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언 9:10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시편 79:9
일련의 사태를 보며 나도 모르게 자꾸 신경이 쓰인다. “이방 나라들이 어찌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나이까” 하는 오늘 시인의 고백처럼 싸잡아 기독교를 욕하고 하나님을 오해할까 하여, “주의 종들이 피 흘림에 대한 복수를 우리의 목전에서 이방 나라에게 보여 주소서.” 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시 79:10).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안 믿는 저들에게 나타내게 하소서, 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 심지어는 믿는 이조차 회의가 일고 갈등이 생겨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동일시하는 경향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들의 맹목족인 신앙과 광신적인 믿음이 조롱거리가 될 뿐 아니라, 우쭐하는 안 믿는 것이 스스로 지혜로운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에는 언제나 혹시나 주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음을 받게 될까봐,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9).” 하는 기도가 필수다.
시편은 우리에게 탄식에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한다. 기도는 환경과는 상관없이 찬양을 배우게 한다. 내가 좋아하는 C. S. 루이스의 표현 가운데 ‘가혹한 자비’라는 말이 있다. 저는 이 이율배반적인 표현을 사랑하는 아내가 죽고 난 뒤에 하나님을 향해 사용하였다. 서로 너무 끔찍이 사랑하자, 그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을 외면하고 부정하는 자리에 이를까봐 하나님은 ‘가혹하게’ 그의 아내를 암으로 데려가셨고, 이를 그는 ‘자비하심으로’ 받아내었다. 루이스의 표현이 옳고 그름을 떠나 문득 드는 생각은 아담과 하와다. 저 둘의 사랑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리에까지 이른 것 아니겠나?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 2:23).” 그처럼 아내를 사랑하게 되자, 아내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선악과’를 앞에 두고 갈등할 때 저는 이내 제지하지 못했다. 이를 아담이 모르고 있었을 리 없다. 묵인하였을 뿐이고 결국 아내가 건네자 하나님의 말씀보다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나는 루이스의 ‘가혹한 자비’라는 표현을 이해할 때면 똑같이 우리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연상한다. 처음 죄가 들어오던 때와 같이 지금도 수시로 같은 일은 벌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의 그 중심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에 따라 그 사랑이 자칫 그 어떤 유혹보다 달콤하고 잔혹할 수도 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부정하고 잠시 잊어버리게 하는 환각과도 같은 것이다. 자식이 됐든 친구가 됐든, 나아가 이상이 됐든 어떤 신념이 됐든. 심지어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온전하게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그 열심으로 우리는 그와 같은 끔찍한 우상을 만들 수도 있다. 언제든 금송아지가 우리 곁에 있다. 온갖 머큐리, 마르스, 주피터 들이 우리 안에 내재한다. 하긴 전에 누가 말하기를 가족들이 모두 지옥에 가는데 나만 천국에 가는 것이면 나도 차라리 가족들이 있는 지옥으로 갈래,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름 참 대단한 사랑이다. 이처럼 우리의 숭고함이 그 어떤 우상보다 무서운 숭배의 대상이 된다. ‘우리도 왕을 세우자.’ 하고 스스로들 통치하고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고 했을 때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방의 것과 다를 게 없이 흘러갔던 것이다.
오해 때문이다. 이 지독한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단순히 그러다 마는 쪽이 아니라 아예 전혀 다른 하나님을 만들어낸다. 오늘의 이단도 역사적으로 그 숱한 사이비 광신자들과 다를 게 없으나 엄청난 사람들이 휩쓸려 간다. 왜냐하면 저들은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바람직한 삶으로는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 여긴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이 땅을 개혁하고 사람들을 계몽하여 이 땅에서의 삶을 윤택하게 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세상을 이기었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래서 점점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게 아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마 24:6).” 주기적으로 전염병이 창궐하는 게 이제 끝이 아니다. 나라가 나라 사이 전쟁이 끊이지 않고, 온갖 헛소문 가짜 뉴스가 판을 치는 세상이 점점 더할 것이다. 믿는 이들도 속수무책으로 속아 넘어가서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하는 말에 난감할 따름이다.
그러니 안 믿고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삶을 사는 상식의 삶이 가장 위대하고 합리적이고 고상한 것 같다. 이때는 그리 낯설지 않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눅 17:26).” 결국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설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오히려 적대시하여 미련한 것으로 여길 때에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키기까지 할 때에도 그러하였다(27). 또한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할 때와 같이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그와 같은 일상을 무엇보다 사랑하며 수고하다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이것이 결국 그때의 일로 그친 게 아니었다(28). 누가 종종 묻기를 언제까지일까? 한다. 나도 모르겠다. 다윗도 물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
도대체 언제까지 이와 같은 혼란과 공포와 두려움과 불안이 우리를 억누르고 억압하도록 내버려두실 것인가? 욥의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분명히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내 곁에서 나와 함께 하심을 알기는 알겠는데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기는 안 믿는 사람과 다를 게 없으니…!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10).” 우리는 그럼에도 어떠하든 ‘가혹하신 자비’를 통해 주를 더욱 앙망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도 말씀하셨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이와 같은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든든한 감사가 되는지!
심지어는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16-17).” 이는 주가 하신 말씀이다. 저의 약속이시다. 공연한 소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백은 한결같지 않겠나?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다들 죽어라죽어라 하는 이때에 우리도 다를 게 없이 힘에 겨워 탄식하지만 그것으로 기도를 배운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때 비로소 찬송이 나온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13:5).”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또는 사건과 사건 사이에서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6).” 주의 은덕을 알고 느끼고 간직하며 사는 삶이 복이었다.
나는 누구에게 종종 그래서 혼자 걸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해! 그래도 넌 네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있잖아!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말로 위로한다. 아침마다 오는 아이를 마주할 때면 저의 갇힌 세계로 인하여 속상하고 답답하다가도 그것에 귀 기울이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어제도 무슨 일로 야단을 치듯 차근차근 말해주다 화가 또 속이 상해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게 어디 애 탓인가? 애도 안 되는 것을. 말은 생각을 거치지 못하고, 생각은 마음을 담아내지 못하며, 마음은 급하고 생각은 엉뚱하여 언어는 부적절하며 행동은 또 충동적이기만 한데… 그러지 마라, 말을 조리 있게 해라 하는 잔소리가 자꾸 나오자 목사님도 엄마 같다고 한다! 아, 그 엄마의 심정은 또 어떨까? 그러니 누가 허튼소리처럼 자신의 삶을 노여워할 때 가장 기본적인, 네 발로 걸을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하냐? 너는 두 아이가 있어 그 가족과 함께 살 수 있으니 또 얼마나 감사하냐?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8).” 찬양을 잃으면 기도도 허사고 믿음도 가짜다. 그 어떤 우상보다 무서운 게 자신의 신앙일 수 있다. 그 신념이 자신을 주도할 때 자기주장이 자신을 삼키는데도 알 길이 없다.
그러니 지혜자는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잠 30:15).” 오늘 우리에게 일러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9:10).” 부디 주를 경외함보다 앞서는 모든 것은 우상이다. 그러므로 “네가 만일 지혜로우면 그 지혜가 네게 유익할 것이나 네가 만일 거만하면 너 홀로 해를 당하리라(12).” 그래서 우리는 탄식하다가도 두려운 마음으로 기도를 배운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시 79:9).”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0) | 2020.03.15 |
---|---|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0) | 2020.03.14 |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0) | 2020.03.12 |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 (0) | 2020.03.11 |
곧 생명의 길이라 (0) | 2020.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