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3편, 신명기 1:30-33 / 주의 백성

전봉석 2020. 1. 9. 17:10

20200112 주일

 

시편 3, 신명기 1:30-33

주의 백성



 

시편

3:1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3: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3: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3: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3: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3: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신명기

1:29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1:30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1: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1:32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오늘은 시편 3편을 4연으로 나누어 그 의미를 살펴보았다.

 

1연은 1-2절로, 시인은 자신이 처한 괴로움을 호소한다.

앞서 부연하듯이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는 단서가 붙었다. 자식의 손에 쫓겨 도망치는 아버지 다윗의 심정을 상상해보자. 그 때 사울의 친족 중 하나인 시므이라는 작자가 쫓아오며 다윗을 저주하기도 했었다.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삼하 16:7-8).”

 

욥이 어려움을 당할 때 그의 세 친구들도 다르지 않았다. 저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 가장 연장자였던 엘리바스는 자신의 경험과 경륜을 들어 하나님의 저주를 운운하였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4:7).” 그러면서 어떤 말씀이 내게 가만히 이르고 그 가느다란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그 영이 서 있는데 나는 그 형상을 알아보지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에 내가 조용한 중에 한 목소리를 들으니(12, 16).” 하면서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22:5).” 하고 저를 정죄한다. 욥의 동료 가운데 빌닷도 그의 지식과 전통을 들어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8:8).” 하면서 훈계한다. 저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다.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3).” 그러자 저보다 나이 어린 소발도 기웃거리듯 옳은 말만 보태며 거들기도 하였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여기는, 가까운 사람들의 속단이다. 그렇게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이다. 그럴 때 다윗의 고백이 처절하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 마치 기다렸다 듯 다들 뭐라 한 마디씩을 보탠다. , 정말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참 그럴 때면 나를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 그렇다. 그래서 남이 아니라 가족이 찌르는 말이 더 아픈 법이다. 외형적으로 다윗의 신세는 가히 절망적이다. 욥의 경우도 그러했다. 고통 중에 있을 때 그것으로 끝장난 것 같다. 모두가 저주하는 것 같다. 그럴 때 우린 누구에게 하소연을 하는가?

 

2연은 3-5절로, 자신이 믿는 하나님께 고한다.

저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사람을 찾아가 신세한탄을 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 돌아오는 말은 공허한 위로뿐이다. 또는 정신과를 찾고 상담실을 찾아 약물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께 아뢰었다. 어떤 하나님이신가?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그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다. 하나님은 기어코 나의 머리를 들어주실 것이다. 이는 곧 주의 영광이 된다. 그렇다면 아무리 누가 나를 찌르더라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이라는 방패가 있다.

 

시인은 이를 자기 입으로부르짖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생각하고 마음으로 그리 여겼다는 게 아니다. 마음으로는 믿는 것이고, 입으로는 시인하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10).” 그러면 그 응답은 하나님의 성산에서 이루어진다. 곧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와 장소에서 응답하신다. ‘때가 이르매아기 예수로 오셨고 우리를 구속하셨다. ‘때가 차매심판이 이르고 구원의 방주를 띄우실 것이다. 곧 엄연히 하나님의 때는 따로 있다. 그 응답의 장소와 때는 아버지 하나님만이 아신다. 이를 다윗은 주께 맡김으로 평안을 구하였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주께 구하고 그리 이루어주실 것을 믿는 게 믿음이다. 그럴 때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곧 우리의 수고로 되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127:2).” 구하였으면 받을 줄로 아는 것이 신앙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7:7-8).”

 

3연은 6절 한 행으로, 다윗은 각오를 다진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절망은 예외 없다. 끊임없이 낙심은 찾아온다. 그럴 때 믿는 자와 안 믿는 자의 차이는 확연해진다. 곧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잘 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다시 말해서 전부다 나를 비난하고 조롱하고 저주한다 해도 하나님은 내 편이시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으로 시편과 나란히 놓은 신명기서의 말씀을 보면 모세의 하나님도 그러했다. 저는 이스라엘을 이끌어 출애굽하였고, 오히려 지도자로서 고독한 길을 걸었다. 사람들은 물이 없다고 원망하였고 먹을 것이 없다고 저를 공격하였다. 저는 일반인들보다 배나 더 힘든 광야 길을 걸었다. 그렇게 1년여의 시간이 지나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 모세는 그 세월을 돌아보며 아버지가 자식을 품에 안은 것처럼 자신은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고 고백하였다. 그야말로 믿는 자의 특권이란! 오늘 시편에서 다윗은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고 진 친다 해도 나는 끄떡없다.’ 하고 장담하는 것이다. 무슨 소린가?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4연은 7-8절로, 그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신다는 것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마치 아이가 서럽게 엄마를 깨우고, 아빠에게 이르는 것 같다. 어떠하든 저들은 내 편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즉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모세가 고백한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1:31).” 이제 저들은 출애굽하여 1년 여의 시간을 광야에서 보냈다. 시내산에 이르러 모세가 설교한다. 그 길이 어떠했는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안아서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다.’ 과연 그런가? 광야와 같은 인생살이는 그리 녹록하지가 않다. 애들은 애들대로 부모들은 부모들대로, 사는 게 나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다. 물이 없어서 신음하였고(15), 굶주림으로 원망하였다(16). 천막생활로 불안정한 생활을 하였고, 먹는 것과 입는 것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과연 그런 데도 우리는 모세와 같이 그 부모의 품에 안긴 것 같이하나님의 품에 안긴 것처럼 살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신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1:30).” 늘 보면 우리보다 먼저 일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보다 앞서 싸우신다. 세상은 이를 우연으로 포장하여 하나님의 품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사람들은 인생을 우연에 맡기고, 운에 건다. 저들은 그렇다 치고 우린 다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앞서 가시고 먼저 싸우신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 품에 안긴 사람들이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31).” 우리가 무얼 해서 얻은 보호가 아니다. 아이가 조건에 도달해서 부모가 품에 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강권하심이다. 우리가 마치 하나님의 손을 잡은 것 같지만 하나님은 때로 억지로라도, 억세고 강한 손으로 우리를 놓지 않으신다. 붙드신 손을 결코 놓지 않으신다.

 

길이 없는 광야에서 길을 지시하신다.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33).” 앞날이 막막하고 사는 게 힘에 부쳐 도저히 길이 없을 때,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길이 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은혜로 우리는 산다. 이 길을 간다. 먼저 그 길을 가시고 우리가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우리의 갈 길을 일러주신다.

 

 

나오는 말

 

모세는 그로부터 39년 뒤 사명을 다 마치면서 간곡하게 설교한다.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32:6).” 곧 처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사람이 모세다. 감히 전능자 창조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른 사람이 모세다. 그리하여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8:15).” 이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부르신 것이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14:36).”

 

모세는 알고 있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33:27).” 오늘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늘 근심하는 자 같으나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항상 기뻐하고!” 우리는 또한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우리는 또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이다(고후 6:10). 우리는 모세와 다윗처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친밀하게 의지할 수 있다! 그 힘이 어디서 오는가?

 

첫째는 말씀을 묵상하는 데서 온다. 그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다. 그런 시간을 일부러라도 가져야 한다. 억지로라도 만들어야 한다. 결코 다른 시간과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이 이르셨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6:31).” 너무 우리는 사느라 여념이 없다. 하나님과 따로 시간을 가져야 한다. 둘째는 기도다. 기도는 믿음에서 나온다. 믿음은 그리 되지도 않은 일을 그리 될 것이라 여기며 아뢰는 일이다. 마치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같이, ‘기사처럼 행동함으로 기사가 되었다.’ 때로는 우리의 믿음이 막연하고 맹랑하여 터무니없다. 그러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11: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