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이사야 43:11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편 13:5
마음이 어렵고 생각이 많다. 의연하게 또는 무던하게,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도 될 것을 마음에 담게 된다. 생각이 자꾸 모여든다. 그러할 때 당연히 주도하려 드는 마음은 근심이다. 아들의 차가움이나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또는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나는 생각이 미침으로 주께 아뢴다. 가령 같이 점심을 먹을 때 좀 살갑게 굴어주면 좋겠는데 잔뜩 화가 난 사람처럼 표정이 굳었고 말수가 없어 곁에 있는 아이나 보는 나나 서로가 어렵다. 퉁명스런 말투와 괜한 시비조의 언사가 꼭 중딩 사춘기 아이 같다. 뭐라 말로 하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그러려니 하기에도 그렇고, 점심을 같이 먹지 말까? 아니면 아이를 당분간 오지 말라고 할까? 혼자 생각에 골몰해보지만 여의치가 않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근 식당과 커피숍에 코로나 확진자가 다녀가서 종일 더 마음이 뒤숭숭하고 염려가 주도하는 하루였다. 그러한데 오늘 아침의 말씀이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 43:11).”
아이의 묵상글을 읽었는데, 요즘 교회들의 확진자 수나 여러 모양새 때문인지 안 믿는 부모의 염려는 급기야 교회 가는 것을 두고 뭐라 하는 모양이었다. 쪽지라도 남길까, 전화라도 할까… 생각이 여러 갈래이다 그냥 두었다. 아들도 아이도 그렇고 다들 이제 성인이라, 나는 저 아이들이 모두 자신의 하나님을 의뢰하고 붙들 수 있기를 기도한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아니면 우리가 무슨 수로 이 땅을 살아갈까? 염려와 염려가 끊이지 않고 근심과 근심이 이어지기 마련인데,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6).” 하는 오늘 시인의 기도가 큰 힘을 더한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이가 앞으로도 또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을.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1).” 내가 주의 것이다. 나를 지명하여 부르셨다. 나를 구속하셨다.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아들이 먼저 들어가고, 아이는 돌아가고, 아내와 잠깐 산책을 하며 말하였다. 애가 중3에 멈춘 것 같다. 뚱하니 화난 아이 같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여러 날 속에 담고 있는 말을 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상처가 됐겠지. 왜 자기를 버렸냐고 하잖아! 농담이겠지만 왜 안 그랬겠어. 다른 부모들은 일 년에 몇 번씩 왔는데, 우리는 한 번도 안 가고. 나는 졸업식에라도 갔지 당신은 한 번도 가지 않았잖아. 아내의 이어지는 말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여름이 왔는지 세게 부는 바람이 후텁지근하였다. 저마다 그 마음에 상처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만. 나의 어쩔 수 없었음은 미안함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어서 새삼 사과를 할 수도 그렇다고 그냥 골난 아이 눈치나 살피듯 전전긍긍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데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주께서 치유하지 않으시면, 어느 집이나 두고 사는 쾌쾌 묵은 감정과 상처는 아물 수 없다. 언제 시간을 내어 속엣 이야기를 좀 나눌까? 그래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그러는 게 더 안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안정제를 삼키며 여러 생각에 짓눌리고 있었다.
도무지 하는 것도 없이 아버지로 살았다. 아들딸을 볼 때마다 미안하고 또 미안한 마음뿐이다. 하는 것도 없이 목사로 살아가고 있다. 아이의 묵상글을 읽고 어찌 해야 할지, 뭐라고 말 한 마디 거들어야 하지 않을까? 통화라도 좀 할까? 생각만 많다. 교회에 인근까지 확진자들이 쇄도 하고 있는 때에 아이를 매일 오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괜찮을까? 아, 나는 도대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야말로 말이 좋아 아빠고 목사고 선생으로 사는 것이지, 말 그대로 하는 게 너무 없고 해주는 것도 없이 짐만 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말씀 앞에 송구할 따름이다. 내 안에 이는 어떤 미안함, 또는 부채감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동시에 가진다. 그래서 더욱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기도 하지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그리하여 아들과 아이들, 내게 두시는 영혼들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도 송구하고 면구스러울 따름이어서.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좀팽이처럼 나는 더 기가 죽는다. 말씀에게만 묻는다. 일주일 내내 설교 준비를 한다. 누구를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다. 읽는 책이나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서 이처럼 지나간 하루의 일과는 묵상의 발판이 되어 ‘나의 하나님’ 앞에 붙들리게 한다. 아무리 하나님은 위대하고 영원 무궁히 긍휼하시다 해도 그것이 나의 일상에서 느껴지지 않고 그러므로 누릴 수 없는 품이라면 이보다 더 난처한 경우가 어디 있겠나? 오늘 이사야서는 온통 그러는 나에게 집중하게 하시는 것 같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2-3).” 말씀을 내 것이라 하시는 것 같다. 야곱도 아니고 이스라엘도 아니다. 믿음의 백성들도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을 위한 것도 아니다. 나,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는 나’를 향하신 것이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4-7).”
말씀으로 나는 욕심을 낸다. 아들이 무엇보다 소중하고 귀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너머의 일에서는 속수무책이라. 내 곁에 두시는 아이들의 이런저런 사연이 나를 흔들고 마음 쓰이게 하며, 나는 저들을 아무리 사랑해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그 너머의 일에 대해서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것이라.’ 그러므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말씀은 나 하나로 족한 것을 알게 하신다. 내 안에 이는 아들에 대한 연민도 아이에 대한 동정도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도 아이에 대한 미안함도 아이에 대한 서러움도, 모두! 그 모두 나였다. 나니까 내게 맡기시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아이들을 생각하고 공연히 마음 쓰이는 일에서 놓여나려하기보다 그것으로 주를 바란다. 이내 주께서 행하실 것이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전 3:14).”
가끔씩 나는 아버지를 생각한다. 도대체 나의 부모는 어떻게 우리 사남매를 키웠을까? 그 어렵고 고단하였을 목회현장에서 아니, 게 중에 나 같은 것을 장남으로 두고 어찌 잘도 견뎌내실 수 있었을까? 나는 요즘 자주 뭉클해진다. 지금 내 아들의 열배백배는 더 신경 쓰이게 하고, 못나게 굴고, 엉뚱한 길로 가는 것을 빤히 다 알고 계셨을 텐데… 가령 나는 한 번도 아버지께 담배 피우는 걸 걸린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모르고 계실 거라 여겼다. 그런데 훗날 목사가 되고 같은 길을 가며 은근 슬쩍 여쭈었을 때 ‘다 알고 있었다.’ 하시는 말씀에 목이 턱 메는 것 같았다. 어떻게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럼 그 ‘많은 생각’을 혼자 짊어지고 오셨다는 소린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사 43:8).” 어떻게 하신 것일까? 나는 요즘 내가 지레 죽겠다. 어제는 아내도 눈치를 챘는지 아무도 몰래 나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 지나가는 것이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10).”
오늘 말씀은 한 구절 한 구절마다 오래 나를 붙드신다.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11).” 그러니 누구에게 하소연하며 이런저런 속엣 얘길 하겠나?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16-17).” 주가 나를 돌보시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나는 주의 은덕을 갚을 길이 없다. 침울해하는 내게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18).” 말씀이 붙드신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세계라. 주가 이루시는 장래이다(19). 그러므로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25).” 말씀으로 붙드신다. “너는 나에게 기억이 나게 하라 우리가 함께 변론하자 너는 말하여 네가 의로움을 나타내라(26).” 나는 주 앞에 엎드려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시 13:2).” 아뢰면, 내 안을 가득 채우시는 것이었으니,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5).”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6).” 아멘.
이사야 43:11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편 13:5
마음이 어렵고 생각이 많다. 의연하게 또는 무던하게,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도 될 것을 마음에 담게 된다. 생각이 자꾸 모여든다. 그러할 때 당연히 주도하려 드는 마음은 근심이다. 아들의 차가움이나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또는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나는 생각이 미침으로 주께 아뢴다. 가령 같이 점심을 먹을 때 좀 살갑게 굴어주면 좋겠는데 잔뜩 화가 난 사람처럼 표정이 굳었고 말수가 없어 곁에 있는 아이나 보는 나나 서로가 어렵다. 퉁명스런 말투와 괜한 시비조의 언사가 꼭 중딩 사춘기 아이 같다. 뭐라 말로 하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그러려니 하기에도 그렇고, 점심을 같이 먹지 말까? 아니면 아이를 당분간 오지 말라고 할까? 혼자 생각에 골몰해보지만 여의치가 않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근 식당과 커피숍에 코로나 확진자가 다녀가서 종일 더 마음이 뒤숭숭하고 염려가 주도하는 하루였다. 그러한데 오늘 아침의 말씀이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 43:11).”
아이의 묵상글을 읽었는데, 요즘 교회들의 확진자 수나 여러 모양새 때문인지 안 믿는 부모의 염려는 급기야 교회 가는 것을 두고 뭐라 하는 모양이었다. 쪽지라도 남길까, 전화라도 할까… 생각이 여러 갈래이다 그냥 두었다. 아들도 아이도 그렇고 다들 이제 성인이라, 나는 저 아이들이 모두 자신의 하나님을 의뢰하고 붙들 수 있기를 기도한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아니면 우리가 무슨 수로 이 땅을 살아갈까? 염려와 염려가 끊이지 않고 근심과 근심이 이어지기 마련인데,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6).” 하는 오늘 시인의 기도가 큰 힘을 더한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이가 앞으로도 또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을.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1).” 내가 주의 것이다. 나를 지명하여 부르셨다. 나를 구속하셨다.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아들이 먼저 들어가고, 아이는 돌아가고, 아내와 잠깐 산책을 하며 말하였다. 애가 중3에 멈춘 것 같다. 뚱하니 화난 아이 같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여러 날 속에 담고 있는 말을 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상처가 됐겠지. 왜 자기를 버렸냐고 하잖아! 농담이겠지만 왜 안 그랬겠어. 다른 부모들은 일 년에 몇 번씩 왔는데, 우리는 한 번도 안 가고. 나는 졸업식에라도 갔지 당신은 한 번도 가지 않았잖아. 아내의 이어지는 말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여름이 왔는지 세게 부는 바람이 후텁지근하였다. 저마다 그 마음에 상처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만. 나의 어쩔 수 없었음은 미안함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어서 새삼 사과를 할 수도 그렇다고 그냥 골난 아이 눈치나 살피듯 전전긍긍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데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주께서 치유하지 않으시면, 어느 집이나 두고 사는 쾌쾌 묵은 감정과 상처는 아물 수 없다. 언제 시간을 내어 속엣 이야기를 좀 나눌까? 그래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그러는 게 더 안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안정제를 삼키며 여러 생각에 짓눌리고 있었다.
도무지 하는 것도 없이 아버지로 살았다. 아들딸을 볼 때마다 미안하고 또 미안한 마음뿐이다. 하는 것도 없이 목사로 살아가고 있다. 아이의 묵상글을 읽고 어찌 해야 할지, 뭐라고 말 한 마디 거들어야 하지 않을까? 통화라도 좀 할까? 생각만 많다. 교회에 인근까지 확진자들이 쇄도 하고 있는 때에 아이를 매일 오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괜찮을까? 아, 나는 도대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야말로 말이 좋아 아빠고 목사고 선생으로 사는 것이지, 말 그대로 하는 게 너무 없고 해주는 것도 없이 짐만 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말씀 앞에 송구할 따름이다. 내 안에 이는 어떤 미안함, 또는 부채감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동시에 가진다. 그래서 더욱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기도 하지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그리하여 아들과 아이들, 내게 두시는 영혼들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도 송구하고 면구스러울 따름이어서.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좀팽이처럼 나는 더 기가 죽는다. 말씀에게만 묻는다. 일주일 내내 설교 준비를 한다. 누구를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다. 읽는 책이나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서 이처럼 지나간 하루의 일과는 묵상의 발판이 되어 ‘나의 하나님’ 앞에 붙들리게 한다. 아무리 하나님은 위대하고 영원 무궁히 긍휼하시다 해도 그것이 나의 일상에서 느껴지지 않고 그러므로 누릴 수 없는 품이라면 이보다 더 난처한 경우가 어디 있겠나? 오늘 이사야서는 온통 그러는 나에게 집중하게 하시는 것 같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2-3).” 말씀을 내 것이라 하시는 것 같다. 야곱도 아니고 이스라엘도 아니다. 믿음의 백성들도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을 위한 것도 아니다. 나,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는 나’를 향하신 것이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4-7).”
말씀으로 나는 욕심을 낸다. 아들이 무엇보다 소중하고 귀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너머의 일에서는 속수무책이라. 내 곁에 두시는 아이들의 이런저런 사연이 나를 흔들고 마음 쓰이게 하며, 나는 저들을 아무리 사랑해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그 너머의 일에 대해서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것이라.’ 그러므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말씀은 나 하나로 족한 것을 알게 하신다. 내 안에 이는 아들에 대한 연민도 아이에 대한 동정도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도 아이에 대한 미안함도 아이에 대한 서러움도, 모두! 그 모두 나였다. 나니까 내게 맡기시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아이들을 생각하고 공연히 마음 쓰이는 일에서 놓여나려하기보다 그것으로 주를 바란다. 이내 주께서 행하실 것이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전 3:14).”
가끔씩 나는 아버지를 생각한다. 도대체 나의 부모는 어떻게 우리 사남매를 키웠을까? 그 어렵고 고단하였을 목회현장에서 아니, 게 중에 나 같은 것을 장남으로 두고 어찌 잘도 견뎌내실 수 있었을까? 나는 요즘 자주 뭉클해진다. 지금 내 아들의 열배백배는 더 신경 쓰이게 하고, 못나게 굴고, 엉뚱한 길로 가는 것을 빤히 다 알고 계셨을 텐데… 가령 나는 한 번도 아버지께 담배 피우는 걸 걸린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모르고 계실 거라 여겼다. 그런데 훗날 목사가 되고 같은 길을 가며 은근 슬쩍 여쭈었을 때 ‘다 알고 있었다.’ 하시는 말씀에 목이 턱 메는 것 같았다. 어떻게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럼 그 ‘많은 생각’을 혼자 짊어지고 오셨다는 소린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사 43:8).” 어떻게 하신 것일까? 나는 요즘 내가 지레 죽겠다. 어제는 아내도 눈치를 챘는지 아무도 몰래 나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 지나가는 것이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10).”
오늘 말씀은 한 구절 한 구절마다 오래 나를 붙드신다.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11).” 그러니 누구에게 하소연하며 이런저런 속엣 얘길 하겠나?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16-17).” 주가 나를 돌보시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나는 주의 은덕을 갚을 길이 없다. 침울해하는 내게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18).” 말씀이 붙드신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세계라. 주가 이루시는 장래이다(19). 그러므로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25).” 말씀으로 붙드신다. “너는 나에게 기억이 나게 하라 우리가 함께 변론하자 너는 말하여 네가 의로움을 나타내라(26).” 나는 주 앞에 엎드려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시 13:2).” 아뢰면, 내 안을 가득 채우시는 것이었으니,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5).”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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