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전봉석 2020. 3. 19. 07:11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잠언 15:33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시편 85:12-13

 

 

모처럼 멀리 걸어서 점심을 먹고 왔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마스크를 쓰고 멀찍이 떨어져서 걸었다. 햇살이 고운 오후였다. 해를 등지고 걷자 나의 걸음걸이며 길게 늘어지는 모양이 걸음마다 앞서서 밟혔다. 가끔씩 멈춰 서서 사람들의 오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이들만 천진난만하게 재잘거렸다. 한참씩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의식한 듯 아이들은 힐끔거리다 달아났다. 해를 앞에 두고 걷자 걸음마다 앞서 햇살이 고였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85:13).” 말씀을 읽다 기억을 한 것이다. 햇살 고운 글방은 참 좋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118:6).” 말씀으로 있을 때는 마음이 좋다.

 

필리핀 동생과 오랜만에 통화를 길게 하였다. 서로를 염려하는 마음은 같고 주를 바라는 마음 또한 닮았다. 같은 것을 붙들고 바라고 의지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힘이 된다. 그곳 사정을 현지에 있는 동생을 통해 들으니 안심할 수 있었다. 하긴 불안이란 마음의 농간이라, 잘 알면서도 번번이 당하는 일이다. 그럴 때 말씀이 주는 위로는 크다. 가정예배로 드리며 읽은 히브리서 마지막 장의 말씀도 이를 인용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13:6).” 그러니 됐다. 사람은 전염병보다 강하다. 그러할 때 성경은 본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7).” 앞선 믿음의 사람들도 그들의 형편과 모양 가운데서 주를 바라였다. 해를 등지고 걸을 때와 마주하고 걸을 때의 거리는 다른 것처럼,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118:8-9).”

 

간간히 아이는 직장 생활이 어떤지 사진과 함께 알려왔고 나는 친구가 되어 저의 카톡에 일일이 답을 하였다. 어려움이 오면 여러 모색을 강구하게 되는데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1:21).” 우리는 곧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 어제 문득 길을 걷다가 주께 향하는 자의 길과 이를 등지고 그림자를 밟고 걷는 걸음의 차이를 되새겼다. 근심과 염려가 없을 수는 없으나 이를 앞에 놓느냐 뒤에 놓느냐의 차이 같다. 세상을 등지고 걷는가 하나님을 등지고 걷는가의 차이다. 하나님은 감찰하시며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 말씀 붙들고 가자. 아이에게 자주 들려주는 말이기도가 되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1:38).” 하는 고백이 내 것이 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곧 오늘 잠언의 핵심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15:33).” 그러할 때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85:12-13).” 모든 성경의 말씀이 하나로 통한다. 무슨 은사 집회니 치유 집회니, 무슨 예배니 무슨 찬양이니 하는 따위의 부여는 자신들의 목적을 두고 인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일이다. 말씀 앞에 서는 일은 오히려 고립무원에 가깝다. 여기서 남과 사귀지 않는다는 것은 저에게 의지하고 도움을 구하지 않는 일이다. 어느 교회가 이목을 끌면서 참 놀라운 것은 그처럼 허구적인 진리에 사람들이 열광하고 그처럼 모여든다는 것이다. 희한한 일이다.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2:19).” 마음에 새긴다는 것은 심겨진 씨앗과 같아서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싹이 돋아 가지가 자라가는 일과 같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경우도 그러하고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경우도 그러하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삼상 2:2).” 오늘 잠언은 이를 일깨운다. 곧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는 바울의 전언과도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아내는 종종 내가 모자를 쓰고 있지 않으면 너무 할아버지 같다며 놀란다. 나 자신도 가끔은 거울에 비치는 모습이 낯설다. 겉사람은 늙는다. 그러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 이는 사람 중에도 믿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17-18).” 결국 오늘의 어려움이나 여러 근심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게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다 끝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살면서 오는 어려움을 크게 셋으로 정리하면 나이 들면서 오는 어려움과 환난곧 환경 때문에 오는 어려움과 우리가 주목하는 것곧 우리의 욕구 때문에 오는 어려움이 있다. 이를 해결해주겠다며 치유 은사니 무슨 사역이니 하는 따위로 우리가 받은 은혜를 제한하고, 이것으로 사람들은 몰려서 현실적인 문제에만 급급한데 신기하게도 그런 곳에 사람들이 몰린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가짜 정보도 서슴지 않고 행한다. 분무기로 소금물을 입에 뿌린 것에 세간의 조롱거리가 되면서, 원래 그런 집회니 사역이니 하며 열을 올렸던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나는 저 교회 일로 마음이 여간 무거운 게 아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나온 신학교와 그 교단의 교회로 또한 같은 연합회에 있는 교회인 것 같아서도 말이다. 이제 예순 살이면 한참 그 목회가 무르익고 주 안에서 아름답게 마무리 되어 가는 나이인데. 겉사람이 낡아진다고 해서 속사람이 저절로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늙는다고 노인의 지혜가 저절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그 고집과 아집은 오히려 더 가관이라.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다. 듣는 귀보다 말하고 싶은 혀의 가벼움이 문제겠다. 오늘 잠언의 말씀도 또는 앞서 야고보의 훈계도 같은 맥락으로 이어진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1:26).”

 

나야말로 말조심하자. 함부로 말하지 말자.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15:1).” 그러므로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2).” 나는 그래서 내가 두렵다. 부디 하나님께서 나에게 온순한 혀를 허락하시기를. 늙으면 늙을수록 온순한 혀는 곧 생명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4).” 마침 누가 친정엄마와 대판 싸웠던 일로 몇 주째 말을 않고 지낸다고 하였다. 원래 그런 말투라는 걸 알면서도저는 그간의 일을 말하다 서러워서 울먹거렸다. 먼저 연락 드려, 하고 말해주는데 마음이 아팠다. 그러게, 늙어도 혀는 그 힘을 다하는 모양이다. , 하고 일어날 때 혀가 가장 앞서는 것이라. 혀는 쉬지 않고 악을 쏟아낸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3:8).” 그러니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늙어도 혀는 그 힘을 더하는 것이었으니,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9-10).”

 

그러할 때 묵상이 곧 살 길이다. 말씀만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그러니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15:23).” 오늘 나를 붙들어 앉혀 들려주시는 말씀으로 귀하다. 이는 곧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에 있는 스올을 떠나게 되느니라(24).” 내가 향하여 가는 생명의 길이다. 그러므로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28).” 결국 그럼 그 입에 물려야 할 것은 재갈이 아니라, 기도다.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29).” 누구에 대해 무엇에 대해, 어떤 정책에 대해 또는 정권에 대해 누구처럼 사사건건 악담을 하지 않으려면 그 입에 기도를 물어야 한다. 별 수 없다.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에 있느니라(31).” 부디 주께서 나로 하여금 그의 은혜를 누리게 하시기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33).”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85:12-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