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좋아하는구나
욥기 15: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3:5
갖은 말에 사람은 좌우된다. 말과 말 사이에서 지친다. 오해가 난다. 서로 침묵하면 어땠을까? 욥의 변론도 그렇다. 굳이 일일이 답할 게 무언가? 그의 친구들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의 말들이 이어질 때면 구역질이 나기도 한다. 오늘 엘리바스의 말에서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좋아하는구나(욥 15:5).” 하는 말에서 말의 한계를 느낀다. 틀린 말이 아니다. 말이 묵도를 못하게 한다. “어찌 도움이 되지 아니하는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론하겠느냐(3)” 그것이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그만두어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4).” 물론 저의 말이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말하기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과 묵도하기를 훼방하는 것은 사실이다. 말이란 의미를 담게 되고 의미가 부여된 말은 의도를 갖게 한다.
말하다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정리할 때도 있으나 그것도 가만 보면 허사다. 성경은 이르기를,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어제 가정예배로 읽었던 말씀이다. 그러할 때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된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3).” 사람이 사는 이야기는 늘 거기서 거기라, 듣다 보면 감정을 호소하기도 하나 그래서 재보면 한줌 무게도 못 된다. 이에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기 위하여,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엡 4:3).” 성경을 읽게 된다. 저가 알 수 있었던 것을 우리로도 알게 하신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1:9-10).”
그러므로 말이란 이중적인 것 같다. 사는 이야기는 허약할 뿐이라, 말로 위로를 삼을 때 모래성에 사는 일처럼 허술하다. 말이 되나 모르겠으나 그래서 나는 누굴 상담한다느니 하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신뢰하지도 않는다. 상담이라는 말 자체가 한쪽이 전문가라는 소린데, 그 방면의 전문가에게 의뢰하는 일이 곧 허망할 뿐이다. 엊그제 누가 나더러 전문적으로 상담일을 하면 어떻겠나? 하고 말했을 때 딱 잘라 거절했다. 믿음 안에서 같이 신앙으로 이어지는 사이에도 저의 말에 내가 질식할 판인데, 구구절절 누구의 사연을 들어준다는 일은 참으로 고달픈 일이라. 더욱이 나 같은 사람은 너무 쉽게 감정이입이 되는 사람이라 쓸데없이 동요하고 당사자보다 더 힘들어하는 격이라. 말이란 이처럼 하찮은 것 같으나 뱃속 깊은 곳까지 내려간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할 때는 즐거울지도 모르나, 하고 나면 시원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엄연히 뱃속에 남아 서로에 대한 선입견이 되고 편견이 되고 자칫 누구를 이해하는 줄자가 된다. 그 한계가 너무 빤하다. 물론 하나님이 그리 행하게 하시면 그리 해야 하는 일 가운데 하나이지만 말이 가장 소비적이다. 한 것에 비해 손에 쥐는 것이 별로 없다. 두 시에 오는 아이와의 말이 그렇다. 자꾸 말해봐야 소용없는 말들로 시간을 허비하느니 오늘부터는 ‘무조건’ 성경만 읽거나 성경공부로만 하려고 한다. 말하기와 듣기 모두가 허비되는 일인 것만 같아서 내가 저 아이의 말을 듣는 일도 열에 아홉은 거짓말이라. 또한 내가 말하기도 열에 아홉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소리들뿐이어서, 말을 말자고 결심하였다. 말에 지쳐 말과 말 사이에서 길을 잃고는 나 혼자 늘 소진되는 꼴이었으니.
그러자면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안 하는 아이를 자꾸 안 한다고 해봐야 소용없고, 할 수도 없는 아이더러 자꾸 하라고 해봐야 서로가 고역이라. 아이에게 말은 안 했지만 더는 말하지 않게 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였다. 우리의 일은 하나님을 힘입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살전 2:2).” 우리의 승리는 묘연한 것 같으나, 그리고 그 길은 불가능한 것 같으나. 앞으로는 홍해 바다로 막혔고 뒤로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좌우로는 비하리롯과 바알스본 산이 막혔으니, 이 모든 게 주님의 의도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출 14:3).”
그런 와중에 기를 쓰고 아이를 설득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다독여 어르고 달래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런 가운데 원망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11).”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나? 주 앞에 엎드리는 수밖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15-16).” 그냥 나아가라. 나는 이를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감당할 따름이다. 보내시는 이가 또한 행하실 것을 안다면 말이다. 때로는 가만있으라고도 하신다. 앞뒤가 안 맞는 말 갖은데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4).” 이를 시편은 노래하였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나야말로 가만있는 연습 중이다. 가만있기가 뭘 하기보다 어렵다. 말하기보다 묵도하기가 어렵다. 말씀을 묵상하며 주를 바라는 게 나서서 내가 윽박지르고 채근하고 이끌려는 일보다 어렵다. 뭐라도 하려는 게 하늘만 보고 기다리는 일보다 수월하다. 그래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늘 우리를 몸살 나게 한다. 오후 내내 혼자 있으면서 나는 주로 그런 생각을 한다. 누구는 어떤지, 전화라도 할까? 아이에게 이걸 시키고 저걸 하게 할까? 나는 이걸 해야 할까? 미루던 것을 할까? 안달복달 잠시도 나를 놓아두지 않는 불안의 진의를 잘 안다. 가만히 주를 의지하는 일이 하다못해 뭐라도 하는 일보다 백배는 더 어렵다. 아내는 대놓고 자신은 아이들이 많아서 정신없는 게 좋다고 한다. 혼자 있거나 한두 명 두고 심심하면 그게 더 힘들다고 한다.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그런 게 아니다. 둘 다 그 자유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엄청난 값을 치르고 산 자유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오늘 우리에게 두신 이 한 날의 가치가 얼마나 막중하고 비싼 값을 지불하였는가? 그런데 이를 영접하지 않는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1).” 그럼에도 끝내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모퉁이돌이 되셨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1-12).” 다시 말해 오늘 저 아이는 피 값으로 사신 한 영혼이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내 양을 먹이라.’ 곧 내가 하는 일은 상담이 아니다. 아이를 어찌 변화시켜 거듭나게 하는 일이 내 일이 아니다. 가끔 나는 이를 혼동하는 것 같다. 이는 성령이 하실 일이다. 나는 다만 ‘내 양을 치라.’ 돌보고 위하고, ‘내 양을 먹이라.’ 말씀으로 꼴을 삼는 일이다.
다만 이를 알 때 믿음으로 가는 것뿐이다. 안 오면 어쩔 수 없고 온다는 것은 보내신다는 뜻이고, 보내셨다는 것은 내게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이 모든 보이는 게 나타나는 것으로 전부가 아니다.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 군인, 양 옆으로는 거대한 산들로 가로막혀 있다 해도, 앞으로 나아가라. 요단 그 물을 딛어라.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에 발을 내딛어라. 그럼 물이 마를 것이다. 홍해 그 물을 지팡이로 쳐라. 그럼 마른 길로 걸을 수 있다. 성경의 진리는 엄연하였다. 그러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3:5).” 여호와께 소망을 두자. 사는 게 다 별 거 없다. 언제 부르시면 가는 게 인생이다.
그러므로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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