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01 주일
시편 8편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8: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8: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8: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8: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8: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8:7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8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8: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거룩
‘코로나19’ 사태로 우리의 불안은 가중되고 있다. 그 피해는 속출하고 온갖 유언비어는 난무하다. 이러할 때 우리는 섣불리 하나님의 의중을 속단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믿는 자들을 위함이다. 세상을 위한 게 아니다. 믿음의 자녀들은 이럴 때 더욱 경각심을 갖아야 한다. 베드로는 이르길,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여기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얼까? 주님의 관심은 우리의 거룩이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믿음의 분량에까지 자라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거룩함으로 지어져가는 것인데, 세상적으로는 이 일이 고난이 아닐 수 없다.
-훈련
이에 죄로 인하여 어그러진 거룩을 회복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곧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리가 주 앞에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우리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튼 일련의 두려움과 불안과 염려 가운데서 우리가 주를 바라는 일은 이를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광야 40년의 길을 훈련시키신 것과 같은 원리로 우리를 훈련하신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말씀
곧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3).”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일은 주의 거룩에 동참하는 일이다. 이를 위하여 오늘의 이와 같은 사태는 우리로 근신과 지혜를 지켜 말씀가운데 거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다. 모세는 염려하였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12-13).” 곧 우리가 안일하여져,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14).”
-겸손
역사상 우리가 사는 이 때는 가장 안온하였다. 전쟁의 시대도 아니고 가난과 굶주림으로 헐벗던 시절도 아니었다. 그렇게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14-16).” 다들 너무 풍요로운 시절을 사는 터라, 부족함이 없는 세대다. 넘치는 자유와 풍요를 주체하지 못하는 시대다. 이러한 때에 우리를 낮추시며 겸손을 일깨우신다.
-사모함
첫째, 우리로 겸손하게 하신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둘째는 말씀을 사모하게 하신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셋째는 주를 더욱 경외하도록 하신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6).” 사람은 ‘가난’할 때 주를 찾는다. 어려워야 귀한 것을 안다. ‘부자’는 아쉬울 게 없다. 말씀은 이를 구분하신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이는 자연스럽게 심령의 문제이다(마 5:3). 넷째, 우리로 찬송하게 하신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신 8:10).” 있는 것에 감사할 줄 아는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는 일이고, 이를 허락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하는 일이 찬송이다.
※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 8:1, 9)”
오늘처럼 어지러운 시국에 이와 같은 찬송이 우리 안에서 울려나오고 있는지? 우리는 너무 ‘사랑’의 하나님을 생각한다. 그 하나님의 ‘은혜’만을 앞세운다. 그러나 일련의 사태에서 보듯이 사랑도 은혜도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다. 다시 말해 사람의 어떤 이해와 규정도 하나님을 제한할 수 없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 하는 말은 그래서 옳지 않다. 하나님은 그러실 수 있다! 그 사랑도 은혜도 엄연히 하나님의 거룩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한다. 좋고 좋은 하나님의 세계를 누리고자 창조하셨다. 이 누림은 거룩이 전제다. 그것도 하나님처럼 거룩해야 한다. 흠도 없고 티도 없어야 한다. 어떻게 우리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이를 가능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사랑이다. 은혜요 긍휼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인격적인 존재로 그 천국을 하나님처럼 누리기를 원하신다. 그러할 때 그리 누림이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그저 우리를 로봇이나 꼭두각시로 만드신 게 아니다. 하나님 같은 인격적인 존재로 지으셨다. 그 사랑에 기인하는 존재여서 우리는 거룩할 수 있다. 그 거룩은 하나님의 희생뿐이다. 우리에 의한 어떤 대가가 아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개입하셨다. 이를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서신 첫 부분에서 언급하고 있다(엡 1:4-6).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하심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왜 그러신 것일까? 그게 사랑이다. 은혜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곧 우리로 주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시려고, 이 찬송은 경탄이다. 환호와 갈채다. 조금 가벼운 예이지만, 어느 콘서트장에서 열광하는 팬들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조건에 따라 사랑하는 게 아니다. 팬들의 환호는 저의 기쁨이면서 동시에 아티스트의 영광이다. 사랑하는 이의 사랑은 본인도 그 사랑을 받는 이도 모두의 기쁨이다. 어느 것도 일방적이거나 강제적이지 않다.
바로 그와 같이, 우리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의 공통된 환호와 고백이 오늘 시편의 찬송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 8:1).”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간섭과 개입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오늘 다윗은 이를 주목하였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2).” 저들과 맞서 싸울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는 하찮고 별 볼일 없는 존재이다.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사 41:14).” 그런 우리를 ‘주가 도우실 것이다.’ 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온통 성경의 핵심이다.
바울은 노골적으로 이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곧 이를 오늘 시편에서 다윗의 목소리로 들어보면 참으로 놀랍다. 고로 우리가 대단한 것은, 우리로 주를 찬송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아무나 이 일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단들은 더 극성스럽게 찬송한다? 열광하며 군무를 맞추고 열을 지어 횡대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죽어라 하고 성경공부도 열심히 한다?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왜 그럴까? 저들은 그것으로 구원을 이룬다고 여긴다. ‘주의 손가락으로 하늘과 달과 별들을’ 만드셨듯이 자신들은 위대한 존재이고, 그 교주는 다름 아닌 하나님이라는 데 열광한다. 저에게 사람이 몰리고, 돈이 몰리고, 권력이 집중된다. 우리와는 전혀 별개의 자들이다. 종자가 다른 것이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 왜들 그럼 저들은 잘 되는 것일까? 이 땅에서 권세 잡은 자의 힘이 저들로 부하게 한다. 대중문화 자체가 그렇고, 온갖 유행의 근거가 그렇고, 이단의 속성이 그렇다. 저들은 적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이 땅의 영광을 취할 수 있다.
우리는 그 뿌리가 다르다. 가라지와 알곡이 한 데 있고, 같은 색깔을 띤다고 해서 같은 게 아니다. 뿌리가 전혀 다르다. 우리는 주를 바란다. 그의 인자하심은 나의 생명보다도 귀하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6).” 우리는 주의 은혜 아래 자신의 주장과 의지를 내려놓는다. 그리하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우리의 찬양은 우리가 자신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다. 마리아도 아니고 어떤 세계적인 의인도 아니다. 어떤 특정 종파도 아니고 성지도 아니다. 오롯이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사랑도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도 아니다. 하나님이시다. 이로써 우리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다는데 벅차다. 그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는데 부족할 뿐이어서 주께 엎드릴 뿐이다. 그리하여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셨으니, 이 얼마나 소중한 생명이고 사명인가?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다. 우리가 주를 찬송함이 여기에 있다.
나오는 말
오늘날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는 자신을 더욱 깨달을 뿐이다. 그리고 주의 은혜를 붙든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우리의 몰이해와 몰상식은 드러난다.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신 4:39).” 이를 깨닫고,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대상 29:11).” 이 고백이 우리의 찬송이 되어야 한다.
모든 일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모든 것이 주께 속하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우리는 다만 주를 바란다. 그러므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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