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전봉석 2020. 6. 8. 06:05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이사야 45:5-6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편 15:1

 

 

하늘과 궁창이 선포하고 노래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무얼까?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19:1).” 이는 나의 입의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된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14).” 그럼 내가 무슨 말로 어떤 마음으로 묵상하는 것일까? ‘주는 나의 반석이시다. 나의 구속자 하나님이시다.’ 하는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슨 영광을 구하고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말씀을 전하며 아들을 생각하였고 지금 우리에게 두신 이 현실과 사실을 염두에 두었다. 원하는 일이든지, 원치 않는 일이든지, 일상은 때로 즐겁고 때로는 잔인하다. 예배를 마치고 아이는 점심을 안 먹고 돌아가고, 딸애는 서둘러 서울에 있는 청년부 예배로 가고, 우리는 집에 올라와서 식사를 하였다.

 

오늘 말씀이 나를 붙드신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5-6).” 저가 나의 하나님이시다. 내가 알지 못할 때에도 심지어 거부하고 부인하며 멀리 떨어져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고 등을 보일 때에도, 주는 나의 띠를 동이셨다. 이 땅 어디에도 하나님과 같으신 이가 없음을 알게 하셨다. 그러니 오늘 이처럼 주의 장막에 거하면서 주의 성산에서 살 수 있는 것이 복이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15:1).” 이제는 그게 나인 것을 확신한다. 어떠하든지, 비록 현실이 나를 어렵히고 힘들게 한다 하여도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54:5).” 그러므로 오늘에 두신 이 모든 상황을 사랑할 수 있다.

 

오후께 누가 전화를 주었다. 우린 적절한 때에 적절한 분리과정을 거쳐야 더욱 건강하고 건전한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이때의 관계에는 대표적으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그러하다. 나 역시 요즘 다 큰 아들아이와의 관계에서 그러한 상황을 겪고 있는 중이다. 이는 나이가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누구는 낼모레가 마흔인데도 여전히 그 아버지와의 관계 설정이 어릴 적 유아기 때의 일방적인 관계에 머물기도 한다. 실은 내가 그러했었고, 이를 둘 다 어려워하자 하나님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예민하고 힘들 때, 돌이켜 주 앞에 다시 세워질 때에 부모와 나를 분리하셨다. 부모님의 미국 사역 시기와 아들애의 필리핀 생활은 딱 그 시점, 내가 돌이켜 신대원을 다시 할 때에 이루어졌다. 그때 만일 아들이 있었다면 이 길을 완주할 수 있었을까? 그때에 부모가 곁에 있어서 어쨌든 내가 저들에게 의존하여 하네, 못하네 하며 바동거렸으면 또한 어떠했을까?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13:6).” 그때에 알았다. 저들도 사람이라. 나도 사람이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돌이켜보면 이 모두가 은혜이다.

 

나는 누구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저의 지금 사정을 백번 이해하지만 그런 과정이 오히려 주를 더욱 바라고 의지하는 데 유용할 것임을 확신하였다. 저는 미심쩍어하고 꼭 그래야 하나 싶지만, 나는 그 정도여서 그때 공황장애가 오고 불안증은 여전하게 나를 다스리고 있는 것을 잘 안다. 내 얼마나 사람을 의지하고 저에 의해 좌지우지하였던가? 친구라면 사족을 못 쓰듯 같이 어울려 다니고, 당시 선생과의 시간은 그게 무엇이든 옳고 즐겁고 가치 있는 것이라 여기며 별짓 다하고 살았다. 돌아보면 그때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나 했던가?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45:7).” 오늘 말씀은 이 모든 것의 주관자가 누구인지 다시금 확실히 하신다. 그럼 그리 잘 아니까 이제는 의연한가? 나는 누구와의 통화에서 여전한 나의 하루를, 다만 그때와 지금이 확연히 다른 점은, 지금은 더더욱 주의 도우심만을 바라게 된다는 것. 나의 그 무엇과도 이제는 바꿀 수 없는.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8).” 그리고 내게 두신 오늘에서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뿌리고 의를 주어 땅을 열고 구원을 싹트게 하고 움돋게 하는 사명으로, 또 하루를 사는 일. 그런 가운데서 나는 왜 이 모양인가? 하고 회의하고 갈등하는 일에 대하여,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9).” 심지어는 아버지에게는 무엇을 낳았소 하고 묻고 어머니에게는 무엇을 낳으려고 해산의 수고를 하였소 하고 묻는 자는 화 있을진저(10).” 주신 바 오늘의 모든 것이 은혜라. 내게 맡기신 일이라. 그 사명이라. 비록 나에게 두신 일이란 게 보잘것없는 내 몸 하나 건사하는 일이고, 저 아픈 아이 하나 마음 쓰는 일이고, 자식들 때문에 신경 쓰는 일이 전부라면그것도 주가 더하신 일이라. 그리하여 나는 일상을 사랑한다. 하찮아도 내게 두신 반 달란트이다.

 

저에게 그리 말해주었고, 저가 겪는 오늘의 불안 증세에 대하여 너무 기죽거나 안달하지 말고 그저 하나님이 나의 삶에 균형을 위해 채우신 평형수 같은 것이라 생각하고, 나는 그리 말해주었다. 정신과 가서 이런저런 지금의 증상을 말하면 알프람정을 줄 것이고, 그때마다 힘들면… 그저 두통약 같은 것임을. 그저 대수롭지 않게 그리 말해주면서도 내 안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어차피 아무도 이해 못한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 더 이해할 수 없다. 이겨내야지, 또 그런다! 하는 식이니까 그 서러움은 배가 되곤 하겠지만 그럴 거 없다. 모든 슬픔은 남이 나눌 수 없다. 누구보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이가 지혜의 왕 솔로몬이었다. 저는 모든 것을 가졌고 누렸고 못할 게 없는 왕이었으나,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은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14:10).” 그 외로움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15:13).” 이를 분명히 할 때 모든 응답이 주께 있음을 알았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16:1).”

 

그런 것이다. 다들 나름의 보따리 하나씩은 짊어지고 가는 길이다. 십자가 앞에 이를 던져 버렸다 싶은데 돌아서면 또 이고 있고 지고 있다. 도대체 이게 뭔가? 하고 주를 부르면서도 나의 믿음으로 이겨내려고 들면 종교인이 되는 것이고 그것까지도 주의 선하신 뜻으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받으면 버릴 게 없는 은혜가 된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우리의 근심은 고약하여서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17:22).” 이것으로 나는 교만에 서지 않게 하심을 이제는 안다. 더는 사람을 찾고 의지하고 바라며 구하지 않는다. 친구도, 선생도, 부모도, 아들도 다들 거기까지이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18:22).”

 

겸손이란 온전히 주를 바라는 온유함이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5).” 여기서 그들의 땅은 무언가? 오늘 내게 두시는 이 넌더리나는 일상이다. 이 지긋지긋한 나의 불안과 염려다. 아무런 성과도 없는 또 하루다. 같은 일의 지루한 반복이다. 이같이 노아의 등 위에 얹힌 나무토막 같은 무게이다. 해는 뜨거워 볕은 따가운데 무슨 홍수 심판의 경고를 붙들고 도대체 이 무슨 미친 짓인가? 싶은. 어처구니없는. 괜한 일 같은 날들이다. 그럼에도 이 땅을 딛고 이를 기업으로 삼는 것이 온유함이다. 주가 더하시는 일들이다. 그러할 때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22:11).”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 되는 것이고, 이것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삼는 일이며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네게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23:7).”

 

오직 주만 바라는 한 가지 마음으로, 그리하여 나는 점점 더 나의 장애까지도 사랑하게 된다. 주가 두신 것이고 맡기신 것이라. 이를 내게 맡기신 것으로 하루하루 밭을 가는 일이었으니,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날을 더하는 동안 하나님은 이루어가실 것이다. 저는 어떤 이신가? 오늘 말씀은 이를 엄히 강조하신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45:5).” 저는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6).” 그와 함께 동행의 삶이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7).” 그러므로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8).” , 말씀이 참 귀하고 좋고 또 좋다. 그러니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15:1).”

 

오늘 시인은 그런 자의 놀라운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2-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