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
잠언 13:13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시편 83:18
교회가 세상의 눈총을 받고 있다.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세간의 이목이 곱지 못한 때이다. 교회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성남 어디 같은 교단의 교회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46명이나 무더기로 나오고, 그 가운데 담임목사 내외도 감염이 되었다. 여러 사람들의 막말에 대하여는 뭐라 다룰 가치가 없다. 저들은 그저 지껄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하지만 이번 사태를 통해 예배 형식과 그 행위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이참에 교회는 성찰해야 한다. 무슨 유행처럼 예배 형식은 굳어지고 교회는 구조화 되었다. 사람들을 많이 모아 교세를 화장하는 데 있어 동원과 선동과 사람들의 맹신은 필수가 되었다. 맹목적인 운집이 교회를 확장하는 데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된지 오래다. 전도 왕을 가리는 게 하나의 예이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의 초기 사역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저들은 예수를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다. 그러던 저들은 모두 예수를 십자가에 다는 데 앞장을 섰다. 자기들 좋을 대로의 바람과 요구로 모여든 자들이었다.
우리 안에 믿음이 있다는 것은 어떠하든, 어디에 있든 주를 바라는 데 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나님도 강제하지 않으셨다. 그 전적인 선택을 우리에게 두셨다. 하물며 교회가 이를 강제하고 억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세상을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빛은 빛의 자녀들을 위한 것이다. 어둠은 끝내 어둠이다. 나는 공연히 속상하고 답답하였다. 이래저래 서로들 그 사정은 있겠으나 사정보다 우선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이다. 목회자는 자신의 사명보다 우위에 하나님의 이름을 둔다. 이는 말씀이다.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잠 13:13).” 곧 우리는 말씀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도 우선할 수 없다. 예배가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다. 오직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시 83:18).”
그러면 우리의 딜레마는 교회에 안 가면 예배가 과연 가능한가? 혼자 묵상하고 경건을 사모하는 마음 정도로 예배라 할 수 있는가? 이를 가늠하여 그렇다, 아니다 할 수 없다. 오직 우리 안에 두시는 믿음으로 이해할 따름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이는 너무 주관적인 것 같으나 우리는 모두 개별적이다. 하나님 앞에 혼자 선다. 교회나 교단 위주로 서는 게 아니다. 가족별로 나뉘는 것도 아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셨고 야곱의 하나님이셨다. 같이 했던 누구에게 그 무리로 한데 묶지 않는다.
그럼 하나님의 영을 알고 바라는 데 있어 그 기준은 성경뿐이다. 말씀이 전부다. 선봉에 서는 자나 저의 말을 추앙하는 자는 모두 그릇된 길로 갈 수 있다. 말씀을 전한다고 말씀에 완전한 자는 아니다. 바울은 이를 늘 경계하였다. 그래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저가 설마 믿음을 의심하여 구원받지 못할 것을 염려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자신이 전한 그 말씀에서 자신이 벗어날까 하여 자신을 쳐 복종시킨 것이다. 예배란 일상의 이런 순종이 아닐까? 성경은 말한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운집하여 구름 떼처럼 모여 누구의 설교를 강연처럼 듣고 누구는 이를 설파하며 여러 모양으로 사람들의 호응을 얻는 게 예배가 아니다. ‘듣는 것’은 스민다는 의미가 있다. 그저 모여 앉아 수동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이를 삶에 배여 모양이 되고 형태가 되어 순이 죽어 소금에 절여지는 것과 같다. 곧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다.
이에 우리의 이해는 지식에 있는 것도 누구의 놀라운 설명에 있는 것도 아니라, 믿음으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오직 주의 영광을 보고 주의 영광에 이르는 것은 우리가 장차 들어가 누릴 천국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교회는 이 시국에 주일 예배로 사람들을 모아야 하나 흩어야 하나, 인터넷 예배니 화상 예배니 하는 것도 다만 하나의 방식일 따름이지 각자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하나님 앞에 마음과 몸과 뜻을 다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할 때 우리의 안일하고 평소 몸에 밴 게으름의 죄가 이를 흐트러뜨리는 것에 대해 이참에 회개해야 한다. 그럼에도 다시 또 주 앞에 바르게 앉아야 한다. 이는 꼭 형식이나 어떤 모양이 아니다.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그 시간을 구별하고 그 행위도 거기에 속하는 것이다. 주의 영광에 들어간다는 것은 믿음의 행위이지 행위로써의 일사불란한 형식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한 동작으로 한 목소리로 한 장소에서 기계적으로 화답하는 환호와 열광이 아니다.
나는 종종 예수님 당시의 설교 시간을 상상하곤 한다. 때론 식사 도중에 때로는, 바닷가 작은 고깃배 위에서, 더러는 한적한 시간 한두 명과 함께… 예수님은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으셨다. 그때마다 어떤 옷을 입어야 하고 따르는 무리들이 동일하고 기계적인 음색으로 화답하는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그랬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예수님은 아주 심하게 질타하셨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5).”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을 위해 모이는, 사람에 의해 행하여지는 모든 것이 외식이다. 나는 이번 기회에 교회의 각성은 예배의 형식에서 되짚어야 한다고 본다. 모이고 안 모이고, 주일을 교회에 오고 안 오고, 하는 모든 문제는 전적으로 개별적인 믿음의 문제다. 설령 그것이 잘못된 형식으로 그릇 간다 해도 저와 하나님과의 문제다. 교회의 형태와 형식과 그 오랜 시스템의 구조화는 보존되어야 할 것보다 무너뜨려야 할 게 더 많다.
천편일률적으로 교회란, 하고 이루어지는 하나 같이 똑같은 형식과 모양의 예배(?)가 오늘 우리 사회의 누가 되고 있다. 저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길에 버려져 밟혀지고 있다. 그저 속상하고 답답하다. 그러니 나 또한 어느 정도 규모의 교회이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목회 선상에 있다면 다른 논리로 접근했을 수도 있다. 아이가 선뜻 어느 교회를 추천하니까 너무 크고 비대한 것에 거부감을 갖는 일은 그 의미가 크다. 아무튼 이래저래 생각이 많은 나날의 연속이라. 무엇이 더 성경적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저의 영광에 동참하는 일일까? 개인적으로 나에게 예배란, 이 시간이다. 누구와의 통화이고 누구에 대한 애달픔이다. 누가 방문하는 일이고, 누구와 함께 그의 구구한 사연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바라고 찾고 의지하는 일이다. 주일은 그 분기점이다. 안식일을 기억하라는 말씀을 나는 맹랑하게도, 날마다가 안식일이다. 모든 창조는 끝났다. 구원도 이뤄졌다. 모든 게 완성되었고 오직 하나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만이 남았다. 그날이 더딘 것 같으나 이는 오랜 기다림 가운데서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예정하사 택정하신 영혼이 남은 것이다.
속상하고 다른 한편으론 여러 생각이 많은 날이었다. 그러할 때,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잠 13:14).” 말씀뿐이라, “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15).” 우리 앞에 두셨다. 자, 이제 어쩔 것인가?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신 30:15).” 이제 어디서든 복음은 전하여진다. 지혜가 소리친다. 못 듣던 시절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 13:20).” 고로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시 83: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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