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0 주일
시편 16편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16:1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16: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16: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16:4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16:5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16: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16:7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16:9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6: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들어가는 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레미야는 엘리사와 그마랴를 통해 하나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편지로 보내어 읽어주도록 하였다. 이는 영적으로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는 서신이다. 이 땅에서 우리는 포로 된 자로 살며, 궁극적으로 오늘 다윗의 고백처럼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렘 29:5).” 즉 포로 생활로 비관하고 슬퍼하기보다 그곳을 개간하고 일구어 이를 받아들임으로 살라는 말씀이다. 이는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6).” 이때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는 말씀은 의미심장하다. 또한 그곳의 평안을 빌라 하신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7).”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이라 해도 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곧 우리의 평안을 위한 일이다. 하지만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듣고 믿지 말라(8).” 가만 보면 어느 시대에나 거짓 목사의 헛된 주장이 있었고, 잘못된 교회의 교리가 성경을 능가하였으며, 이를 추종하여 점쟁이들처럼 요설을 떠는 감언이설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단과 사이비가 항상 판을 쳤다. 말씀은 저들을 향해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9).”
‘우리는 이 땅을 개간하고 일구어 주신 바에 따라 열심을 다해 살아야 한다. 믿는 자의 수가 줄지 않도록 믿음의 가정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저들의 위해서도 평안을 빌고, 거짓 목사나 교회, 점쟁이들의 요사스러운 수작을 주의해야 한다. 저들은 다만 자기주장에 도취하여 지껄이며 주의 말씀을 혼탁하게 할 따름이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우리는 저마다 포로로 산다. 누구는 질병에 매여 살고, 장애를 가지고 살고, 가난에 허덕이며 살고, 배신과 불신에 치를 떨며 살고,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그 행위에 도취하여 살고, 분쟁과 전쟁을 일삼으며 살고, 가정은 가족 간의 반목으로, 나라마다 진영논리의 다툼으로 서로를 비난하며 포로 되어 산다. 물질과 쾌락과 허영과 허망함에 포로 되어, 누구는 평생을 일구어온 자신의 명예와 명분의 자부심에 포로 되어, 또는 저마다 자식에게 포로 되어 산다. 고결하면서도 비루하게 우리는 저마다 밥벌이의 포로가 되어, 여기서 그곳의 통치를 받으며 포로 된 자로 산다.
그런 가운데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10).”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다. 소망은 절망을 능가한다. 일정기간이 차면, 주어진 몫의 70년이 차면 우리는 돌아갈 것이다. 하나님의 ‘이 곳으로’ 인도함을 받을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11).” 즉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에 대한 재앙이 아니다. 미래와 희망이다. 영생의 삶이다. 가망이 없는 것 같은 이 땅에서 우리가 소망을 잃지 않는 이유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12-13).” 곧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4).”
자, 이제 우리 앞에는 두 장의 선택지가 놓였다. 그럼에도 포로 된 삶에 안주하다 생을 마감할 것인가? 소망을 붙들고 ‘미래와 희망’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소망은 도전하게 하고 절망은 냉소적으로 안주하게 한다. 소망은 절망보다 어렵다. 우리의 소망을 붙드는 것이 신앙이다.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본문 이해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1).” 포로 된 자의 삶에서 우리 믿는 자들의 공통된 선택지는 하나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2).” 이와 같은 고백이 실제의 삶에서 드려진다. 엄연히 포로 된 이 땅에 살면서도,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3).” 곧 우리의 정체성은 분명하다. 안 믿는 저들과 엄연히 다르다. 즉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4).”
오늘 우리의 분깃은 주가 두신 현실이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5).” 이를 족한 줄 알고 만족스럽게 여기며 감사할 줄 아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허황된 추구나 막연한 신앙이 아니다. 오늘과 연관 있는 실제의 삶이 우리의 구역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6).”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함으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7).” 세상은 괜찮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 안에서 호소하는 양심의 교훈을 듣는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8).” 하는 것은 실제의 삶에서 경험한다. 우리는 주 앞에서 산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9-10).” 이 땅에 살면서도 천국을 누릴 수도 있고, 지옥을 맛볼 수도 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11).” 이와 같은 실제의 체험이 우리의 것이다.
때로는 긴가민가하고, 이 길이 맞나 싶고, 어떤 일에 넌더리가나고, 누구 때문에 힘에 겨울 때도… 막연하고 애매해서 갈 바를 알지 못할 때에도…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하는 소망이 있다. 우리에게는 ‘미래와 희망’이 있다.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암울하기만 한 현실이 힘에 겨울 때도 있다. 포로 된 생활이란 게 아무리 기쁘고 즐겁다 해도 일시적일 뿐이지 영구적인 게 없다. 다시 엄습하는 두려움과 근심을 이겨낼 길이 없다. 예레미야 시대의 상황도 그래서, 우리는 오늘 저의 편지를 앞서 나누었던 것이다.
당시 히스기야가 죽고 므낫세가 55년을 통치하였다. 저는 역대에 가장 악한 왕이었다. 저의 통치로 백성은 예배를 잃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은 우상숭배와 혼용되었다. 므낫세는 마술을 부리던 제단에서 자신의 아들을 산 채로 바치기도 하였다. 저의 통치 10년을 남겼을 때쯤 예레미야가 태어났다. 예레미야의 유년시절이 어떠했을지 자명하다. 므낫세를 이어 아몬은 2년을 통치하다 살해당했다. 저의 어린 아들 요시야가 왕이 되면서 한 줄기 빛이 드는 것 같이 종교개혁이 단행되었다. 그때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부르셨다. 그러니 예레미야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렘 1:6).” 그의 심정은 가히 짐작이 간다. 그런 예레미야를 하나님은 직접 교육하셨다. 교육의 목표는 하나였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7).” 주의 뜻을 전하라는 것! 그 뚜렷한 실행을 위해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8).” 실제 훈련은 말씀이었다.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9).” 저에게 말씀을 먹이셨다.
하나님은 저에게 두 가지 환상을 보이셨다. 하나는 ‘살구나무’다. 다른 하나는 ‘끓는 솥’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11).” 살구나무는 당시 봄이 되면 가장 먼저 꽃을 피우고 파란 싹이 돋음으로 혹독한 겨울이 지나갔음을 알린다. 예레미야 목회 인생 40년 동안 저가 주춤거릴 때마다 살구나무는 그와 같은 상징을 내포한다. 이른 봄마다 저는 살구나무를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렸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12).” 그리고 ‘끓는 솥’은 심판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윗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부어지리라(13-14).” 악은 악이다. 교묘하게 섞어도 악이다. 악은 시대마다 끓어 넘친다. 에녹은 무드셀라를 낳고, 남은 생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창 5:21-22). 무드셀라는 심판의 예표다. 저가 죽는 날, 노아의 홍수가 시작되었다. 심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나오는 말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 16:2).” 이는 오늘 우리의 고백이다. 실제의 일상이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하는 공통의 주제다. 성경은 일깨우신다.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1:19).” 곧 이 땅에서의 삶은 바벨론의 포로 된 이스라엘의 70년의 삶과 같다. 돈이든 건강이든, 자식이든 사랑이든, 신념이든 명예든… 우리는 저마다 포로 되어 산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오늘 말씀이 우리 삶의 구심점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시 16:1).” 그리하여 우리는 날마다 주께 아뢰기를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 하는 기도와 찬송과 영광을 날마다 올려드리는 것이다.
우리 안의 소망은 세상의 그 어떤 절망보다 강하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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