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시편 126:2
거룩한 그루터기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곧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시 126:2).” 이를 삶 가운데서 보고 느끼는 일이란 마치 포로에서 풀려나 돌아올 때의 기쁨과도 같다. 즉 구원의 기쁨이다. 그 목적은 평안이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116:7).” 또한 주를 사모함이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73:25).”
그러므로 찬양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63:3).” 그리고 즐거움이다.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호 14:3).” 결국은 그 거룩하신 그루터기가 건축자의 버린 돌로서 영원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행 4:11).” 우리에게는 오직 예수다. 진리는 예수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이처럼 말씀을 이어 이어서 따라가는 일은 즐겁다. 결국은 예수다. 모든 물줄기의 끝은 바다인 것처럼 우리들 하나하나 모두의 이야기는 예수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우리 안에는 여전한 불안과 두려움과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있다. 아침 일찍 교회로 나가서 뜬금없이 정리정돈을 하던 것이 아이의 공부방을 만들었다. 여름을 대비하며 에어컨 앞으로 자리들을 모았다. 한참 일을 더하다, 우리 안에는 풀 수 없는 자책이나 미안함이나 공교로운 부담감이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종종 우리 자식들에게 해준 게 없어서… 하는 자기연민에 빠지시곤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들만 생각하면 어디 한 구석 휑한 미안함이 작은 돌풍처럼 불었다 사라진다. 뭔가 해줘야 할 것 같고,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옥죄고 드는 일이다. 본인들은 그런 거 없다고 하지만 더욱이 부모의 마음에는 싫든 좋든 일어나는 만성적인 증상과 같다. 그렇게 혼자 옮기고 정리하면서 한나절이 다 지났다. 그러다 문득 말씀 앞에서 송구한 것이다. 부모의 사랑을 갚을 길 없다 여겨질 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이를 무엇으로 갚을 수 있겠나?
곧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8).” 내가 뭘 좀 잘해서가 아니다. 어떤 성과를 내고 기대 이상의 결과를 가져와서 그러는 게 아니다. 이를 이어가며 바울은 역설한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9-10).”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한 자로 살아야 한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이 화목은 보상에 따른 게 아니었다. 나의 어떤 수고로 얻어진 게 아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이제 그 어떤 일보다 귀하고 우선이며 남은 전부보다 더하는 것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내는 일이다. 이를 훼방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우선하여 추구할 수 없다. 그 값은 엄청났던 것으로써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6-18).” 분명한 이유가 목적이 있는, 그 대가는 엄청난 값이었다. 십자가의 보혈이 있었고, 우리로 가까이 있어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하심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이 모든 게 주께서 친히 하신 일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곧 예수는 우리의 임마누엘이시라.
하루하루가 요즘은 예민할 따름이어서 조그만 파동에도 온 몸이 힘에 부쳐한다. 그것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더욱 여실히 느낄 수 있다는 역설 앞에 나는 감사하다. 평소보다 깊은 불안이 그래서 안정제를 의존하는 일이 잦고 금세 특이 동향으로 몸의 반응이 힘겨울 때도 있지만,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0-11).” 내가 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이었으니, 내 안에 들끓는 여러 생각들이 나를 흔들어대기 일쑤여도 나는 그것으로 더욱 주를 바란다. 종종 드는 생각이 그럴 때면 ‘나는 가만있으면 모두 다 주가 알아서 행해주시는데 왜 이처럼 조바심을 내고 안달복달 속을 끓이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렇지도 않았으면 좋겠는데, 조금은 더 의연하였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보란 듯이 좀 잘해내고 싶은데, 행여 그것으로 내가 교만하여져 주를 앞설까봐, 그럴 게 불을 보듯 빤한 일이어서… 종종 오늘의 이와 같은 처지와 상황과 나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주가 더하시는 것이라. 다 그 뜻에 맞게 가장 선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심이겠으니!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시 126:1).” 나에게도 이러한 기쁨이 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해방의 즐거움이 있다. 그렇게 친구를 찾고 세상을 갈구하며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중받는 삶이 되고자 했던 일들에 대하여!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2).” 더는 지나간 일을 두고 사무쳐 그리움에 허덕이지 않는다. 연연하여 끌려 다니지도 않는다. 그런 걸 보면 지금이 가장 평화다. 기쁨이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3).”
말씀으로만 살자. 그리하게 하신다. 오늘 내게 두신 모든 나의 나 된 것이 주의 은혜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그러므로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하나,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곧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이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시 116:12).” 감사다. 감사뿐이다. 때로는 힘들고 어렵다고 하지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126:5).” 오늘 시편은 이를 찬양하였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6).” 아멘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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