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9 주일
시편 6편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6:1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6: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6:3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6:4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6: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6:7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6:8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6:9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6:10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시편 6편: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는 늘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 시편의 말씀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1).” 즉 ‘분노, 진노, 징계’라는 표현이 우리 마음을 어렵게 한다. 하지만 사랑은 징계가 수반된다. 더욱이 아들이면 그렇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6-8).”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볼 때도 잘못을 하면 징계가 따랐고 징계가 있어야 용서를 구하고 돌이켜 회개하였다. 남이면 굳이 징계할 것도 없다. 그럴 때 자식이면 용서를 구한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2).” 하면서 아버지 하나님께 아뢴다.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3).” 이를 구할 수 있는 것은 그 은혜를 알기 때문이다.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4).”
이때 전제되는 것은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하고 다시는 자신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곧 우리를 옥죄는 악에게 우리는 떠날 것을 명한다.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8).” 그럴 수 있는 까닭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9).” 그럴 때 나를 괴롭히던 원수들이 물러갈 것이다.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10).”
바울사도는 엄연히 ‘정죄’와 ‘징계’를 구분하였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정죄는 멸망이요 영원한 죽음이고, 징계는 교훈이요 훈계다. 우리는 창세전에 택하시고 부름 받은 주의 자녀이나 그 사명에서 벗어나 멸망의 자리로 이를 때, 죽여서라도 우리를 살리신다.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우리를 살리셨다. 오늘 우리는 본문 이사야서 5장에 열거되어 있는 ‘여섯 가지의 화있을진저’ 즉 경고의 말씀을 주목하면서 경각심을 되새기려 한다.
※ 이사야 5장에 나타나는, ‘여섯 가지의 화있을진저’
첫째, 물질만능주의에 대해 화있을진저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8).”
이윤이 남는 일이면 무엇이든 서슴지 않는 시대다. 많이 가지고도 더 가지려 드는 것을 성경은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로 비유하고 있다. 집이 있는데도 집을 소유하려 하고, 살기에 충분한데도 더 큰 평수를 고집하는 일에 대하여….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크고 더 많은 소유에 집착하는 것은 억압된 죄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자유함을 입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그런데 저들은 마음이 허하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34).” 그러나 우리는 은혜로 산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통과하게 하시던 때에 그들이 목마르지 아니하게 하시되 그들을 위하여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게 하시며 바위를 쪼개사 물이 솟아나게 하셨느니라(사 48:21).” 그러므로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둘째, 쾌락주의에 대한 화있을진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11).”
난리와 난리 더 큰 소문이 이어지고 있다. 까뮈의 말처럼 ‘모든 인생은 죽는다는 것 때문에 어차피 장난이 됐다.’ 즉 먹고 마시고 즐기는 데 의미를 가질 뿐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 32:10).” 이를 믿는다면 그처럼 죽어라 하고 더 가지려고 하지 않고, 세상 낙을 즐기려고 하지 않을 텐데,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4-25).” 그저 오늘의 쾌락으로 족한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사 5:12).”
셋째, 악독에 대해 화있을진저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18).”
악독은 의도적으로 죄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 죄는 한 겹 줄이 아니다. 어쩌다 그리 된 게 아니라 보다 치밀하게 의도적이며 적극적이고 상습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더 맛있다고 하는 게 죄의 속성이다.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잠 9:27).” 그렇게 “거짓으로 끈을 삼”고 “죄악을 끌”어 “수레 줄로 함 같이” 여러 겹의 죄의 줄로 튼튼하게 하는 것이 악독이다. 이에 “죄악을 끄는 자는 화있을진저” 보면 저들도 그게 옳지 못한 것을 잘 안다. 알면서도 그러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곧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3).” 우리는 이를 혐오하고 경계하고 멀리한다.
넷째, 도덕주의에 대해 화있을진저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0).”
자신들의 가치판단과 기준으로 도덕을 삼는 것이다. 그러니 저들은 성경을 우습게 여긴다. 복음을 꺼려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왜냐하면 성경은 자꾸 우리가 죄인인 것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세상 권세는 영원할 것 같다. 하나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다. 즉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사 5:12).” 그래서 우리는 각성한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시 39:1).” 즉 우리 인생은 모두 죽는다. 이 땅의 모든 것은 끝이 있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5).”
다섯째, 자기중심적인 가치에 대한 화있을진저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1).”
다들 자기 나름의 가치판단을 기준으로 삼는다. 저마다 생각이 있고자기 고집이 있다. 노아의 때에 사람들도 같았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눅 17:27).” 저들은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죄악으로 멸망할 때도 롯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들었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창 19:14).” 아무리 말해줘도 소용이 없다. 여기저기서 지혜가 소리를 높이는 이 시대에도,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잠 26:16).” 왜냐하면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여섯째, 인위적인 가치에 대해 화있을진저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2).”
인위적이라 하면 스스로들 그렇다고 여기는 의미부여다. 이를 다른 말로 문화라고 한다. 요즘은 선행도 마케팅이다. 기업광고는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그러나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그 사랑은 오직 하나다. 나의 가치는 죽고 참된 가치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만이 들림을 받아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러므로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3-34).”
나오는 말
오늘 시편의 말씀은 주의 징계를 두려워할 줄 앎으로 은혜의 용서를 간구하는 기도다. 곧 지금 이 시대는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딤전 4:2-3).” 저마다 자기 취향과 선호대로 산다.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권한다. 행복하기만을 바란다. 커밍아웃을 하고 버젓이 가진 것 위에 더 많은 것을 얹고 악독도 서슴지 않는다. 죄의 줄이 여러 겹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9).” 저들의 성공을 부러워하지 말자. 우리 영혼이 깨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 우리는 절대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반드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그러므로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 3:18).” 주의 진노가 이 세상을 두르고 있다.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살고 있다. 노아의 시대와 다를 게 없다. 그럼에도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니(잠 24:33).” 깨워야 한다. 일어나야 한다. 탄식함으로 주의 은혜를 구하여야 한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시 6:2).” 주께 아뢴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1).”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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