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도가 정직한 자에게는 산성이요 행악하는 자에게는 멸망이니라
잠언 10:29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시편 80:19
우리는 얼마나 연약한가. 두렵고 떨림으로 안다. 코로나19로 인해 마닐라가 봉쇄됐다는 소식에 가슴이 철렁한다. 아들이 거기 없었다면 필리핀이 지금 어떠한지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문득 드는 생각이 우리가 주께 나아가는 것은 세상에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이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2).” 주를 의지하게 되는 까닭은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겔 37:11).” 그게 아니라, 그래도 사람에게 기대고 어쨌든 세상에 뭔가 일말의 희망을 두고 있는 동안에는 뭉개고 늦추어 주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한다.
어떠하든 세상은 하나님을 거절하고 떠났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 그러한 세상에서 내가 주를 바란다는 일은 당연히 무모하게 여겨진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계시가 아니면 모든 진리는 무효다. 하나님이 열어 보이시기 위해, 거리에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지혜가 외쳐 소리치게 하신다. 나는 불안한 마음이 들어 말씀으로 나아간다. 그러는 내가 미련하게 여겨져도, “여호와의 도가 정직한 자에게는 산성이요 행악하는 자에게는 멸망이니라(잠 10:29).” 주의 말씀만이 나의 산성이 된다. 그리고 또 신기한 것은 불안해지면 청소를 한다. 바닥을 쓸고 물걸레질을 하며 남의 문 앞까지 훔친다. 아이는 글을 쓰면서 그러는 내가 희한한지 왜 그러세요? 하고 자꾸 물었다. 그와 같은 나의 불안이 주를 의뢰하게 하는 기틀을 마련한다.
더는 안 믿는 친구와 길게 말하는 게 어렵다. 할 말도 없고, 나의 이런저런 마음 두는 이야기가 저에게도 별로 가닿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니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사자가 움킨 것이 없는데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는데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암 3:3-4).” 전에 의지하고 위로로 삼았던 것을 놓게 되는 것이다. 더는 쥐고 있을 게 없다.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면 서로의 문제를 들어도 그런가보다 할 뿐이고,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 친구와는 누구에 대한 이야기든 어떠한 상황과 사실에 대해서도 이제는 관점이 다르다. 나는 염려로 주를 바라지만 저는 염려로 누구 탓을 한다. 나는 불안으로 말씀을 의지하지만 저는 불안으로 허세를 떤다. 믿음의 교제가 아니면 나눌 이야기는 물론 그 마음도 서로에게 닿지 않는 것이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히 9:8).” 성령이 이끄신다는 것에 대해 나는 이제 모호하지 않다. 먼저는 두려우면 두려운 대로 불안하면 불안한 대로 주께 아뢴다. 서성이며 또는 청소를 하며 주를 바란다. 그 마음이 온전하여지는지 더욱 연약하여지는지 더는 개의치 않는다. 다만 확실한 것은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데 방점을 찍는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우리의 안일한 영혼을 싫어하신다. 언제 내게 마닐라라는 도시가 관심이기나 했던가? 우리나라 대구가 어떻고 심지어 우리 동네 인근 만수동과 송도에 확진자가 있다는 소식에도 그런가보다, 하고 강 건너 불구경하던 것인데… 종일 불안하여 주필리핀대한민국대사관 홈페이지에 들어가고, 카톡 친구를 맺고, 알림을 받고, 뭐라 새로운 소식이 알려오면 가슴이 철렁하면서 그 내용을 확인하다가… 불현듯 하나님에게도 세상은 그렇지 않을까? 하는 맹랑한 생각을 하였다. 여기에 내가 있으니까! 우리 하나님의 자녀가 있으니까! 세상이 점점 어떠하든지, 그게 아니라 ‘내 아이가 있는 곳’, 오늘은 그곳이 어떤지…. 나의 관점은 맹랑하나 감격스러운 마음이 동시에 일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그냥 두고 보실 수 없는 까닭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살기 좋은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주의 백성이 있기 때문에! 바벨론에 끌려간 주의 백성이 돌아오기까지 바벨론은 덩달아 주의 관심 안에 있는 것이다. 아니면 세상에 소중한 무엇이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 1:11).”
여러모로 생각이 많은 나날이다. 오고가는 아이의 행실에서도, 어디 철거를 하며 사람들의 헛된 원상복구와 또 반복되는 무모함에서도, 누구의 구구하고 처절한 사연에서도… 그러니 우리는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뿐이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시 73:35).” 좀 외람된 소리 같지만 나는 종종 누가 죽었다는 소식에 한편으로는 부러움도 갖는다. 비로소 벗어나 주께로 갔구나, 싶은. 그런 걸 보면 정작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고통이다. 고통으로 인하여 나의 죄악된 본성이 드러날까 봐. 그러므로 사는 날 동안에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행 26:19).” 살 수 있기를. 살아서 사는 동안에는 부디 주님만을 의지하게 하시기를. 그리하여 오늘의 불안을 벗 삼고 내게 두시는 고단함을 사랑한다. 저녁에 주의 이름을 부르다 잠들면 금세 아침이라. 아!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사 53:1).”
그래서 이제 나는 어떤 어려움을 느낄 때면 주가 내 곁에 가까이 계시는구나, 하고 느낀다. 아침에 아들애와 카톡을 하고 그곳 상황을 듣다 가슴이 철렁하고, 의지와 상관없이 불안이 엄습하고 있을 때에 늘 오는 아이는 와서 일기를 쓰고 성경을 쓰고 같이 성경공부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온통 내 마음은 근심뿐이라. 그러할 때 오늘 지혜서의 말은 입을 다물라는 거였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 예전 같으면 어디라도 가고 누구라도 만나 불안을 숨기고 많은 말로 이어가며 그러니 저러니 했을 텐데, “의인의 혀는 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20).” 내가 의인인 까닭은 그러므로 주를 바라게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까닭은 주의 자녀가 있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까닭은 내 안에 주의 영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도 말을 쏟아내는 일에 대해 경계하셨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곧 나의 묵상글이 아침마다 길어지고, 나의 사연보다 그로 인한 말씀 구절을 찾아 되새기는 일에 열심인 까닭은 말의 헛됨 때문이다.
별식 같아서 마음 깊이 내려간다 해도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그것이 썩어 부패하고 악취가 나는 것이 원망과 불평이었다. 그러느니 하나님 앞에서 재잘거리는 아이처럼 나는 말이 많아진다. 자고로 사람은 위기가 오면 그의 상태가 드러난다. 겉으로 멀쩡한 줄 알았던 그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위기는 우리를 표현하게 하는 놀라운 힘을 가졌다. 누가 공적 마스크를 못 사고는 약사에게 행패를 부렸다거나 온통 댓글마다 누굴 욕하고 정부를 비난하는 내용으로 가득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위기가 나를 진단하게 한다. 어쩔 것인가? 내가 주께 바라는 한 가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확실히 전과는 달라진 게 있다면 나는 교회에 가 있는 게 좋다. 말씀을 보든, 누워서 책을 읽든, 서성거리다 청소를 하든 뭘 하든….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하는 말씀이 뼈를 때린다. 그러면서 또 달라진 것은 어떤 요일이든, 뭘 하지? 하는 게 없어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 늘 하던 걸 한다. 가는 데로 간다. 해야 할 걸 한다. 누가 오든 안 오든, 알든 모르든, 할 일이 있든 없든,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곧 오늘도 나에게는 내 다리로 걸을 수 있는 힘이 남았고, 어디가 아프니 어쩌니, 사연은 여러 가지라 해도…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그처럼 나는 아이를 그곳에서 마주한다. 그 안에서 불안해하고, 거기 있음으로 위로를 얻는다. 이처럼 몽매하고 맹랑하다 해도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염치불구하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죄인이지만, 나는 ‘그를 믿음으로,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곧 주께서 나를 버리실 리 없고 내가 사는 이 세상에 관심을 두실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하여… 대사관에서 알림 공고가 길게 오면 나는 한참을 그곳 소식을 살피고 혼자 마음을 어르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 거기에 내 아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 이럴 수 있는 나의 뻔뻔함이 엄청난 값을 대신 지불하신 이의 사랑인 것을,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20).” 그래서라도 결코 없었던 일로 방치하고 나 몰라라 하실 리가 없다. 고로 오늘의 이런저런 불안과 두려움과 누구보다 못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믿음이지만,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요일 1:3).” 자고 누워 평안한 쉼을 얻는다. 곧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시 80: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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