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백성 몇 명과 느디님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다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느니라
느헤미야 7:73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시편 12:6
성벽 재건을 끝내고 외곽에 거주하던 이들을 성안으로 이주시켜 저들에게 책임을 지우고 그 역할을 정한다. 일련의 일들을 처리하는 데 있어 느헤미야의 지혜는 온전히 주를 바라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백성 몇 명과 느디님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다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느니라(느 7:73).” 이는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하였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시 12:6).” 어떠하든 우리가 설 자리는 말씀이고 우리가 붙들고 살 것도 말씀이다. 오늘 시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처럼 충실한 자들이 줄어드는가, 하는 데 따른 애가다.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1).”
지나치게 합리적인 사회라. 올곧은 신앙이란 ‘올드’하고 ‘노잼’이라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한다. 기특하게도 아이가 케이크를 사와서 새해 첫 주일 예배를 찬양하고 감사하였다. 굳건히 중심을 잡아주는 한 아이로 인해 다른 아이들에게는 물론 나에게도 적잖이 힘이 되고 의지가 된다. 우리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막연한 느낌이나 공허한 생각이 아니다. 이는 매우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일로써,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마 28:6-7).” 나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믿는 이 믿음이 안 믿는 이들에게는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설득력이 떨어지며 그래서 안 믿는 게 도리어 믿는 일보다 합리적인가, 하는 데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귀한가를 되새겼다. 그 과정은 ‘오라’는 것이고, ‘보라’는 것이고, ‘가라’는 것이고, ‘이르라’는 것이며, ‘하라’는 것이다.
새해부터는 아이 둘이 남아 같이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러자고 했고 어찌됐든 시작을 하였다. 예수님의 명령도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19-20).” 곧 ‘가라’는 것이고,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고, ‘세례를 베풀라’는 것이며, ‘가르치라’는 것이고, ‘지키게 하라’는 것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리 맡기신 일이라면 그리 행할 뿐이다. 달리 나는 다른 방법이 없다. 솔직히 고백하기를 하기 싫을 때도 있고,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고, 몰래 숨어서 어디, 그냥, 교회를 다니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런데 제자 된 삶이란 제자를 삼는 삶이어서 이는 나의 제자가 아니라는 데 주목하게 된다.
그리 고백하였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 21:17).” 하기 싫어 아무 것도 않고 겨울방학을 무기력하게 지내려는 아이에게 매일 두 시에 오게 하였다. 오전에 오는 아이가 가고 이어서 아이를 부른 것은 그래도 와서 글도 쓰고 혼자서라도 공부도 하고 뭐라도 좀 해야지… 한 번 몸에 밴 게으름은 여간해서는 뿌리 뽑기가 어려운 법이어서. 오라, 하니까 그래도 싫다는 소린 안 하는 것으로 고맙다고 하였다. 억지로라도 아멘해라, 주기도문을 외우자, 사도신경을 암송하고 올 상반기에 학습세례를 받자, 하고 아이를 이끌어본다. 그게 어디 내가 하는 일이겠나만 ‘억지로라도’ 우리 육체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순순히 순종하는 법이 없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같이 남아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우리가 의지할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님을, 나아가 서로도 아니고 오로지 말씀밖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억지로라도 읽어라, 써라, 나는 내가 못하는 것에 대하여 고백하고 그래서 더욱 말씀 붙들고 말씀으로 서려는 것에 대하여 감추지 않았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이는 삼위 하나님이 동시에 일으키시는 역사다. 한 영혼이 주를 영접하고 주 안에 세워지는 일은 이와 같이 전우주적인 역사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역사이며 그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일이다. 이 일은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일로써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는 일이다. 곧 저 아이가 마지못해 예배에 나오고 억지로 앉아 눈을 감고 뚱한 표정과 마음으로 끌려오는 것 같지만 그 모든 사역이 곧 성자와 성령과 성부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능력이다.
뚱해 있는 아이를 볼 때면 꼴 보기 싫어서 얼굴을 돌리고 외면하고 싶지만 내 안에 두시는 마음 또한 주의 것이라, 같이 남아서 성경공부하자 하고, 월요일 두 시에 와라 하고, 이끌어 자꾸 이 세상에 바로 세우려는 이 모든 과정이 실은 내가 저 애를 측은히 여겨 그저 선행으로 하는 정도의 일이 아닌 것이다. 난 싫다, 하고 대놓고 고백하였다. 난 네가 싫다. 그래야 하는 이 일도 싫고, 싫은데 참아야 하는 것도 싫다. 예전 같으면 그래서 왜 못 하는지, 딱 잘라 그만두면 그만일 일을 이처럼 분에 넘치게 감당하는 까닭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는 데서 시작된다. 내 마음이 아닌 것은 나는 싫은데 자꾸 마음이 그리 간다. 마음이 쓰이고 눈에 띈다. 곁에서 아이도 같은 표정인지 왜 자기 성경공부 시간에 아이를 같이 하고, 그 애가 오고 안 오고 왜 자신이 같이 마음을 써야 하는지, 싫은데 싫지 않은 표정으로 아이를 챙겨주고 있었다.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뭐라 설명할 길이 없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마 28:17).” 끝내 농담으로나 듣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저녁께 토요일에 성경공부를 오는 이가 섬기는 교회에서 집사직분을 받았다며 감격스러워하였다. 어디 목장에 속하게 되고 같이 그 교회 안에 동화되는 것에 나 또한 기쁨으로 축하해주었다. 우리 교회로서는 해줄 수 없는 큰 교회만의 역할이라 나는 기꺼이 축복하고 감사하였다. 그러고 있는데 또 누가 전화를 주었다. 간단히 안부를 묻고 실은 새로 맡는 아이들과 과목 때문에 긴장이 몰려와서 안정제를 먹었는데 먹어도 되는지, 약을 좀 더 타려고 하는데 내과로 갈지, 정신과로 갈지, 저의 나약함은 나의 기질과도 닮은꼴이라 안쓰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였지만 어쩌겠나? 것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라! 나는 그리 받고 감사함으로 여긴다. 아니면 얼마나 나대고 나 잘난 줄 알고 내가 나서서 뭐라도 하려고 뿔쭐나게 설레발을 떨 것인가! 우리로 더욱 예민하게 주의 은혜를 누리며 살게 하시려고, 나는 저에게 그리 말해주며 위로하였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일을 감당하는 데 있어 주의 사명으로 여기기를. 한 아이를 돌보고 대하고 가르치는 일이 단순하게 돈벌이여서는 추하고 밥벌이여서는 궁색하지만 사명감으로 받으면 자랑이 된다.
누가 교회의 집사가 되고, 누가 새로 시작하는 과목의 아이들을 받는 일에 먼저 두려움이 앞서 안정제부터 챙겨야 하고, 누구는 억지로 교회에 나오고, 누구는 마지못해 그 일을 감당하면서도 우리의 이 모든 조화를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비록 우리의 삶이 애가를 지어 부를 수밖에 없이 열악하고 답답하나 이를 주께 토로하면서,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시 12:1).” 우리가 슬픔의 노래로 주께 아뢴다.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2).” 세상이 점점 어쩌자고 이 모양이 되어가나. 아무리 그래도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5).” 말씀이 우리를 건사하신다. 우리의 탄식을 들으신다. 우리로 안전한 지대에 두신다. 이 말씀은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말씀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6).” 그러므로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7).” 아무리 세상은 요지경이라 해도,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8).”
아무리 그렇다 해도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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