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전봉석 2020. 6. 7. 06:14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이사야 44:6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시편 14:7

 

 

우리 믿는 자들은 모두 이스라엘이다. 야곱이었다. 여수룬이 되어야 한다.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44:1-2).” 나를 지으시고 도와주시는 이, 저는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6).” 그가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14:7).” 오늘 말씀은 내가 포로 되어 사는 것을 돌이키고, 주신 바 이 구원의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를 바라신다.

 

이를 위하여 저는 나를 완전하게 용서하셨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103:12-14).” 그저 나의 생각은 허망하여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1:21).” 그러했던 날들을 돌아보면 오늘에 이 완전한 구속을 무엇으로 갚을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5-6).”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오늘에 이르러 이 구원의 말씀을 가지고 사는 일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인가, 하는 것에 놀란다.

 

조금 수그러드는가 싶었던 코로나19’ 전염병이 다시 확산 조짐을 보이고, 그것이 이제는 내 집 앞마당까지 휘젓고 다니는 형국이니 어찌 아니 두려울 수 있겠나? 이러할 때 문득 무식한 것과 무지한 것은 다르다.’는 명제가 새삼스러워진다. 저마다 자기 의를 따르는 것이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10:2-3).” 이를 알게 하시려고 오늘의 이 사태를 마련하시고 그 배후에서 돌이켜 주를 바라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데,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44:22).” 나의 만 가지 죄를 없이하신 주의 은혜 앞에서 나는 주를 바라고 주만 의지하기를 바란다. 곧 그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일,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1:20-21).”

 

누구에게 무얼 바라고 어찌 기대하는 문제가 아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다. 이 와중에도 아들은 누구 결혼식에를 가고 아내는 장모를 모시고 동대문 집에를 다녀와야 했다. 이제 나이가 들어 다음 일을 준비하느라 공부를 하고 대비를 하면서, 정작 한 날의 생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언제 꺼질지 알 수 없는 것인데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의 명성을 내시며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주의 땅을 위하여 두려운 일을 애굽과 많은 나라들과 그의 신들에게서 구속하신 백성 앞에서 행하셨사오며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으로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삼하 7:23).” 이를 안다고 해서 나는 의연하고 아무렇지도 않은가? 누구 생각을 하다 저를 염려하고, 무슨 일 앞에서 누구보다 쩔쩔매기 일쑤며, 돼도 않는 일로 마음만 전전긍긍하는 사람이라. 가끔은 아주 가끔은 자식들에게도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가? 두려운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전에 한 녀석이 아주 냉소적으로 말하였다. 내가 하도 저의 장래를 두고 뭐라 하며 염려하고 조언하던 말끝에 나온 말이다. 내 인생에서 선생님이 그렇게 큰 존재감이 없어요. 우리 엄마도 여기 오는 것을 그저 그러려니 하지 대단히 의미를 두고 있지는 않아요. 하는 저 말이 계속 뇌리에 남은 것은 자각이었다. 내가 무얼, 어떻게, 뭔가를 할 수 있을 것이고 해야 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는 것을 깨달았다고나 할까? 그 뒤 그러려고 그러는 것은 아닌데, 한두 번 말하고 그게 먹히지 않는 것 같으면 더는 거기에서 마음을 뺀다. 내가 짊어지고 갈 수 있는 짐이 아니다.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을, 마음은 저 혼자 씨름하듯 고집을 부리고는 하는 것이었으니. 그러한 의지와 상관없이 마음이 가고 생각이 자꾸 나는 일에 대하여는 그것 때문에도 주를 부른다. 힘에 부쳐서 말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1:5-6).” 나는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사랑한다.

 

내가 주의 찬송이 되는 일은 일의 결과가 아니라 내 안에 머무는 원인이다. 그 원인은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이다. 가령 그렇게 말한 아이에게 그처럼 안달을 부리고 조바심을 치듯 전화도 해보고 만나려고 하던 일에서 지금 그저 생각뿐이라. 마음이 전부이겠으나 이 마음마저 사그라질까봐 나는 가끔 두렵다. ‘그랬었지? , 너구나?’ 하고 희미해지는 기억만큼 허무한 게 또 있을까? 언제는 그렇게 내 마음을 쥐락펴락 못살게 굴던 사람인데, 이제 더는 아무렇지도 않게 잊히고 감추어져 그러려니 하고 마는,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9:22-24).” 저가 부르심을 받은 자인지, 부르심을 받을 자인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여전히 내 안에 두시는 마음이라. 그 증거로도 저 아이를 위해 기도한다. 더는 연락을 하는 일도 괜한 게 되어버렸으나.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혼미한 저들의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신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나의 이 사소한 생각만으로도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마음이 밟히는 무슨 일, 누구, 어떤 기억을 두고 주께 아뢰는 일.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13:8).” 이 두렵고 끔찍한 일을 알면 알수록 더욱 주의 뜻을 구하고 바라게 된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5:2).” 이를 위하여 나는 아무 것도 하는 게 없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주 앞에 송구하고 죄송한 마음이지만, 그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저 아이, 그때 그 일을 두고 주께 아뢴다. 오늘 이 일련의 사태 앞에서 나의 두려움은 또한 염려와 근심은 주를 더욱 의지하게 한다.

 

그러할 때 오늘의 말씀은 참으로 귀중하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44:21).” 다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 나는 그리 기억한다. ‘나는 주의 종이다. 주께서 지으셨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나를 잊지 않으신다.’ 이와 같이 논리 정연한 삼단논법의 말씀 앞에서 나도 아들을 위해 기도한다. 아내와 딸애를 두고 주께 아뢴다. 내 기억 저편의 그럼에도 자꾸 마음이 쓰이고 생각이 가는 누구를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른다. 이것이 주의 영광이 된다.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숲과 그 가운데의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 중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로다(23).”

 

나의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생각이 또는 마음씀이 전혀 그에게는 알 수 없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라 해도, 누군가 나를 잊지 않고, 나를 위해 기도하셨고 기도하심으로 오늘에 내가 주를 바라고 주께 더욱 의뢰하는 것임을나는 이제 잘 안다. 모든 것이 헛될 것이나 하나님의 영광은 한 번도 잊힌 바 된 적이 없었다. “그들이 이른바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36:20-21).” 내가 아니라 주가 하신다. 나는 다만 잊히는 사람이고 존재감이 없는 존재이나,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22).”

 

오늘 성경은 이를 알아보게 하신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44:3-4).”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14: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