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욥기 28:28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시편 56:10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명령이다. 이를 어찌 받을 수 있을까? 혹시 가끔은 돼도 ‘항상’이라 하면 불가능한 게 아닐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때론 이와 같은 말씀이 가혹하게 들린다. 그런데 그럴 수 있으니까 그러라고 하신다. 그냥 그렇다는 게 아니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 앞에는 ‘주 안에서’라는 단서가 붙었다. 즉 ‘주 안에서’라면 항상 기뻐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닌, 명령의 말씀이다. 심리학에서 사람이 즐거워하는 것을 네 가지 단서에서 찾았다. 첫째, 사랑받을 때 사람은 기뻐한다. 둘째, 자신을 소중히 여길 때 기뻐한다. 셋째,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긍정적으로 느낄 때 기뻐한다. 넷째,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눌 때 기뻐한다. 이것들은 보편적인 것이다. 애나 어른이나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 기쁘다. 누구라도 자신을 소중히 여길 때, 또는 여겨줄 때 기쁘고, 그 형편이 어떠하든 그것을 좋게 여길 때 기쁘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남을 위해 나눌 때 기뻐한다.
이를 성경은 간과하지 않으셨다. 성경은 막연한 망상이 아니다. 엄연히 현실을 딛고 사는 실제의 삶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도 터무니없는 게 아니다.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앞서 심리학에서의 보편적인 이유와 다르지 않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 때문에 기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 중에서도 기뻐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그 소망은 무엇인가?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경건하지 못한 나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나의 마음에 부은 것으로 기쁘다.
둘째, 이로써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소유하였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빌 3:1).” 그래서 저는 확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7-9).”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되었다.
셋째, 어떤 형편이든 이를 좋게 여김으로 기쁘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빌 4:10).” 그러므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11-12).” 어떠하든 내가 자족할 수 있는 까닭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주 안에서’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넷째, 이 소중하고 귀한 복음을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있어서 기쁘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8).” 저는 감옥에 갇혔다. 그럼에도 기쁜 것은 그런 자신을 두고 바깥에서 합심하여 기도하며 서로 증거하는 까닭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것으로도 기쁜 것이다. 이에 대해 남은 것은 이제 하나이다. 그럴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순종할 것인가? 불순종할 것인가?
나는 이와 같은 말씀을 두 사람의 경우에서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오전 일찍 토요일에 오는 친구가 카톡을 하였다. 기도를 받고 면접을 갔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어찌 됐든 새로운 두 곳에서 연락이 왔고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실지 알 수 없으나, 우리의 순종은 기도였다. 나는 전화를 하여 같이 기도하였다. 우리의 처지와 형편이 어떠하고, 그래서 지금 심정이나 상황이 어떠하든지 우리들로 하여금 기뻐하게 하시는 이는 ‘주 안에서’ 우리를 항상 기뻐하게 하실 것임을 붙들고 기도해주었다. 내가 가진 것은 그것뿐이었고 우리가 붙들 것도 그것뿐이었다. 다른 하나는 두 시에 오는 아이로 인해서이다. ‘이런 애’와 성경공부를 해서 뭐하나싶은….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고, 괜히 그냥 서로에게 힘만 빼는 일 같아서 회의와 갈등이 나를 들고 흔들 때면 얘를 보고 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이 자리에 두신 이를 보고 한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때로는 있는 듯 없는 듯 아무런 성과도 없는 것처럼 막연할 때가 있다.
그러나 염려할 일이 아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8).” 어쩌다 백합화가 아니다. 우리를 여기에 심으셨고 기르셨고 꽃을 피우게 하시는 이가 따로 계시다. 저 애를 보내셨고, 우리로 성경을 읽고 같이 성경공부로 만나게 하시는 이가 하실 일이다. 시간이 된다고 해서 나는 두 시의 아이에게 매일 오겠나? 하고 물었다. 그래봐야 다음 주까지 방학도 얼마 남지 않았다.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러겠다고 하니 것도 신기하고 희한할 따름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28:19).” 먼저는 내가 뭐라고 나에게 이런 사명을 두셨을까? 저 애가 뭐라고 주께서는 이처럼 신경 쓰이게 하시는 것일까?
나는 하루 동안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을 통해 ‘어떠하든’ 또는 ‘그럼에도’ 우리가 항상 기뻐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묵상하고 그 단서를 일상에서 얻을 수 있었다. 어떤 성과는커녕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은데, ‘들의 백합화를 보라.’ 하고 주께서 내 앞에 놓으셨다. 우리는 다만 그 자리에서 뿌리 내리고 자라고 줄기를 뻗어 꽃을 피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란 내가 더 좋은 땅으로 옮겨 심는 것이 아니라, 맡기신 그 날에 그 일과 그 상황에서도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의 새 출발은 이미 시작되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7).”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을 때도 우리는 살아서 주의 영광이 된다. 이 모두는 은혜로 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오전에 오는 아이는 여전하여서 나는 더 이상 저를 두고, 왜? 또는 어떻게? 하는 의문을 품지 않는다. 때론 싫증나고 이러다 내가 되레 미치겠다, 하는 염려가 드는 까닭은 내가 자꾸 뭘 좀 어떻게 하려고 할 때이다. 옮겨 심고 다른 품종으로 바꾸려고 할 때이다. 엄연히 저 들에, 이 백합화를 심으신 이는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자라게 하실 이도 하나님이시다. 다만 나는 물을 주고 거름을 더하느라 하나마나한 것 같은, 성경공부를 한다. 같이 말씀을 읽고 쓰고 기도하고 같이 이른 점심을 먹는다. 이것이 하루 일과가 되었다. 누가 내게 기도를 먼저 받고 면접에 갔으면 좋겠다고 문자를 했을 때 내가 거절하거나 마다할 일이 아닌 것을 알았다. 때로는 이와 같이 하찮아 보이는 일이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음을 염려하거나 노려워할 게 아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그러므로 ‘버러지’ 같이 별 볼일 없고, 하찮고, 대수롭지 않으나 그런 나를 그처럼 사랑하시고, 위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으니,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14).” 누가 뭐라 해도 주는 나를 도우실 것이고 나의 구속자가 되실 것이다. 하물며 그러한 내가 누구를 감히 업신여기고 헛되이 대할 수 있겠나? 아이가 돌아가고 얼마 있다가 친구 내외가 들렀다. 지난 명절에 주려했던 선물 세트를 들고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갔다. 늘 제자리걸음인 것 같은 친구를 보면서 그 안 믿는 동거인을 대하면서 나는 임의로 저를 마다하지 않고 그러는 중에도 성령이 주도하시고 함께 하심을 생각하였다.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13).” 이 모두는 주가 하시는 일이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도 그러므로 ‘주 안에서’ 얼마든지 실현 가능하고 엄연히 지켜야 하는 명령이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그러므로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 다만 내가 해야 하는 한 가지 일, 심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자라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며, 그 들의 백합화로 복음이 전파되게 하실 이도 하나님이시었다. 그러므로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 28:28).” 순종은 실전이다. 막연한 구호나 추상적인 어법이 아니다. 고로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시 56:10).” 이는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13).” 이를 확신하게 하시는 날마다의 증거가 있다. 고로,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이는 그가 땅 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살피시며
바람의 무게를 정하시며
물의 분량을 정하시며
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시고
비구름의 길과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음이라
-(욥 28:23-26)
그러므로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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