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징계를 위하여 혹은 땅을 위하여 혹은 긍휼을 위하여 그가 이런 일을 생기게 하시느니라
욥기 37:13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시편 65:10
마치 숨었던 바퀴벌레 쏟아져 나오듯 한다. 그때마다 기겁을 할 노릇이다. 그 실체를 드러내시려고… “혹은 징계를 위하여 혹은 땅을 위하여 혹은 긍휼을 위하여 그가 이런 일을 생기게 하시느니라(욥 37:13).” 오늘 일어나는 일련의 사태가 놀랍기만 하다. 누구와 통화를 하고 문자를 하고 또는 위로를 하면서 내게 먼저 불안장애가 있다는 게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욥을 둘러싼 저들의 말처럼 말만 화려할 수 있는 것인데, 나는 누구를 위로하다 내가 위로를 받는다. 저에게 들려주는 말씀이 고스란히 나에게 더하시는 말씀이라….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시 65:10).” 이처럼 내게 더하시는 은혜는 나의 불안과 초조에 비례한다. 결코 나는 누구보다 나은 게 있어서 으스대는 말이 아니다.
더욱이 이단에 대하여는 뭐라 한들, 주께서 하시지 않으면 감당이 안 되는 종자들이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 전에 두어 명의 아이가 기억난다. 그렇게 애태우며 그 부모 속을 썩이더니 몇 년 뒤 아이는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그곳에서 세례까지 받았다고 하였다. 그런 뒤 하는 일마다 잘 풀린다고 하니, 종종 기도를 부탁하던 아이엄마는 그것으로 됐다고 하였다. 또 한 아이는 유난히 외로움을 탔는데 뜬금없이 누구와 어디 자주 성경공부를 하고 다닌다고 하였다. 번번이 예배에 빠지고 나와 하던 것은 싱겁게 여기더니, 거기가 어딘가 했더니 다락방이라고 한 것도 같고 무슨 카페에서, 어디 친구랑 같이, 이 말 저 말을 하는데 느낌이 안 좋았다.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다. 이는 내가 누굴 구원하는 일이 아니다. 가만히 지나놓고 보면 내가 누구를 위한다고 하였지만 일련의 일들이 오히려 나를 위하였다.
‘나도 그래’라고 하면서 고백할 수 있는 나의 연약함이 있어서 감사하다. 마치 나는 의연하고 태연한 것처럼 또는 정말 저보다 믿음이 좋고 신앙이 강해서인 것처럼 뭐라 한다면 나의 위선은 나를 찌른다. 누구 말에 울컥, 안타까워하는 까닭은 ‘내가 그래서’이다. 그 심정을 알 것 같아서 더는 뭐라 할 말을 잃을 때가 더 많다. 이단에 대하여,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11).” 우리가 맞서 싸울 수 있는 대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저를 돌이켜 내가 선도할 수도 없는 일이다. 다만 그 모든 것이 다 때가 있나니,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 이어지는 각 때마다 주가 이루신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이를 들을 수 있는 귀는 따로 있다. 친구는 한바탕 염려와 근심은 쏟아내면서 정작 주를 바라고 의지하기보다는 뉴스에서 떠들어대는 것들에 집중할 따름이다. 저들이 어땠나, 누가 어쩌니 하면서, 다 들었던 말을 늘어놓을 때 문득 생각이 들었다. 같은 사안을 두고도 저마다 가지는 생각과 느낌과 그 일련의 일들이 들려주는 소리를 각기 다르게 듣는 것이구나. 누구는 정치적으로, 누구는 행정적으로, 누구는 이단을 경계하는 것인지 싸잡아 신앙을 우롱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소리로… 그래서 그런가, 나는 요즘 ‘아멘’ 하는 말이 종종 민망하다. 아무 데나 갖다 붙여 아멘 하고, 여기저기서 박수를 치고 찬양을 하고, 미친 것들처럼 합동으로 열과 횡을 맞추어 설교(?)를 듣고 군무를 맞춰 찬양을 하는 일에 대하여… 내 안에 이는 민망함으로 괜히 자꾸 부끄럽다. 주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 같아 억울하다.
그럼에도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4-5).” 그 앞에서 누가 감히 고개를 들 수 있을까? 나는 그래서 신앙이 당당한 사람들이 무섭다. 자기 믿음을 과신하는 사람들이 겁난다. 부러운 게 아니라 송구하다. 이는 결코 ‘우리가 행한 바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았다. 한 교주를 중심으로 신봉하고 세뇌되어 헌신하는 저들 집단의 군무와 열창에 나는 숨이 막힌다. 또는 집단 이기주의 같이 창궐하는 전염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위신과 그 교단의 정통만을 고수하는 큰 교회들의 위세에 나는 민망하다. 마치 자신들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처럼 구는 열과 성의를 나는 혐오한다.
우리는 다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6-7).” 하나부터 열까지 거저 받은 게 은혜다. 내가 조금이라도 내세울 게 있고 공헌한 게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다. 마땅한 보상이다. 은혜는 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 고개도 들 수 없으나 다만 바라는 송구함이다. 가정예배로 같이 읽은 말씀에서 나는 이단에 대하여, 저는 성적인 유혹과 같이 맞서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피하고 외면해야 하는 근신의 영역임을 깨달았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10).” 바울이 서신에서 디도에게 전하는 말씀은 ‘영생의 소망을 따라’ 우리는 다만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룬 게 아니다. 은혜다. 은혜일뿐이다.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7).”
이는 복음의 핵심이다. 결코 내가 벌인 일도 아니고, 내가 이루어가는 것도 아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그러니 나는 또 어떠했나?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딛 3:3).” 그게 전부 나였다. 그런 나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하심이 나타나셨을 뿐이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4).”
그런 내가 누구를 권면하는 데 있어 마치 나는 저보다 우월하고 보다 나은 신앙을 가지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누구에게 기꺼이 나를 위한 기도를 부탁한다. 다만 모든 게 다 때가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날 위해 고난 중에 거하셨던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2).”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이 모든 사건과 상황과 사태는 다 교훈이 외쳐 부르는 지혜라.
그저 어쩌다 벌어지는 일이 아닌 것이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잠 1:20).” 우리를 향해 아우성이다. 그 지혜가 “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을 즐겁게 할 것이요(2:10).” 그러므로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16).” 그가 나를 지키신다.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20).” 그러므로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4:7).” 다 잃는다 해도 지혜를 얻음이 복이다. 두려움은 엄습하고 어떤 불안은 나를 쥐고 흔들기 일쑤지만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30-31).” 쓸데없이 부화뇌동,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소리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 모든 때마다 우리를 주인으로 세우신다.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단 2:21).” 그러니 나는 모르겠다. 누구는 의연하여 아랑곳하지 않고 소신껏 목회를 하고 누구를 나무라며 규합하고 다스리고 통치하는 자 같으나 나는 그러는 저가 하나도 부럽지가 않다. 도리어 무섭다. 저의 태연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남을 쥐락펴락하는 저의 믿음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나는 그저 소심하여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시 89:47).” 주께 아뢰고 고하여 은혜를 구할 따름이다.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65:4).” 더 무엇을 바랄까.
주가 내게 더하신 은혜라.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10).” 다만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11-12).” 그리하여 “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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