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7편 10-17절 / 우리의 방패는 감사와 찬송이다

전봉석 2020. 2. 20. 16:06

20200223 주일

 

시편 710-17

우리의 방패는 감사와 찬송이다

 

 

7:10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7:12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7:13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7:14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

7:15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7:16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7:17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들어가는 말

 

요즘 우리는 전염병 신종 코로나 19’로 인해 마스크를 쓰고, 손을 자주 씻고,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한다. 스스로 자가 격리를 하듯 자숙하는 일은 전염병이 창궐하였을 때 근신을 지키는 일로써, 평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이 네 눈 앞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3:21).” 근신이란 별도의 격리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일이다.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5:2).” 이는 막연한 은신이나 은둔의 삶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한담이 난무하는 시대에 입술로 지식을 지키는 일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필수다.

 

지혜란 주를 경외함이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28:28).” 주를 경외함이란, 첫째, 지혜는 악을 떠나는 실제의 삶이다.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8:12-13).” 둘째, 악을 떠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 셋째, 악은 곧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이다. 우리가 사는 동안 전염병이 창궐하듯 죄가 난무하다. 우리들은 죄다 죄에 노출되어 산다. 우리는 안 믿는 사람들과 무엇이 다를까? 오늘 시편의 말씀은 중반부와 후반부에서 우리가 어떻게 저들과 다르게 대처하는지를 알려준다.

 

1. 죄로부터의 방패는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7:10).” 이 방패를 활용하는 방법은 첫째가 감사이고, 둘째는 찬양이다. 17절을 보자.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곧 저는 의로운 재판장이시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11).”

 

우리가 감사와 찬양으로 이 방패를 선용하는 것은 누구보다 하나님께서 불의를 보고 매일 분노하시는 의로운 재판장이시기 때문이다. 불의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신다. 자기의 이름을 위해서도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회개다. 회개는 자신의 불의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일이다. 죄를 인정할 때 용서를 구한다.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으면 징계하신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12).” 또한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13).” 하나님은 결코 죄를 용납하실 수 없다. 죄를 인정하지 않고는 용서를 구할 수 없다.

 

우리가 주를 경외하는 지혜는 악을 미워하는 것이고, 이를 알게 하는 것이 명철이다. 죄는 어쩌다 죄가 아니다. 우리는 본래 죄에서 태어났고 죄악 중에서 잉태되었다.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14).” 이를 고백하는 것이 회개다. 그런데 육의 속성은 이를 거부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래서 혼란스럽다. 괜찮았던 것들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가까웠던 사람들이 달라진 우리를 불편해 한다. 우리의 이해와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죄는 언제나 의도적이다.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15).” 전에는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다. 기회는 잡았어야 하고, 수단과 방법은 놓치지 않는 것이 능력이었다. 세상은 그렇게 우리를 가르쳤지만, 성경은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16).” 우리 인생은 그러므로 허무할 따름인 것을 알게 한다.

 

다시 정리하면, 우리의 방패는 하나님께 있다. 그를 방패삼을 때 우리에게는 감사와 찬양이 나온다.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17).” 지혜자는 말하길,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7:14).” 우리 인생은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이 병행한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형통하면 감사하고 곤고하면 기도한다


 

2. 오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바울은 우리의 달라진 모습을 은혜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4:24).”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1) 성령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으면 가능하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4).” 이는 우리가 그의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다. 그 증거라는 자라간다는 것이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16).”

 

2)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으로 가능하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21-23).” 결국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

 

그럼에도 육의 소욕은 하나님을 근심하게 한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4:30).” 그래서 우리가 성경공부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아지는 게 없는 것 같지만,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21).” 우리 안에 예수의 영이 자라간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24).”

  

  

3. 하나님은 사랑으로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종종 우리는 우리의 열심으로 우리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여긴다. 천국에 가는 조건을 그처럼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이비종교나 광신자들의 광적인 태도는 미련하다. 즉 스스로 열심일 때 자신을 망치고 타인을 억압한다. 성경은 이를 엄격히 말씀하시길,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단언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열심일 때 우리의 열심이 우리를 외식하는 자로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렇다면 외식하는 자의 특징은 무언가?

 

1)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한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6:2).”

 

2) 자기만족을 위해 한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5).”

 

3) 남에게는 염격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하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7:5).”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 사랑은 화목 제물로 이 땅에 오셨다. 이를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에게는 놀라운 특이점이 생긴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즉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에게 잘해주고, 득이 되고, 가족이니까 사랑하는 사랑은 안 믿는 사람들도 한다. 내가 왜 이런 사람을 사랑하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사랑을 하게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나의 사랑이 아니다. 저로 인해 마음이 아프고 애달아 못 견뎌하다 주께 아뢴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랑으로 중보기도 한다.

  

  

나오는 말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10:8).”

 

어지러운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으로 방패를 삼고 산다. 그것은 감사와 찬양으로 나타난다. 감사는 주신 상황에서 묵묵히 준행하는 것이고, 찬양은 어떠하든 주의 선하심으로 자랑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 곧 말씀이 우리에게 가깝다. 이를 마음으로 믿는 것이 감사이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찬양이다. 이는 우리의 특징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9).”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11).” 이를 확실히 보증하는 것이 성경의 약속이다.

 

이 엄혹한 시대에 지혜와 근신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지혜는 주를 경외함이고, 근신은 명철을 지키는 일이다. 명철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이에 우리는 우리의 열심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자랑은 오직 하나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6:14).”

 

그러할 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0:13).” 곧 주의 이름이 우리의 방패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7:10).”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