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
잠언 17:27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시편 87:1
자꾸 입을 다물게 된다. 뭐라 하면 ‘괜찮다’ 하며 나의 말을 병적으로나 여긴다. 하지만 어떤 문제도 괜찮은 것은 없다. 노아의 때에도 그랬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에도 그랬다. 가벼이 여겨,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8-39).” 나는 이와 같은 말씀이 두렵다. 그러할 때 오늘 시편의 말씀이 동시에 위로가 된다. 나의 터전은 성산에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2).” 우리가 어찌 살아왔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앞에 어느 문이 놓였는가 하는 문제다. 뭐라 한들, 나는 ‘아픈 사람’이니까 하고 치부해버리는 일에 대하여 더는 말할 게 없다. 그러므로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잠 17:27).” 차라리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28).”
그러니 우리의 미련함은 또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어느 나라 무슨 도시에서는 젊은이들이 해변을 가득 메웠다.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인생 뭐 있어?’ 하면서 논다. 그러던 국가에서 비로소 거리를 봉쇄하고 하루에 수백 명씩 죽어나간다. 결국은 노아의 때 같이 당해봐야 안다. 그러니 “미련한 자는 무지하거늘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 함은 어찜인고!” 지혜자는 한탄하는 것이다(16). 이는 도리어 얼마나 해로운 것인가 하면,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12).” 당장 코앞에 경고가 떴는데도 괜찮아! 하는 딸애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단순히 나 혼자만의 ‘괜찮아’가 아니다. 그것으로 오늘의 교회가 사회에 근심이 되었다. 거꾸로 교회가 사회를 근심하고 기도해도 모자랄 일인데, 저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에 나는 모멸감을 느낀다. 불쾌하고 속상하다. 한심하고 처량한 것이다. 그만치 우리의 미련함은 몸에 그린 문신처럼 지워지지가 않는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 수 있는 자리는 고통 중에서다. 그 풍성하신 은혜의 때에는 다들 안이하여 ‘괜찮아, 괜찮아’ 하며 미련하여서 외면하였다. 그러다 재앙이 오고 그 말에 책임이 따르듯 기어이 문제가 발생하고서야 깨닫는 것이 주의 선하심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오늘의 이 비극적인 현실이 우리로 더욱 주를 바라게 한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시 33:8).” 그럴 때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34:8).” 두려움과 경외는 같이 가는 것이다. 안이할 때는 경외도 없다. 설마, 하고 여기는데 경각심을 가질 리 없고, ‘괜찮아’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길 때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마음은 희박하다. ‘하나님의 본심’을 가지고 지난 주간 설교 원고를 작성하며 묵상할 수 있어서 내게는 유익이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그 마음이 경각심이다.
두려워할 줄 아는 게 복이다. 노아에게 그 마음이 없었다면 그 긴 세월을 방주를 지으며 평생을 보냈을 수 있었을까? 앞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은 무드셀라를 낳고 저의 죽음 끝에 심판이 있을 것이란 경고를 두려워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시는 두려움은 괜한 게 아니다. 병적으로 치부하고 말라고 두신 것도 아니다. 예레미야가 슬픈 노래, 애가(哀歌)를 지어 들려주고 싶었던 복음은 그것이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예레미야애가 3:25-33)
저의 노래를 한 구절 한 구절 음미하는 일은 귀하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어떤 자가 그러할까? 에녹처럼 또는 노아처럼 저의 남은 평생을 기다릴 줄 아는 것은 주를 경외함의 증표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그런 자의 특징은 두 가지다. 잠잠하다는 것과 기다린다는 것이다. 나는 가끔 노아가 일생을 그것도 산 위에다 방주를 지을 때를 묵상하면 숨이 막힌다. 우리의 상식을 모두 뒤엎는 일이었다. 해변에서도 아니었다. 어느 누구 호응하는 사람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다만 그의 가족들뿐! 다른 이들은 장가들고 시집가느라, 먹고 마시고 농담으로나 여기며 조롱하였을 저의 생애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병적이라 여김을 받았을까? 영락없이 미친 노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나는 누구에게 종종 말하길 더는 기력이 없을 때가 오나니 곧 멀지 않았다. 저는 앞으로도 2, 30년은 거뜬히 돈을 벌고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한다. 나는 저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지금 있는 것으로 족하니 늙는 연습을 하시라, 혼자 있을 때를 대비하시라, 아무리 당부해도 소용없다. 좀이 쑤셔서 단 하루도 조용할 수가 없다. 부디 잠잠할 것은 주께서 이를 메우셨음이라. 우리의 늙음과 병듦과 혼자 짊어져야 할 외로움에 대하여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차라리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계속 떠들어대고 쉴 새 없이 입을 열수록 감사보다는 염려가 찬송보다는 원망이 묵상보다는 안달이 우리를 못살 게 하는 것이었으니, 제발 좀 그 입 좀 다물어라. 입을 땅의 티끌에 대라! 차라리 그게 더 소망이 있다. 그런 소리로 들린다. 또한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뭐 그리 억울하고 분할까?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살아왔는데… 하는 따위의 자기 노력이 그처럼 아깝고 서러워서도 남은 생은 좀 누려야 하겠나? 이 땅에서 보상을 기어이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가? 그러니 그 억울함을 어쩔 것인가? 차라리 뺨을 돌려대고 그와 같은 치욕으로 배불리라! 그래, 어디 한번 맘대로 해봐라! 하는 심정으로, 오늘은 또 어디가 아프고, 무슨 일이 생각처럼 안 풀리고, 하는 일마다 꼬이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해도…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우리는 이 대목에서 주를 바랄 수 있는 게 아닌가? 결단코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신다.
그리고 이어지는 노래,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오히려 오늘 우리로 근심하게 하심은 오늘 우리들로 하여금 주의 긍휼하심을 깨달아 알게 하시는 일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아! 이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스럽고 복된 말씀이신지! 나는 그리하여 한 주간 내내 혼자 있으면서는 설교원고를 다듬고 또 다시 출력하여 읽으면서 여러 번 묵상할 수 있어서 감사하였다. 오늘 잠언의 말씀이 이를 한 마디로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17:3).” 그 하나님은 결국 우리의 마음을 준비시키시는 것이다. 성경의 저자들은 하나 같이 이를 알고 있었다. “우리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주의 백성의 심중에 영원히 두어 생각하게 하시고 그 마음을 준비하여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오며(대상 29:18).” 그래서 설교원고의 본문은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시 10:17-18).” 이것이 곧 하나님의 본심이시다.
곧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시 87:1-2).” 그리하여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115: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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