 수 없다. 맡아야 할 이유도 없다! 다 저녁에 아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가 새로 왔는데 자폐아이다. 엄마도 믿는 사람이라 자기 이야기를 다 털어놓은 모양인데, 두 사람이 재혼한 터라 각각 서로에서는 둘씩 자녀가 있었다. 그러다 20년 만에 낳은 아이라. 애지중지 키운다고 키웠는데 아이가 그런 것이니, 이번에 초등학교를 가야 하는데 아무 것도 모른다. 어찌 누구 소개로 오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어떡해? 하고 묻는데 난들 아나? 못 하겠다 할 거였는데 저도 믿는 사람이라 하니.

 

어찌 됐든 부모의 안이함이 고스란히 자식들의 몫으로 전가되는 형국이다! 어쩌겠나? 우리야말로 의도적으로 더욱 말씀만 끌어안고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 설 수밖에. 그러라고 하나님이 지금 그러시는 것 아니겠나?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야 한다. 일부러라도 마음을 두고 일부러라도 여기에서 시선을 떼면 안 된다. 듣다 보면 문제 없는 가정이 어디 있겠나만 좀 이상하다, 심하다 싶으면 영락없다. 믿던 부모이거나, 믿는 부모이거나, 어쩌다 둘 다 이혼을 하고 각각 자녀를 둔 채 또한 재혼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앞서 이런저런 아이에게 단련이 된 아내는 자폐 아이를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한 애가 있어 뭐라 하면 울어버리고, 드러눕고, 집어던지는 아이도 있었으니까. 다만 그 엄마라. 우리보다 연배가 더 많은 듯한데, 하긴 아이를 낳고 20년 만에 새로 낳은 아이라고 하였으니 그 둘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 지극정성이기는 하였겠는데. 가정예배를 드리기에 앞서 그런 이야기를 듣다가 우리는 그저 긴 한숨을 내쉴 따름이다.

 

광야이다. 이 모진 광야다. 애는 애대로 애 부모는 부모대로 우리가 지나는 이 길은 거친 계곡이고 죽음의 골짜기라, 죽지 못해 산다는 이들이 널린 가운데 우리의 의도는 결국 일부러 더욱 말씀 붙들고 말씀으로만 사는 일이다. 그럼 그렇게 행동하게 되어 있다. 나는 아이 앞에서 목사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행동하려 한다. 우리를 안아주시는 하나님의 품을 느낀 사람은 거기가 광야든 죽음의 계곡이든,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우리는 더욱 악착같이 주의 품을 파고드는 것이다. 아들로서 마땅히 누릴 권세다. 그처럼 행동하면 그리 된다. 세르반데스의 장편소설 <돈키호테>의 주제가 그거 아닌가? 기사가 되지 못한 돈키호테는 조랑말 로시난타를 타고 산초 판자와 기사 수업을 다니면서 기사처럼 행동하니까 진짜 기사가 되었다! 누구는 망상이라 하고 누구는 허황된 기지라고 폄하하지만, 우리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그래서 나는 감사하기를 하루 일과 가운데 가장 먼저 말씀 앞에 앉아 의도적으로라도 글을 쓰고 묵상 글을 되새겨 묵상하며 오전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전날의 나를 토대로 새 날의 나를 주께 아뢰는 일이다. 보면 나는 늘 똑같은 소리뿐이고, 칭얼대고 보채는 아이처럼 굴지만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은 아버지시다. 아버지 품에 안겨 뭔들 못할까? 그리 행동하면 돈키호테처럼 그리 된다. 믿음이란 마치 된 것처럼 여기고 그리 사는 일이다. 기도했으니, 구하였으니 그리 된 줄 알고 그리 따르는 길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11:24).” 이를 그저 막연한 망상이나 허상이라 해도 상관없다. 믿음으로 행한다. 우리가 무슨 전문가들도 아니고 저런 아이를 받아서 어쩌겠다는 것인지! 그러나 주께서 보내신 것이면 주의 권능으로 행하실 것을 믿는 것이다. 믿음은 무모한 의지다. 맹랑한 행동이다. 내가 어찌 조현증 아이를, 아내가 어찌 자폐 아이를우리로서는 난감할 따름이나 아버지 하나님이 하실 수 있으니 우리에게 보내시는 일이라


 우리는 다만 하나님을 찬송할 따름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13:6).” 그러하듯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8:6).” 그러므로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13: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