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6 주일
시편 4편
호소
4: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4:2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4: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4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4: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4: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4: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4: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오늘 시편의 주제는 ‘호소’다. 호소는 ‘억울하고 원통한 사정을 하소연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심판은 억울하고 원통한 이들에게 남은 마지막 보루다. 재판을 간절히 기다리는 쪽은 그러하다. 호소란 ‘가난한 이’의 최후 진술이다. 오늘 시편 4편은 모두 3연으로 나누어진 호소다. 1연은 1절로 ‘하나님께 대한 호소’다. 2연은 2-5절로 ‘우리 인생들에게 향한 호소’다. 그리고 3연은 4-8절로 다시 ‘하나님께로 향한 호소’다. 주제 행은 3절에 나타난다.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여 … 들으신다.’ 마치 재판장은 재판의 공정과 정의를 위해 고소와 변호를 듣는 것과 같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서도 우리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신다.
1연(1절), 하나님께 대한 호소
몇 번 강조하였듯 시편은 대부분 애가(哀歌)다. 슬픔 심정의 노래다.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하는 심정은 다른 데 더는 하소연할 데가 없는 이의 외침이다. 자신의 호소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다. 종종 성경을 읽다 우리는 머쓱해지고 계면쩍어할 때가 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55:8).” 하실 때, 멋쩍어서 머리를 쓱쓱 긁게 된다. 세상에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다들 할 말이 많다. 그럴 때 만일 재판장이 저의 호소에 감정적으로 휘둘린다면 어떻겠나? 성경은 우리를 면박주려는 게 아니다.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9).” 즉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의 머리와 이성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이해가 되고 판단이 가능하면 오히려…….
시편 4편의 화자는 그럼에도 ‘두 개의 의미’를 앞서 부연한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할 때, 하나는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 다른 하나는 그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 곧 누구한테 듣고, 어떤 이의 소개로 우리는 그 앞에 호소하는 게 아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공정한 재판’을 바라는 게 아니라, ‘편애’를 요구한다. 그래서 화자는 엄연히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국한 지었다. ‘우리의 하나님’으로 보편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내 의의 하나님’이다. 즉 화자가 아는 ‘나의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이다. 어떠하든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내 편 하나님이시다. 그런 뒤 저는 확신하는 것이다. 그러한 나의 의의 하나님이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실 것을 말이다. 또한 자신이 ‘곤란 중에’ 있을 때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던 하나님이심을 말이다. 곧 ‘내게 은혜를 베푸’실 분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한 ‘나의, 의의, 하나님’은 ‘편애의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2).”
이를 바울 사도의 표현으로 다시 읽어보면, 그런 ‘나의, 의의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다시 말해서 내가 죄가 없을 때, 나를 재판하신 분이 아니라 용서하신 분이다. 그러니까 내가 죄가 없고, 그만한 자격을 갖추고 나서야 나를 너그럽게 살피신 하나님이 아니시다. 심지어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곧 우리는 한 게 없는데 우리를 용서하시고 긍휼을 더하신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6-8).”
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면서 ‘바리새인’과 ‘세리’를, ‘부자’와 ‘가난한 자’를 나란히 두고 예수님은 설명하신 바 있다. 바라새인과 부자의 특징은 사람들 앞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늘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알아? 내가 이 교회를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지 알아?’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저들에게 대해 주님의 태도는 기이하였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그리고는 오히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이는 그냥 그렇다는 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우리 한국 교회가 100여 년의 짧은 기간에 부흥한 것은 물론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그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교회에는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보다 많다. 장애가 있고, 슬픔이 있고, 괴로움이 있는, 사회적으로나 구조적으로 저들은 더 이상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데가 없는 사람들이 주 앞에 나온다. 그래서 믿음은 때로 필사적이다.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이 실제로 더 잘 믿는다.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의 특징도 그러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르시되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눅 6:21-22).” 왜냐하면 저들의 호소를 들으시고 갚아주실 ‘나의 하나님’이 저들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23).” 그렇다면 반대로 ‘부자’들이란 어쨌든 나름 기댈 데가 있는 사람들이다. 적당히 돈도 있고, 가족도 있고, 지위나 명성도 있어서…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24).” 오늘 시편의 시인은 이와 같은 말씀과 맥을 같이 하며 ‘나의, 의의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1).” 하면서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2연(2-5절), 인생들에게 대한 호소
‘나의 하나님’ 그 ‘나의, 의의 하나님’께 호소하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나의 기도’가 ‘너’를 향하고 있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늘 자신을 위해 기도하던 게 어느덧 ‘저들’을 위한 기도로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즉 나와 같은 인생들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여기서 ‘나의 영광’은 무엇일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들이다. 짐승이 아니고 기계도 아니다. 그런데 짐승처럼 살고 기계처럼 일한다. 자신이 속한 사회를 ‘정글’이라 하고, 그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자신은 ‘부속품’이라 여긴다. 스스로도 다들 일시적인 소모품 정도로 말이다. 그런 우리 인생들에게 오늘 시편의 시인은 호소하는 것이다.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우리 사람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그래서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즉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이 땅을 창조하신 게 아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구원을 이루신 게 아니다. 그냥 그 정도였으면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죽기까지 우리 죄를 대신 속량하실 문제가 아니었다. 조물주가 피조물의 죄 값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게 말이 되나? 그저 사람을 위한 창조이고 영생이면 그에 걸맞은 정도의 하자보수 정도이면 족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다른 곳에서 덧붙여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23:3).” 하고 노래하였다. 우리의 존귀함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값어치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그래서 오늘 시인은 단호하게 우리 인생들을 향해 외치는 것이다. 인생들아!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왜? 전능자, 만유의 주,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은 기어이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서’도 우리를 ‘경건한 자들’로 택하셨다. 이와 같은 확신이 있다면,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우리는 이를 알기 때문에 시인의 말에 공감한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함부로 떠들지 않는다. 생각으로는 생각을 이룰 수 없다. 말로는 무슨 생각이든 다 이룰 것 같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올 때 돌연 그것은 실제가 되어, 이를 수행하면 자랑이 되고 이를 수행하지 못하면 수치심이 된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의 잠잠함이 놀라운 예배가 된다. 이는 주를 의지하는 결연한 침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곧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믿음의 경지는 평온함이다. 잠잠히 주께 의지하는, 그리하여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
3연(6-8절), 하나님께 향한 호소
이 땅에 사는 동안 기본적으로 사람에게는 만족함이 없다.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한다(잠 30:15).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속성은 그 고집이 무지막지하다. 그 영혼은 태생이 게으르면서도,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26:16).” 도무지 듣지를 않는다. 인생들아! 하고 하소연하여도 저들은 우리의 호소를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할 때 찾아가 호소하던 롯의 말을 농담으로나 들었던 두 사위들과 다를 바 없다(창 19:14). 그런데도 해리 에머슨 포스터라는 목사는 어디에 쓴 기고문에서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다면, 우리가 잘만 하면, 다 잘 될 것이다.’ 하고 설교했다. 에밀 쿠에는 한술 더 떠서 ‘사람은 매일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고 낙관적으로 말하였다. 오늘 날 교회들이 이처럼 낭만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교회로 전락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은 이와 반대로 강조하신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결국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지 않으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6).”
그래서 오늘 시인은 ‘나의 하나님’, ‘나의 의의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아, 그러니까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즉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수고한다 해도 저 아이 하나의 마음을 열 수도 없고, 아무리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교회로, 예배로 오라 해도 소용이 없고, 그 누구에게 믿음을 줄 수도 없고, 돌이켜 죄의 길에서 벗어나게 할 수도 없으니까 “주의 얼굴을 비추소서!” 왜냐하면 그 길밖에 다른 길이 없는데, 그것은 우리 안의 기쁨이 곧 증거이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그러니 아무리 모아둔 재산이 있어도 또는 어디 기댈만한 훌륭한 학연, 지연, 혈연이 있어도, 학벌이 좋고 직장이 철밥통이라 해도, 아내가 있고 남편이 있고 자식이 있어서 든든하다고 해도, 그러한 위로로는 감당이 안 되는 세상에서,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마 19:24).”
돌려서 말하면 가난한 자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소리가 된다. 오늘 시인은 이를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즉 시쳇말로 맞은 놈은 발 뻗고 잔다고, 내가 아무리 가난하고 별 볼일 없고 대수롭지 않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 해도, 우리의 가난이 우리로 천국에 살게 하고, 우리의 애통함이 우리로 위로를 받으며 살게 한다는 것이다. 9억, 12억 그 이상 되는 아파트를 몇 채씩 가지고 살면서도 죽겠다 죽겠다하는 사람이나,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더욱 더 기를 쓰고 악을 행하고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가며 사느라 피곤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시대에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기 때문이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곧 우리에게는 세상이 알 수 없는, 세상이 줄 수도 없는,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평안이 있다. 그러한 나의 안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나오는 말
오늘 시편의 호소는 그러므로 비굴하고 척박한 한계에서 그러니 못 살겠다고 하소연하는 호소가 아니다. 오히려 가진 것도 없이, 가난하고 억울한데도, 우리의 가난은 우리로 여유롭고 풍요롭게 한다는 찬양이다. 그래서 우리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이런 우리를 세상은 감당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8).” 곧 우리는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결코 그 환경의 지배를 당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는 인생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사는 데 길들여진 사람들의 특징을 참고하는 의미에서 정리해보았다.
① 저들은 그 마음이 허망하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엡 4:17).”
② 총명이 어두워졌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18).”
③ 무지하다.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보다 귀히 여긴다.
④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9절에 이어서 보니까
⑤ 감각 없이 산다.
⑥ 자신을 방탕한 데 방임한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⑦ 모든 더러운 것을 더욱 욕심으로 행한다.
⑧ 예수를 모르기 때문이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 기도하는 것이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곧 우리의 눈을 열어 성경을 봐야 한다. 그래서 에베소서의 말씀을 좀 더 연장하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22-24).” 결론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
- 덧붙여, 참고 내용
※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특징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이어서 나열되는 특징은 기이하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29).”
① ‘불의’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사는 일이다.
② ‘추악’은 죄를 의식적으로 즐기는 일이다. 죄는 우발적이거나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다. 다분히 고의적이거나 의도적이며 적극적이다. 모세는 단호히 이를 거부하였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 11:25).”
③ ‘탐욕’은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일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
④ ‘악의’는 내면에 숨기고 사는 악함이다. 본성적으로 그러해서 이를 뿌리 뽑을 수 있는 길은,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우리 안의 악의는 내 안에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곪은 것이다.
⑤ ‘시기’는 살인의 근원이 되는 것으로 남 잘 되는 꼴을 못 봐주겠는 샘냄이다. 이는 정욕의 문제다. 넘치는 욕구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약 4:1-2).”
⑥ ‘분쟁’은 타인을 내 의견에 굴복시키고자 하는 일이다. 존중은 없고 용서는 가당치가 않은 마음이다. 별 수 없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롬 16:17).” 저들과 백날 다투어봐야 소용이 없다. 떠나야 한다. 왜냐하면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18).”
⑦ ‘사기’는 남을 속이고 취득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수 7:11).”
⑧ ‘악독’은 악한 상황을 통해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다. 곧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롬 3:13-15).”
⑨ ‘수근수근거림’은 끼리끼리의 문화에서 얻어지는 즐거움이다. 험담하고 뒷담 까는 일로 이는 마치 별식과 같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예수님을 두고 사람들이 그러했다.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요 6:41-43).”
더욱 이어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자들은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30-31).”
⑩ ‘비방’은 남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말하는 일이다. 심지어는 속여서라도 자기의 ‘악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약 4:11).” 그 속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 곧 저를 비방하는 것은 저를 지으신 이를 비방하는 일이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 2:9-12).”
⑪ ‘능욕’은 교만하고 잔인한 일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많은 사람들이 보였던 행동이다. 군중심리가 그런 속성이다. 그 이상의 악의적인 발작이 능욕하는 짓이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막 10:33-34).”
⑫ ‘교만’은 모든 것보다 자기를 우선하는 마음이다. 자기위주의 생각이다. 그 판단과 기준이다. 이를 성경은 엄히 가르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6:18-19).”
⑬ ‘자랑’은 헛된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우쭐하는 일이다. 스스로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다.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의도가 깔렸다. 성경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자랑은 라멕의 자랑이다. 저는 자신의 죄악됨을 자랑하였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 4:23-24).”
이는 모두 하나님을 가소롭게 여기는 것이다. 그 외에 ‘부모를 거역하는 일이나 우매함이나 배약과 무정함과 무자비함’이 있다.
⑭ 부모를 거역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다. 십계명에서의 하나님을 향한 네 가지 계명 다음으로 사람으로의 첫 계명인 다섯 번째 계명이 곧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마 15:4).”
⑮ ‘우매’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의 게으름이고 무지다.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운 것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시 38:5).” 저들의 특징은 교훈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잠 26:16).”
⑯ ‘배약’은 약속을 저버리는 행위다. 처음 사람 아담이 범하였던 죄가 그것이다. 약속을 경홀히 여겼다.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을 가볍게 들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4).”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을 ‘죽을까 하노라’로 이해했다.
우리의 믿음이란 약속의 다른 이름이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곧 이루어질 것이라 하신 약속을 이루어진 것처럼 여기며 사는 것이다.
⑰ ‘무정’과 친절한 타인으로 겉으로만 위하고 정이 없는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가장 보편적이면서 혐오스러운 현상이다. 치매에 걸린 부모를 버리고, 자신의 뜻에 거스른다고 자식을 죽인다. 모두 무정이다. 이는 단순히 이웃에 대한 정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무자비함으로 나타난다.
⑱ ‘무자비함’은 냉혹하고 모진 분풀이다. 다른 말로는 ‘투기’다. 기회를 틈타 큰 이익을 노리는데, 그러는 동안 누군가의 손해에 대해서는 무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잠 27:4).”
※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성경으로의 여섯 가지 하루 일과
첫째, 성경을 읽어라.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엡 3:4).”
둘째, 성경을 공부해라.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셋째, 성경을 두고 기도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넷째, 성경을 찾아라.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 2:1-5).”
다섯째, 성경으로 묵상하라.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7).”
여섯째, 성경으로 말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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