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전봉석 2020. 4. 1. 07:01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언 28:13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시편 98:9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우리의 극적인 차이는 궁극적으로 주를 바라고 찾고 의지한다는 것이다. 끝내 그리 만드셔야 하는 사람들이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18:1).” 다윗의 영성에 대하여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 저도 어려운 처지에 놓이자 다른 선택을 할 때도 있었다.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삼상 27:1).” 저는 사울의 시기심에 쫓겨 도망치다 그의 마음에 생각하였다. ‘내가 이러다 사울에게 잡히겠으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게 좋겠다.’ 어려움의 궁지에 몰리면 사람은 너나없이 살 궁리를 하게 되는데 저 또한 다를 게 없었다. 다른 것을 쥐면 쥐고 있던 것을 버리게 되어 있다. 빈손은 없다. 이제 반평생을 살아보니 사는 게 그런 것 같다.

 

블레셋 땅이 어떤 곳인가? 어찌 그런 곳으로 숨어들 생각을 했을까? 무신론자들의 사고가 저의 하나님 중심의 사고를 놓아버리게 했다. 저가 배우고 쥐고 붙들었던 신앙은 무색하게 되었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지 말고 오직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삼상 12:20).” 그의 신앙은 자신의 생각으로 지배를 당하는 무신론적인 게 되었다. 그러자 비도덕적인 사고방식이 신앙적인 사고방식을 놓아버리게 하였다. 블레셋 사람들은 어떤 자들인가? 항상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고 이방신을 섬기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거스르는 자들이었다. 결국 신앙을 저버리면 세상과 동화되게 되어 있다. 그러자 저의 생활을 이중적인 삶으로 바뀌었다. 저의 행각을 살펴보면 말과 행동이 달랐다. 앞에서는 이 말하고 뒤에서는 달리 행동하는 자가 되었다.

 

누가 표현하길 신앙생활은 마치 바다에 빠진 것과 같다고 했다. 수영하기를 멈추면 빠져들게 되어있다. 우리가 향해 가는 나라는 평탄하게 가는 길이 아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13:24).” 누구도 달가워서 가는 길은 아닌 것이다. 믿는다고 하지만 남들처럼 세상 것 즐기며 마음대로 내 생각이 주도하는 대로 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심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담대해야 하는데 그게 어디 마음 같은가? 그러니 결탁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그러다 무신론적인 삶에 동화되고 비도덕인 삶에 결탁하며 이중적인 생활도 마다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은 결코 그냥 두실 수 없다. 저들을 돌이키기 위해 모든 것을 빼앗으신다.

 

폴 투르니에는 아내를 잃고 말했다. ‘그토록 끔찜이도 사랑하던 이를 잃고서야 더 큰 사랑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그렇듯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는 데는 돌이켜 주만 바라게 하심으로 예비하시는 천국을 더하신다. C. S. 루이스의 표현처럼 가혹하신 자비. 저도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서 그런 고백을 하였다. 곧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마주할 수 없다. 사람의 특성이란 게 참 묘하다. 누구는 이내 정신과에 들러 진단을 받고 안정제를 받았다. 내과에서는 고혈압이 원인일 수 있는데 이는 기형적인 몸의 구조 때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서러운 마음에 한강변에 나가 앉아 통화를 하였다. 내 말이 무슨 위로가 되겠나만 나 역시 불안이 가중되어 병원엘 들렀다. 그저 약을 더 먹으라는 처방밖에는 달리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한 줌 마음밖에 안 되는 데 무엇을 놓아버리느냐에 따라 무엇을 쥐는가가 달라진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럴 때마다 주를 바란다. 겸손은 먼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13:5).” 또한 겸손은 예수님이 세상에서 당하신 삶보다 더 나은 삶을 바라지 않는다.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10:25).” 그러므로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1:21).” 또한 겸손은 진리를 추구하고 그것만을 주장한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6-7).”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겸손은 모든 게 은혜인 것을 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그러므로 겸손은 손에 쥔 것을 버려두고 말씀을 쥔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1:21).” 그래서 겸손은 실수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수용한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고후 5:11).” 마지막으로 겸손은 우리 삶의 모든 가치가 주께 있음을 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4:13-16).” 곧 오늘의 일련의 사태는 우리 믿는 자들로 겸손히 주만 바라게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주께 아뢴다. 오늘 잠언의 말씀을 그리 읽는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28:13).” 나는 누구의 고백을 들으며 그것으로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 하는 저의 근심과 불안을 사랑한다. 저의 그것으로 거울삼아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주께 송구하고 죄송하고 부끄러워 주의 긍휼하심을 바랄 수 있는 것이 은혜인 것을.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98:9).” 두려워 떨며 주를 바라고 의지하여 바른 길을 가는 척박한 삶이 오히려 감사하다. 흥청망청 자기만족에 겨워 블레셋 생활에 결탁하여 사는 것보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오늘 지혜자는 일갈한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28:26).” 괜찮다, 이 정도는 어떠냐? 하는 자기합리가 기껏 우리가 붙들고 살던 것을 놓아버리게 한다. 그러므로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14).”

 

, 다시 마음을 다잡고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98: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