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전봉석 2020. 2. 18. 07:00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욥기 27:4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55:22

 

 

살면서 우리를 그토록 대적하고 업신여기는 것이 실은 우리의 동료요, 친구요, 가까운 이였던 것을.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55:12-13).” 그러할 때의 덧없음에 대하여, 그러니 극단적인 생각이 든다는 데야그럴 수 있겠다, 그럴 수 있겠다. 나는 저의 상황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기껏 새로 옮겨가 일터로 삼으려고 했던 곳에서 하루 전에 연락이 와서 같이 일할 수 없으니 출근하지 말라고, 그것도 그저 문자로 알려온 것이라. , 이건 아니지 않아요? 하며 서러움을 내게 묻는데 나는 아찔하였다. 그러니 저의 속은 어떻겠나 싶기도 하고. 뭐라 위로할 말이 없어 답답할 때, 하나님은 새로운 곳에서 연락이 오게 하시고 면접을 보러가게 되었다고 오후께 다른 목소리로 알려왔다. 일련의 상황이 하루에 다 일어났다. 나는 숨을 고르듯 안타까워하다, 다행스러워하다, 감사하다, 속상하기도 하여서.

 

우리가 주를 믿는다는 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거듭남의 신비다. 사는 데 따른 우여곡절이 쉬질 않는다. 손위처남은 왼쪽 어깨 회전근개파열로 수술을 하고 며칠씩 입원을 하게 되었다. 어떤 어려움, 위기 앞에서 우리는 속수무책이라. 그럴 때 과연 우리의 믿음이 도움이 되던가? 우리 의지와 우리의 신앙이 우리를 붙들어주겠나? 의연하게 떵떵거리며 큰소리치듯 어려움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내던 말들과는 다르게 걱정과 근심이 앞서고 두려움과 염려가 우리를 옥죄는 것이다. 이를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이를 알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6:17).”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 하는 고백은 내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장담할 수 있는 믿음은 없다.

 

그런저런 통화를 하느라 아이가 앞에 있는 오전 시간이 심란하였다. 아이도 불안했던지 여느 날보다 엉뚱한 소리를 더 많이 하였다. 문득 저 아이의 의식의 흐름이 곧 우리 인생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느닷없고 터무니없는 날들로 하루하루가 이어진다. 나는 토요일에 오는 친구의 그런저런 사정이 안타깝고 답답하였으나 말로다 저를 위로하고 권면하여야 했다. 그저 힘내라, 한다고 해서 힘낼 수 있는 일이겠나? 그 힘은 주께 있음을,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는 삶 그 이상에 있는 것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39).” 성경이 성경을 증언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성경은 계시다. 열어보이셔야 보인다. 볼 수 없는 것을 보려고 해서 볼 수는 없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우리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게 없는 사람이다. 받은 것이 아니면 가진 게 없는 인생이다. 그런 걸 스스로 뭐나 좀 되는 줄 알고, 마치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처럼 굴다가는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자기 자신이다. 호언장담하던 자신은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존재였다는 것은 다 늦어서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은 거듭나야 하는 일이었으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3:7).” 아니면 살 길이 없다. 성경을 연구한다고 해서 성경이 열리는 게 아니고, 예수를 닮는다고 해서 신앙인의 삶이 진정성을 갖는 것도 아니다. 이끄셔야 하고 다스리셔야 하며 이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셔야 하는 일이다. 계시란 그런 것이다. 오히려 내가 왜 믿지? 도대체 믿기지 않는 이 일을 어째서 믿을 수 있는 것이지? 우리의 상식은 이를 알 길이 없다. 내가 저로 인해 마음이 어렵고, 어려움을 주체할 수 없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하였다. 그저 속상하고 답답한데 그래서 더욱 주를 바랄 뿐이다. 내 의지로 하는 게 아니었다.

 

결국 우리의 대적은 우리의 고집이다. 나는 욥과 그의 세 친구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저의 친구들이 곧 저 자신이었지 않았나? 저의 고집이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성경의 가르침은 결국 체험이 없으면 헛것이다. 전혀 다른 삶을 살면서 아무런 체험도 없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겠다. 날마다 체험되는 삶의 현장에서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느끼고 누리고 나눌 수 있다면!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23:6).” 이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더욱 선명하였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 단지 그럴 것이란 추측이 아니라 실제의 의지다. 그 지팡이에 몸을 기댄다. 그의 막대기로 적을 막아낸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이를 저에게 말로다 또는 문자로 전달하는 데 있어 주의 마음이 필요하였다. 주의 사랑이 아니면 내가 왜 그 일로 같이 속상하고 답답한지 주체할 수 없다.

 

그러므로 거듭남이란 실전이다. 실제의 체험이다. 상식이 아니다. 그저 이해로는 어찌 설명이 안 된다. 실행이 따르는 삶이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2:13-14).” 누구를 원망하거나 지금의 신세를 한탄하기보다 그럴 수 있겠다, 하며 오히려 상대를 두둔하고 이해하려 드는 저의 태도에 대해 장하다고 말해주었다. 것도 손아랫사람이었고 나름 꽤 오랜 시간을 호형호제하며 지냈던 사이라더니, 무슨 이유로 것도 출근을 하루 앞두고 출근하지 말라고 통보를 하게 된 것인지? 도무지 납득이 안 가는, 억울하고 분한 상황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마음은 원망과 시비가 아니라 이해와 배려의 마음이었다. 오히려 내가 속상해하며 툴툴거리니까 저는 그를 두둔하며 다들 경기가 너무 어려워서 그렇다며 되레 저를 감싸는 것이었다. 같이 대대거리며 싸울 일이 아닌 것이다. 세상은 그렇듯 사람 의지할 게 못 되고 믿을 수 없는 게 사람이어서, 나는 부러 뭐라 하다 그러한 이해와 배려가 훌륭하다고 칭찬한 것이다. 그게 어디 우리 의지로 되는 일이겠나? 내 안에 사시는 주님의 증거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2-13).” 이 세상에서 얻은 게 아니다. 내 안에서 끌어낸 것도 아니다. 밖에서 왔다.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누구도 자신을 자랑할 수 없는 이유다. 누구도 자신을 확신할 수 없고 자부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와 같은 복음의 체험은 살면서 살아가는 동안에 거듭되었다. 그리하여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26:18).” 이것이 성경의 약속이다. 보여주시는 세계다. 나에게 이루어지는 날이다. 나는 결코 누구보다 나아서 저를 말로다 위로하고 말씀으로 권면하는 것이 아니다. 나야 말로 하루에도 수골백번을 자빠지고 넘어져서 혼자 신음하며 실의에 빠져들기 일쑤인데,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55:1).” 그러니 나로서는 기도뿐이다. 아이도 돌아가고 혼자 앉아 있으려니까 서럽고 답답하고 속상하고 한심해서상식적으로는 이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왜 저이 때문에!

 

그러한 내 안의 답답함이 주의 이름을 더욱 의지하게 하는 것이다. 내 안의 주님께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4:19).” 이는 해산의 수고가 따르는 일이다. 내가 아이를 상대하며 돼도 않는 말을 듣고, 비현실적인 언어로 답답해하다 보면 이러다 내가 미치는 거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엄습하곤 하지만, 그러해서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55:5-6).”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을 때도 들어,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7).” , 그저 외면하고 쉬고 싶다는 마음도 들지만, “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8).”  그런데 오히려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16).” 비록 그 날이 되풀이 되어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17).” 고로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