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17편 / 나의 기도

전봉석 2020. 5. 22. 09:42

20200524 주일

시편 17

나의 기도

 

 

들어가는 말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기도는 정해진 시간에 규격화된 형식으로 종교적인 의식을 가지고 하는 것만이 아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이를 경계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6:6).” 타종교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소원을 빈다. 한데 이는 외식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 으스대며 거룩한 척, 뭔가 대가를 바라고 하는 의도적인 기도는 자기의 유익을 구한다. 안 믿는 자들도 그런 점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그런 저들의 기도는 이미 그 상을 받았다. 자기만족에 겨운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어서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 ‘은밀한 중이란 여러 의미를 내포한다. 사랑하는 연인들의 내밀한 교제의 장소이면서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저마다의 장소이다. 때론 슬픔과 고통의 장소이고, 외로움과 실의와 낙심의 골방이기도 하다. 아니면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무덤덤하게 되풀이 되는 한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7).” 쓸데없는 소리할 필요 없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8).” 아니 왜? 다 아신다면서 굳이 기도하는 것일까? 오늘 시편에서 기도라는 시어를 중심으로 말씀을 풀어보자.

 

1. 골방 기도(1-3)

 

1) 의의 호소: 은밀한 중의 기도

우리의 기도는 은밀한 중에 들으시는 하나님께 하는 것으로, 실은 내가 말하는 게 아니라 주의 말씀을 듣는 일이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6:6-7).”

 

2) : 주의 눈으로 공평함

우리가 바라고 구하는 게 있으나 대부분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 나는 떡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돌을 주실 때가 있다. 생선을 달라하였는데 뱀을 주시는 것 같을 때도 있다. 의의 기준이 다른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항상 의로우시다는 것.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은 박수할지어다 산악이 함께 즐겁게 노래할지어다.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98:8-9).”

 

3) , 영적으로 어둡고 힘든 상태: 시험의 때

인생에서는 자주 원치 않는 밤이 찾아온다. 이는 시험의 때다.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시간이다. 누구는 어떻대? 어느 교회의 유명한 어느 목사도 저러는데? 하는 식으로, 우리는 자주 자신을 변호하며 그 생각을 굽히지 않으려 든다. 영혼의 밤이다. 밤은 어둡고, 어둠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그럴 때 입을 조심하는 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5:2).” 그러할 때 우리가 딛고 보면 내 발이 평탄하였다.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26:12).”

 

2. 행사: 일상(4-5)

 

4) 사람의 행사: 포악한 자의 길

우린 모두 어떤 일에 목적을 갖고 추진한다. 그런데 솔직히 이 땅에서의 성공은 정직하고 순진해서는 어렵다. 타협과 적당한 허용이 필요하다. 도의적인 책임이란 허울 좋은 변명일 뿐, 우리는 자체로 악하다. 심지어 포악을 행하는데,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5:18).” 한두 번 그러다마는 것이 아니다. 상습적이고 고의적이다. 성경은 일갈한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119:9).” 우리의 온전한 행사는 말씀을 지킬 때에야 가능하다.

 

5) 나의 길: 주의 길을 지킴

우리 성도의 길은 다르다. 세상과 같을 수 없다. 세상을 살면서 세상과 달라야 한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그러나 배가 바다에 있으나 떠있어야 하는 것처럼, 잠수함이 물속을 다니지만 물이 스며들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성도의 삶이란 엄연히 세상과 구분된다. “또 주께서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를 실족하지 않게 하셨나이다(18:35-36).”

 

3. 응답(6-10)

 

6) 내가 불렀사오니: 주의 성산에서의 응답

우리의 기도는 내가 주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7:7-8).” 주의 응답은 주의 성산에서의 응답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3:4).”

 

7) 주의 기이한 사랑: 주께 피하는 자를 사랑하심

사랑은 기이하다. ‘어찌 저 둘이 잘 지내나싶지만 아무도 모르는 기이함이 저들 사이에는 흐르는 것이고, 사랑하는 사이만이 서로가 골방에 들기를 원한다.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하는 시간을, 글쓰기, 게임, 영화 등기도란 이처럼 내밀하다. 이를 대신 부탁하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75:1).”

 

8-9) 자유함: 주의 눈동자 같이 지키심 벗어남

우리의 자유는 무질서나 무절제에서는 어렵다. 교통이 원활한 것은 교통질서가 잘 지켜지기 때문이고, 생활 가운데 자유로운 동선은 질서정연한 정리정돈이 잘 되었기 때문이고, 돈의 사용이 유용한 것은 규모 있는 씀씀이가 있다. 곧 우리의 자유는 무턱대고 놓아두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주의 눈동자 같은 지키심과 주의 날개 그늘 같은 안전함가운데에서이다.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32:6).” 이와 같은 말씀을 알아듣는 자들이 우리와 같은 성도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기원한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2:12).” 아무리 악한 세상이라 해도 우리는 저들의 압제와 노림수에서 놓여난다.

 

10) 그들의 마음: 교만

한 마디로 저들의 마음은 교만하다. 교만은 내가 다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다. 세상은 굳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주의 도우심을 구속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를 박탈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런 저들처럼 굴지 말라 한다. 그러므로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삼상 2:3).”

 

4. 적의(11-12)

 

11) 우리가 걸어가는 것을: 에워싸서 넘어뜨리려

적의란 적대적으로 대하는 마음, 해치려는 마음이다.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하는 길이다. 돈이 있으니까, 건강하니까, 든든한 친구나 인맥이 있으니까, 학벌로, 자신의 직업으로. 저마다 의지하는 게 있다. 그런 세상은 우리 믿는 자들을 넘어뜨리려 한다. “그들은 악을 행하지 못하면 자지 못하며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아니하며(4:16).” 그러나 너는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는 나를 도우셨도다(118:13).”

 

12) 자신들이 움킨 것을: 찢으려

뿐만 아니라,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심보다. 하지만 여호와여 일어나 그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17:13).” 오늘 우리에게는 주의 날개 그늘 아래 보호하심이 있다.

 

5. 주는 나의 도움이시다(13-15)

 

13-14) 주의 칼: 구원

이는 구원의 칼이라. 우리도 다를 바 없이 살았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2:3).” 그러나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22:20).” 우리는 주의 도우심 안에 산다. 공기가 없으면 죽고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생명체인 것처럼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생존할 수 없다. 그래서 오늘을 힘 있게 산다.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90:17).”

 

15) 깰 때에: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이 땅에 권세 잡은 자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죽음이다. 곧 죄의 삯은 사망이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사탄이 우리에게 끼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죽음이다. 사람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한다. 신앙과 상관없이 두려운 일이다. 세상은 그래서 각박하다.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29:2).” 소돔과 고모라 때와 같이 의인의 수가 점점 적어진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벧전 3:20).” 어쩌면 교회가 부흥하고 사람들이 늘어나는 경우는 기형적이다.

 

나오는 말

 

세상에서 우리의 끝은 죽음이 아니다. 그 너머의 삶이다. 오늘 본문 15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의 소식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우리가 의로울 때는 언젠가? 거듭나야 한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3:7).” 그러므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 곧 거듭난 자만이 주의 얼굴을 뵌다. 그리하여 주의 형상으로 만족한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주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거듭난 영이 함께 하시는 증거이다.

 

우리는 주께 속한 자들이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6:3).” 그러므로 우리는 아주 당당하게 또는 내밀하게 기도할 수 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119:49-50).” 성경은 그러한 우리를 불러 세우신다. 그리고 성경의 원리는 극명하다. “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25:5).” 한데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오늘도 말씀이 우리를 주도하신다. “내가 지혜로운 길을 네게 가르쳤으며 정직한 길로 너를 인도하였은즉 다닐 때에 네 걸음이 곤고하지 아니하겠고 달려갈 때에 실족하지 아니하리라(4:11-12).”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란,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147: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