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전봉석 2020. 2. 5. 06:53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다리시겠나이다

욥기 14:1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2:11

 

 

주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나를 부르시고 나는 대답한다. 주께서는 지으신 것을 기다리신다. 욥의 기도와 그 의미를 되새긴다. 뒤이어 시편의 기도가 위로가 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42:11).” 나를 향한 격려와 위로다. 아이를 생각하고 마음이 좋지 않아서 마음이 좋지 않은 것에 대해서 나는 주께 아뢴다. 뭘 어찌 해줘야 할지, 할 수 있을지, 해야 하는지자꾸만 신경 쓰이는 이유를 나는 모르겠다. 두 시에 오는 아이는 아무래도 정신과적인 진료가 필요할 것 같았다. 생각이 모자란 것은 둘째 치고 아무런 의욕도 없는 데 따른 무기력증과 무책임함이 아이의 영혼을 좀먹고 있었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내가 다 미칠 것 같다. 애간장이 녹아나는 것 같다. 안 하면 그만인데 안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나는 주께 아뢴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예전에는 나도 그랬다. 아니 여전히 그러하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9).” 그래서 더 마주하기 힘든 것인가. 나는 아이를 보면서 뭘 어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아무 말도 못 하고 한참씩은 시선을 놓치고는 하였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6:11).” 그냥 안 한다고 할 수도 없고, 한다고 해야 봐야 나 혼자 속만 끊이는 형국이니. 그걸 야단을 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생각 같으면 애 부모에게라도 욕을 퍼붓고 싶었다. 왜 너는 너를 그렇게 내버려두고 사냐? 아이에게 할 소리는 아니었다.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을 두고.

 

열여덟 한참 꽃다운 나이에 씻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세상에 아무 낙도 없는 사람처럼 벅벅 몸을 긁어대면서, 사람이 뭐라 한들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니. 정말이지 이보다 더 지독한 무기력증이 또 있을까? 뭐든 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이다. 듣기 싫다는 식으로 네네 하니까 뭐라 말하기도 속이 터지고, 그냥 가라 하기에는 왠지 안 됐고, 나야말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아침에 오는 애나 오후에 오는 애나 서로 번갈아가면서 사람을 골탕 먹이는 것 같다. 애가 돌아가고 왜 또 토요일에 오는 친구도 전화를 하였다. 나는 지쳐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겹고 서러웠다. 지긋지긋하고 답답하기도 하였다. 좀 나아지면 모를까, 같은 날이 되풀이 되는 것은 둘째고 오히려 점점 더 악화되는 것만 같으니까. 전날에 감기가 와서 병원에 들르게 하고 글방에 오지 못했던 아이가 그 틈을 타서 머리를 했다. 다음 날 염색을 하고 나타났으니, 아 그래서 아픈 아이겠거니 하다가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도대체 다들 무슨 생각으로 사는 것일까?

 

성경은 이에 화있을진저, 인위적인 것들에 대해 경고한다.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5:22).” 술김에 용감하다. 이를 또 잘 빚는다며 공을 들인다. 그러니 뭐라 하면 뭐라 하는 나만 애간장이 탈 노릇이니. 자기만족에 겨워하는 것은 아닐까? 불쑥 내 안에 드는 의문은 그 때문이었다. 따끔하게 뭐라 한들 아픈 아이는 노여워하고 오후의 아이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토요일에 오는 친구는 결국 자기 뜻대로 한다. 그러니 자꾸 나만 이상한 것 같다. 그러든가 말든가 내버려둬야 하는데, 아니면 그만 와라 하고 선을 그어야 하는데, 나야말로 우왕좌왕이다. 아이에게 뭐라 하다 속상해서 같이 기도하였다. 자 그러니 이게 내 몫이라. 저들 탓이 아니다. 공황으로 힘들어하는 아이 때문에도 하루에 몇 번씩 울컥울컥하면서 속상하기만 하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그렇다면 나를 위해 내 안에 두시는 마음인데, 이 마음으로 대체 무얼 하시려는 것일까? 아무도 달라지지 않고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을 때 나는 의기소침해진다. 좀 더 능력 있는 자를 세우셨더라면 보다 나을 텐데. 실질적으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텐데. 나는 나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공연히 속상하고 불안하여 안정제만 늘었다. 말 수는 줄고 의욕도 잃었다. 만사가 다 귀찮다. 뚱하고 앉아 있는 두 시의 아이에게 그만 가자.’ 하고 기도를 마친 후 먼저 일어났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배웅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귀찮고 싫었다. 선생님 같으면 어쩌실 것인데요? 하고 물어서 너가 내 딸이었으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고, 머리채를 다 뜯어놓는 한이 있어도 그냥 안 두지! 사지육신 멀쩡하고 정신머리 온전한 것이 왜 그러고 살아? 그러고 사느니 두들겨 패서라도 밥값은 하게 해야지! 욱 하고 내지른 소리다.

 

혼자 남아서 갑자기 기진하여 쓰러지듯 선잠이 들었다. 일어나 앉아 아이에게 했던 말을 후회해야 할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나는 인위적으로라도 어떤 보람을 찾고 있는 것이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6:33-34).” 하나님을 바로 안다고 하면서도 늘 보면 이 모양이다. 나야말로 믿음 없는 자 같이 군다. 괜한 염려와 근심을 내가 짊어지는 꼴이다. 그런 와중에 딸애가 퇴근하고 친구들과 만나고 오겠다는 것을 발끈하였다. 지금 다들 조심하느라 사람 많은 데는 몰려다니지 않는데 제정신인가? 하고 나무랐더니 그래도 순순히 집으로 왔다. 같이 가정예배를 드리며 아이들 이름을 하나씩 열거하다 울컥하였다. 자꾸 나는 울컥울컥한다. 아이들의 사정이 안 돼서 그런 것도 있지만 나는 아무 것도 해줄 수 없고, 너무 능력도 없고 모자라서 속상하였다. 주님, 하고 부르면 괜히 자꾸 눈물이 핑 돈다.

 

그러하온데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 나의 죄를 감찰하지 아니하시나이까(14:16).” 나도 욥의 서러움으로 아뢴다. “주는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17).” 지난 날 나의 허물과 죄악을 생각하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다만 그의 살이 아프고 그의 영혼이 애곡할 뿐이니이다(22).”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42:2).” 누구에게라도 전화를 할까? 다른 이야기를 하듯 친구에게 전화를 하여 이런저런 수다라도 떨까하다 그만두었다. 왜냐하면 내가 이런 소릴 해봐야,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그러느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3).”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할 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 자신에게 자신이 일러 주의 뜻을 전하는 시인의 기도가 돋보인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6).” 그러나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