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03 주일
시편 15편
주의 장막에 머무는 자
15: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15: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15:3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15: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15:5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들어가는 말
누구도 자기 힘으로 주의 성산에 살 수 없다.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없다. 거기는 좀도 없고 도둑도 없다. 주님은 이르셨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 12:33).” 곧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리 말씀하시면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소망은 믿음의 확신이다.
성경은 이를 이끌어,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우리로 감사를 살게 하신다. 한데 왜 그렇지 못하는 것일까?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이에 우리에게 나타나는 특징은 열여섯 가지다. ①자기를 사랑한다. ②돈을 사랑하고 자랑한다. ③돈으로 교만하여진다. ④돈을 따라 서로를 비방하고 부모를 거역한다. ⑤거룩하지 않다. ⑥무정하다. ⑦원통함을 풀지 않는다. ⑧그 안에 늘 억울함이 있어서 분풀이로 누군가를 모함한다. ⑨절제하지 못한다. ⑩억제하지 못하고 점점 더 사나워진다. ⑪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⑫언제든 배신한다. ⑬조급하다. ⑭자신을 신뢰하고 자만한다. ⑮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다. 결국 ⑯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 성경은 그러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딤후 3:1-5).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본문 이해
오늘 시편의 말씀은 상대적으로 그런 우리는 ‘주의 장막에 머무는 자’이고, ‘주의 성산에서 사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를 역설적으로 되묻는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1).” 그럼 그러한 자들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 열한 가지로 정리가 되었다.
①정직하게 행한다. ②공의를 실천한다. ③마음에 진실을 말한다. ④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않는다. ⑤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 ⑥이웃을 비방하지 않는다. ⑦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한다. ⑧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한다. ⑨마음에 서원한 것은 행여 해로울지라도 번복하지 않는다. ⑩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않는다. ⑪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만일에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게 될 것이다.’ 현세에서 뿐 아니라 내세에서까지, 영원히 말이다. 이를 우리는 두려워할 줄 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 12:29).”
어거스틴의 표현처럼 ‘그리스도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할렐루야다!’ 감사할 것뿐이다. 우리가 여기까지 어찌 살아왔는가? 주의 은혜가 아니면 감당이 안 되는 세월이다. 믿는 자는 그리 여기고 안 믿는 자는 자신의 수고를 자부한다. 하지만 우리는,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9-10).” 이를 안다. 그렇게 붙들려 했던 세상에서 더는 희망을 찾지 않는다. 죽어라 하고 사는 일에 애태우며 살지 않는다. 구원의 기쁨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삶이다. 예수를 바라며 사는 것이 귀하다.
※ 우리로 주의 장막에서 머물지 못하게 하는, 가장 두드러지는 두 가지 특징
첫째, 게으름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 6:6).”
오죽하니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에게서 배우라고 하실까? 게으름이란 그 이하의 존재로 전락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곧 우리의 나태함은 영혼을 병들게 한다. 이 땅에서의 삶을 빈궁하게 하는 것도 물론 영생을 준비하지 못하게 한다. 하물며 개미도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8).”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우리가 장차 들어갈 죽음 너머의 영생을 아무런 준비도 없이 산다면 이게 말이 되겠나? 그러할 때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11).” 이는 그저 이 땅에서의 이야기로 그치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으로 열심을 다한다. 이는 신앙의 기본 전제다. 누군들 자발적으로 감사가 나올까? 인생이란 좋은 일보다 못한 일이 더 많다. 그런 가운데 성경은 엄연히 구분하시기를 ‘범사에’라 하신다. 이는 좋을 때나 나쁜 때나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 그와 같은 감사의 앞뒤로는 엄호하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기뻐하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여기서도 ‘항상’이란 전제가 붙었다. 그런 불가능할 것 같은 ‘항상’ 뒤에서 둘째, 기도하라는 엄호가 있는 것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17).” 이는 따로 시간을 두어 어느 장소에서 어떤 무리와 함께 뿐 아니라, 걸을 때도 앉을 때도, 누워서도 무슨 일을 하면서도의 ‘항상’, ‘범사에’와 같은 맥락을 지니는 ‘쉬지 말고’가 붙었다. 기도는 쉴 수 있는 게 아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쉬지 않고’ 기도하기 때문이고, ‘쉬지 않고’ 기도함으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며,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결코 게으를 수가 없는 것이다.
둘째, 들포도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사 5:2).”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 삶에 관여하신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사 5:1).” 그런데 어째서 이처럼 먹을 수도 없는 ‘들포도’를 맺는 것일까? 이사야 선지자는 이어서 여섯 가지의 이유를 설명하였다.
첫째, 지나친 욕심 때문이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8).”
둘째, 자기만족 때문이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11-12).”
셋째, 거짓을 꾸민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18).” 이는 단순하게 어떤 상황을 모면하려는 우발적인 경우가 아니다. 그 이상의 것을 악의적으로 꿰고 더 꿰어 수레를 끌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게 꾸미는 거짓이다.
넷째, 악에 악을 보태어 악의적인 삶을 산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0).”
다섯째, 자신을 믿는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1).”
여섯째, 스스로를 자부한다.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2).”
괜찮다! 다들 그러고 산다! 하면서 더욱 자신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뚜렷하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그들 위에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 산들은 진동하며 그들의 시체는 거리 가운데에 분토 같이 되었도다. 그럴지라도 그의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의 손이 여전히 펼쳐져 있느니라(25).”
근본적인 질문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1).”
우리는 늘 송구스럽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 스스로를 정직하게 행한다고 자부하지 못한다. 공의를 실천하지 못한다. 마음에는 진실보다 거짓이 빠르다. 남을 허물하고, 이웃에게 악을 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무슨 일을 싸잡아 이웃을 비방한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면 저들의 망령된 행실도 좋다고 여긴다. 그러면서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고리타분하게 여긴다. 마음에 서원한 것을 바꾼다. 돈놀이 할 수 있는 노후를 부러워한다. 뇌물과 선물을 구분하지 않고, 이익을 위해 무죄한 자를 멸시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이야기가 우리 자신인 것을 괴로워한다! 그래야 한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역설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우리가 어찌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바라보자. 주를 따르자. 내 의지로 이룩되는 구원은 없다. 구원의 기쁨을 가지고 살자. 말씀을 먹고 살자.
나오는 말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계 10:9).”
입에는 달고 배에는 쓰다. 말씀을 삼킬 때는 난감하다. 곧 삶으로 살아서 말씀으로 사는 일이란 그리 노록하지가 않다. 그럼에도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곧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시 112:9).” 삶으로 살아서 살아내는 말씀은 쓰다. 귀로 듣고 입으로 읊조릴 때는 ‘옳은 말’이고 좋은 말씀으로 밑줄 긋고 되새길만하지만 이를 살려고 하면 쓰다. 왜 그럴까?
①육신과 영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 ②주가 내 안에 계심으로 내 몸이 다툰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 ③부활을 살려니까 죽어야 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11).” ④악은 죽고 의로 살기 때문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3-14).” ⑤하나님과 친밀해진다는 증거이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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