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전봉석 2020. 2. 7. 07:02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욥기 16:19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시편 44:6

 

 

아이가 왔다. 안 올 줄 알았다. 이젠 정말 그만 한다 그럴 줄 알았다. 그럴 각오로 지난 시간에 뭐라 나무랐다. 사지육신 멀쩡하고 정신상태 온전한데 왜 죽지 못해 사는 사람처럼 무기력한지, 하도 답답하여서 더는 그만둘 생각으로 야단을 쳤다. 본인 말처럼 눈물이 핑 돌게 말했고, 마지막처럼 기도하고 돌려보냈었다. 그런데 아이가 늦지도 않고 제 시간에 왔다. 오기 전에 나는 아이가 올까? 하고 조바심 내고 기다렸고, 아이는 그렇게 멀쩡하게(?) 왔다. 너나 나나 우리의 이 모든 게 신기하지 않니? 나는 아이처럼 놀라워하며 물었다. 이와 같은 우리의 마음이 기적인 것을, 나에게 보이는 것을 아이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나에게 들리는 것이 아이에게도 보일 수 있다면. 우리는 같이 잠언을 한 장 읽고 한 구절 한 구절 그 의미를 일일이 설명하였다. 왜 이스라엘인가? 그 분명한 이유는 말씀 때문이다.

 

말씀을 받은 것이고 말씀으로 따라 사는 것이다. 다른 데 목적을 두고 사는 일은 고단할 따름이다. 말씀이 도다.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20:21).” 말씀은 계시다. 이는 살았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이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4:12-13).” 나는 아이에게 놀라워하며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렇게 나와 내가 말씀 앞에 앉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

 

이 시대에 과학이 지배하고 논리가 압도하며 사람의 기술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데,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는 성경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고 더 알고 바르게 실천하고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우리 속에 생겼다는 것이 신비한 일이고 놀라운 기적이 아니겠나? 아이도 자신이 어째서 또 오고 왜 오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글쓰기를 안 한지 꽤 됐다. 그러니까 글쓰기를 공짜로 배우려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그 영혼의 허기짐을 아이는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같이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한다. 기도하고 같이 주기도문으로 마친다. 떠듬거리면서도 아이가 외웠다. 시편 1편을 암송하고 있고 23장을 암송하고 있고 고린도전서 13장을 암송하고 있다. 안 한다 그래야 맞는데, 더디지만 떠듬떠듬 외운다. 나에게 누가 기적을 묻는다면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어째서 이스라엘만 주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나? 말씀을 들었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라 길을 떠났다. 모세는 말씀을 듣고 애굽으로 돌아가 저들을 출애굽시켰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말씀을 따라 배와 가족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고 읽히기 시작하는 게 기적이다. 이는 항상 살아 있는 하나님이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 저의 말이 그저 무식한 베드로의 말로 들리지 않는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23).” 이와 같은 맹랑한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린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24-25).” 곧 나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의 말이 그를 통하여 들려지는 주의 음성으로 마음에 새겨지는 일. 나는 그런 아이를 보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다. 저 애가 왜 오지?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믿기지 않는데, 그러면서도 또 아이가 오지 않으면 어쩌나하고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너나 나나 이런 마음이 곧 증거라.

 

아이는 이 말을 이해했을까? 말씀은 그 자체로 생명력이 있다. 아침에 오는 아이에게는 때로 더는 할 말이 없어 성경을 쓰게 한다. 그럼 또 신기한 것은 쓰란다고 쓴다. 쓰고 그게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하는데도 쓴다. 같이 성경을 읽고 어떤 의미를 말해주면 그게 어떤 뜻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아멘, 하고 아이는 화답한다. 그러고 있는 우리는 모두 비정상적이다. 이런 시대에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을 믿고 자기주도적인 삶을 선호하고 따르는데 우리는 알 수 없는 이끄심에 자신을 맡긴다. 친구와 모처럼 통화를 하고 이와 같은 말씀의 역사를 말해주고 싶었다. 이제 6개월 됐다는 저의 성경공부를 응원하였고, 그것이 무슨 숙제처럼 또는 빚진 마음을 청산하려는 열심이 아니기를 당부하였다. 오후에 아이가 돌아가고 친구가 전화를 하여 후원헌금을 얼마씩 보내고 싶다고 하였다. 이 또한 신기한 일이다. 그게 얼마냐가 아니라 그런 마음이 든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았고 같이 궤사한 마음으로 세상을 즐겼다.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 마음이 궤사한 자는 강포를 당하느니라(13:2).” 나는 한 발 앞서 그런 세상살이가 죽는 길임을 깨달았고 그 증거로는 늘 저 친구가 앞섰다. 저가 뜬금없이 병에 걸리고 큰 수술을 할 때면 내 안에 먼저 두려움이 들어왔다.

 

, 세상을 쫓는 길에는 평강이 없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57:21).”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 악하다. 살인을 하고 도둑질을 하는 삶은 그 표면일 뿐이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이 악이다. 우리에게는 이제 말씀이 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말씀은 살았고 말씀은 항상 있다. 수천 년 전 모세가 접한 말씀이 그에 앞서 아브라함이 들었던 말씀이고, 노아가 따랐던 말씀이다. 그 시대마다 다들 시대가 달라졌다며 말씀을 듣지 않았으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6:1-2).” 오늘에도 다를 게 없어서 아이는 뭘 안다고 자신은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을 하였다.

 

말씀은 이루어진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33:9).” 말씀밖에 답이 없다. 토요일에 성경공부 오는 친구가 생각보다 퇴직금이 많이 나온다며 카톡을 했다. 전날에는 일주일만 더 일해달라고 한다며 투덜거렸다. 그럴 때면 감사한 줄 알아라, 감사헌금 내라,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일렀다. 감사가 빠지면 아까울 뿐이다. 이래저래 손익계산은 언제나 궁벽하다. 아직은(?) 십일조를 낼 처지가 못 된다. 후원헌금도 구색을 맞추는 정도다. 억지로는 하지마라. 내 말에 서운했을 수 있겠다. 말씀은 엄연하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23:29).” 나는 다만 전할 뿐이고, 어설프지만 따를 뿐이다. 저들이 할지 안 할지, 애가 올지 안 올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를지,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를지, 나는 정말이지 하나도 장담할 수 없다. 다만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이라. 말씀 외에 다른 말은 다 소용이 없다.

 

오늘 욥의 고백이 그렇게 들린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16:19).” 저는 강변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고 잠잠하여도 내 아픔이 줄어들지 않으리라(6).” 내 말의 하찮음이여! 나의 말은 죽이고 성경으로 대신한다. 힘들면 기도해라. 기쁘면 찬송해라. 범사에 감사해라. 그렇게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44:6).” 다만 나는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