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전봉석 2020. 2. 20. 06:58

 

 

나는 지난 세월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

욥기 29:2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시편 57:7

 

 

지난날을 돌아보며 옛날을 그리워하는 일은 덧없다. 오히려 성경은 거듭나기를 바라신다. 오늘에 힘들 때 옛날을 돌아본다. “나는 지난 세월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29:2).” 욥의 풍자가 안타깝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해도 된다. 누구나 저마다의 무게를 짊어지고 산다. 어떠하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오늘 시편의 말씀은 새 힘을 준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57:7).” 자꾸 뒤돌아보는 것은 포도원의 작은 여우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2:15).” 저의 특징은 경계심이 많고 자꾸 뒤돌아보며 여기저기 들쑤셔댄다. 것도 늘 보면 포도원에 꽃이 필 때다. 믿음이 좀 뿌리 내려서 꽃이 피고 있을 때 우리 안에 작은 여우는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다. 외로움도 같고 그리움도 같고, 지난날이 좋았는데 싶은 것도 같고.

 

그러할 때 주님은 단호하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 죽으나 사나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되돌릴 수 없다. 사람과 사람은 물론 시간과 역사의 흐름도 같다. 목사 안수를 받을 때 어느 원로 목사가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되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순종의 길을 걸을 것인가 불순종의 길을 걸을 것인가. 나는 그때 참 많이 울면서 다녔다. 그러면서도 바라기를,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25:13).”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길이었으면. 더는 우연이나 숙명 따위에 끌려가지 않았으면. 나야말로 얼마나 자주 그리움에 젖어 살곤 하였는지. 그 모든 게 덧없다. 그저 풍자일 뿐이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53:1).” 오늘의 나로 하여금 생각하고 마음 쓰고 온통 관심이 기울게 하시는 것은 모두 주의 은혜라.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2).” 내세울 것 하나도 없는 듯하나, 심지어는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3).” 그 모든 게 나를 위하신 것이었으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4).” 그야말로 지난날을 돌아볼 때 나는 도무지 고개를 들 수 없으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 오늘의 내가 누구를 위해, 저의 사연으로 괴로워하며 안타까워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일이었으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6).” 이미 나의 모든 허물을 지시고 담당하셨다.

 

오전에 오는 아이와 같이 멀리 걸어 이른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럴 때마다 나로 인해 힘들고 아이로 인해 힘들다. 아이의 반응에 나 또한 예민해져서 불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면서도 한다. 같이 걷고 말하고 마주한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을 때면 가만히 주를 부른다. 오후에 오는 아이와는 무작정 성경공부부터 한다. 죽상을 하고 입은 뚱하니 내밀고 하기 싫은 표정이 역력하지만, 그래서 더 한다. 아니면 얘를 볼 일이 없다. 그리고 글을 쓰게 하고 나는 설교 원고를 다듬었다. 아이 앞에서 내 일을 한다. 뒤뚱거리면서도 차를 내주고 말을 걸고 격려하고 용기를 돋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아이에게 이르기를 뭘 어떻게, 죄를 그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그치는 것이라고 일렀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늘 죄를 짓는 사람으로 살면서 이런 말씀을 접할 때면 머쓱하고 송구하다. 그 마음이 귀하다. 전에는 반감이 먼저 일더니 이제는 할 수 없음으로 죄송하다. 그럼 됐다. 주님이 하신다. 나는 아이가 하기 싫은데도 억지로 하는 것 같으나 그게 귀하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정말 울면서 신학을 다녔다. 하기도 싫고 할 수도 없다고 여겨 그처럼 도망치고 마다하고 변명하며 거절하였는데, 운전하고 학교로 갈 때면, 수업 시간에 들어가 숨을 고르고 앉아 있을 때면, 그러다 찬양이라도 하고 누가 말씀이라도 전하면, 주책없게 흐르는 눈물은 감사나 찬송의 의미이기보다 송구하고 불편해서, 하기 싫어서 도망치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문득 어제는 아이의 표정을 보며 나는 그때의 나를 떠올렸다. 신기하여서 그런데 왜 오니? 하고 되묻고 싶었다. 단순히 글쓰기를 공짜로 배우려고 오는 것은 아니다. 외롭고 심심해서도 아니다. 나는 아이를 이끄시는 그 이끄심이 예전의 내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성령의 강권하심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우연 같은 나날 가운데서 하나님의 통치를 배운다. 주가 다스리시고 주가 거느리신다. 내가 하는 게 아니듯 아이도 아이 스스로 왜 그처럼 꾸역꾸역 나오는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주께서 널 참 많이 사랑하신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해줄 수 있었다. 그의 은혜다.

 

그 은혜로 우리를 부르셨다. 이는 어쩌다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1:15).” 창세전에 이미 계획하신 일이라.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1:4).” 궁여지책으로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만 맡기신 그 자리에서 심겨진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백합화의 사명을 다할 뿐이다. 주어진 상황은 우리가 손 댈 게 아니다. 개선하여 보다 나은 환경을 만드는 일은 우리 몫이 아니다.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12:27).” 나는 이를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에게서도 본다.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16:20).” 저는 저의 자리를 지켰다. 그 신세가 처량하고 딱하나,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21).” 예수님은 유일하게 모든 비유의 말씀에서 익명이 아닌 저의 이름을 앞에 놓으셨다. 나사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람이다. 저는 그것으로 족하였다.

 

주어진 삶을 산다는 것은 뭔가 이루며 대단한 업적을 이뤄가는 게 아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라고 오늘을 우리에게 맡기신 게 아니다. 주어진 조건과 상황과 환경은 전적으로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다만 어떠하든 그 자리에서 꽃을 피워 거기에 심으신 이의 뜻을 다하는 것이 충성된 사자가 아닐까? 추수 때에 그 주인에게 얼음냉수와 같은 사명이란 그 쓰심에 있어 역할을 다할 뿐이다. 그럼에도 종종 하나님으로 인해 맺어지는 인연보다 자연인으로 얽혀 의지하고 함께 했던 지난날의 인연을 더 소중히 여기고는 하는 것이었으니. 누가 울적하여 보육원 시절 같이 지내던 어디 누구에게 가서 며칠 쉴까한다고 할 때 안 그랬으면 좋겠다고 권면한 것도 그 때문이다. 서로가 안 믿던 시절, 서로가 위로로 삼았던 것들을 그리워하는 것인데 그러니 술잔이 오가고 외로움을 달래줄 여자를 찾고 그 값을 물 수 있는 것을 능력이라 여기면서 자위할 텐데. 보면 안 믿는 옛 친구와의 관계는 이미 지나간 물과 같아서 다시 되돌려 퍼 올린다고 해서 퍼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전혀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은, 성경공부를 해야 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의식 너머의 성령의 일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때가 되면 무의미한 듯 같이 읊조렸던 신앙고백과 주기도문이 기억날 것이고, 같이 읽고 나누었던 성경공부가 영혼을 믿는 발판이 될 것이다.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16:4).” 이 일 또한 주가 하신다. 내가 원하고 강요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오고 누구와 통화를 하거나 문자를 좀 나누고, 설교 원고를 다듬고 어쩌다 보면 어김없이 또 하루가 갔다. 아무런 소득도 변화도 성장도 기대도 할 게 없는 것 같지만, 나는 다만 심겨진 자리를 지킬 따름이었다. 그러할 때 오늘 말씀이 내 어깨를 흔드신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57:8).”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1).”

 

그리하면,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