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14 주일
시편 20편
환난 날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들어가는 말
하루 앞일을 누가 알겠나. 또한 저마다 가지고 있는 그 속을 누가 알겠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누누이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오로지 우리 영혼이다. 육은 영혼을 담는 임시적인 장막일 뿐이다.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우리는 육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하여 염려는 멈출 줄 모른다. 이는 믿음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염려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성경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육신을 입고 살면서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바울은 그 방법을 제시하였다! 저의 증거를 정리하면 염려로 인해 기도를 하면 느닷없이 감사할 게 발견되고, 그래서 감사를 하나님께 아뢰다보면 하나님의 평강을 이 우리 마음을 지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똑같이 육신을 입고 사는 사람이라 해도 믿는 자들만의 ‘염려의 역설’이다. 기도의 증거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어진다.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사 46:4).” 주께서 책임지고 내 마음의 평강을 하나님의 평강으로 지키신다는 것이다.
실제 염려의 원인은 간단하다.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실제 우리 염려의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통계자료도 있다. 그럼에도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이를 말씀으로 듣고 잘 알면서도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할 수도 없”다(롬 8:7). 늘 보면 기도보다 염려가 수월하고, 감사보다 염려가 빠르고, 하나님의 평강보다 염려를 해결하려 뭐라도 하는 게 더 나은 것 같다. 하지만 염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기도뿐이다. 기도하다보면 감사할 게 참 많다. 감사가 회복되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안에 퍼져난다.
오늘 시편의 말씀은 염려의 날에, 그 ‘환난 날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오늘 시편을 3연 9행으로 나누어, 그리 길지 않은 시에서 우리의 올바른 기도를 배우려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예외적인 특권을 마주하려 한다.
본문 이해
1연(1-3), 환난 날에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환난은 늘 느닷없다. 예고도 없고 막무가내다. 제멋대로 닥치는 게 환난이다. 기껏 건강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중병에 걸리고, 아침에 나갔던 사람이 저녁에 주검으로 돌아오고, 철저하게 예방을 했는데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고가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환난은 늘 이처럼 우리를 속수무책이게 만든다. 바로 그 “환난 날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세 가지 특징을 1연은 노래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우리의 부름에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응답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높이 드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의 성소에서 우리를 도우신다. 곧 시온에서 우리를 붙드시는데, 이 땅에서 내가 주와 함께 하는 모든 시간에서이다. 셋째, 우리가 드리는 소제 곧 온 마음과 정성과 뜻을 합하는 것을 하나님은 반드시 기억하신다. 이를 위하여 오늘 시인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2연(4-6), 우리 기도를 이루시는 하나님
사람은 본능적으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하다못해 생일케이크에 촛불을 끄면서도 소원을 빈다. 하지만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오늘 시편은 우리 기도의 가늠쇠를 새로 조정하고 있다. 물론 우리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기를 기도한다. 이는 우리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위하는 기도다. 그러할 때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다 같이 주께 영광을 올릴 수 있도록. 자, 여기서! 그렇다면 우리의 총구 즉 기도는 최종적으로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물론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서로가 서로를 위해 그리 구한다. 그런데 응답은 ‘성소에서의 응답’이다. 우리 기도는 ‘소제’다. 소제는 땅에서 나는 열매를 드리는 제사다. 덧붙여 전제는 액체를 부어 드리는 제사다. 열매를 얻기까지 피땀을 흘려 수고하는 모든 애씀이 기도가 된다.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들에게서 받으시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따로 구별된 자들이었고 신약시대에는 우리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이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우리가 이 땅에서 수고하는 모든 열심과 그 결과를 주께 드리는 것, 곧 눈물과 땀으로 드려지는 준비와 그 열매가 모두 ‘성소에서의 일상’이다. 성도의 일상 성소다. 성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시편은 이를 일깨운다. 이렇게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구원은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는 것으로, 우리가 바라는 ‘남들처럼,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으로가 아니다. 그러한 기도의 응답은 도리어 우상숭배가 된다. 자기 좋아 박사를 따고, 판검사가 되고, 돈을 벌고, 집을 사고, 이를 더더 유지하지 못하게 한다고 하나님을 원망해서야! 그런 게 아니다. 공부를 하는 목적도, 돈을 버는 이유도, 건강을 관리하는 수준도 모두 하나님께 드려지는 ‘소제’여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도 빠짐없이 응답되는 것이다. 당장은 애매해서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곧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그러니까 지금은 구분이 어렵다 해도,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3연(7-9), 우리의 기도는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것이다
기도는 찬송이다. 찬송은 자랑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그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일이다. 어디 좋은 여행지나 맛집에 들어가면 일일이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려 공유하고 싶은 심리도 그런 것이다. 그렇듯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고 자랑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한다.
그 결과를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8).” 이처럼 결과는 분명한 것이다. 믿는 사람들은 아무리 지지리 궁상으로 살았다 해도 감사할 것뿐이고, 안 믿는 사람들은 호화롭고 남부럽지 않게 살았어도 후회와 회환뿐이다. 그 차이는 엄연하여서 같은 세상을 사는데도 다른 인생을 사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는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의 왕, 여호와께서 응답하시’는 삶을 산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가장 축복 가운데 살았던 솔로몬은 인생을 이렇게 한 문장으로 정리하였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3).” 이 얼마나 허망한가? 인생 별 거 없다. 그저 헛것뿐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번성하였던 시대를 살며 지혜가 무궁하고 누릴 수 있는 복을 모두 누렸던 자가 할 소리는 아닌듯하다. 이에 상대적으로 바울의 증언은 저돌적이며 직접적이기까지 하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이는 본래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그러니 어쩐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즉 기도하지 않으면 염려하게 돼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이 좋아서 마음으로 원해도 육신은 약한 것이어서, ‘기도를 하면 염려가 사라지고, 염려를 하면 기도가 사라진다.’ 그렇다고 기도를 해서 염려거리를 모두 해결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다만 모든 일에” 어느 것 하나에 특정 짓는 게 아니라, ‘다만 모든 일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즉 재차 기도를 강조하는 바울사도의 증거도 그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감사함으로” 할 수 있다. 감사가 안 나오는 까닭은 기도하지 않아서이고, 기도를 시작하면 감사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 곧 우리는 “환난 날에” 염려를 하다가도 기도를 한다. 그렇게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성경의 필연적인 약속이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러시는가 아니 그러시는가, 염려만으로는 알 수 없다. 우리 안의 평강은 결국 ‘하나님의 평강’이었다. 이를 가지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성경은 분명히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나오는 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기도할 때 우리를 유혹하는 두 가지 마음이 있다. 하나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동조하는 세력을 얻음으로 자기만족을 추구하게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앞서 경고하셨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5).” 그리고 두 번째는 중언부언하는 것이다. 정작 자신이 뭘 구하는지도 모르고, 남들처럼, 누구처럼 되겠다고 열심을 다해 수고하고 구하는 일이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7).” 자기필요, 자기만족에 의해 학위를 따고, 돈을 벌고, 권력을 쥐었으면서 사사건건 하나님을 위해한 것처럼 구는 사람들이 있다! 중언부언하는 것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떠벌이는 것이다. 지금 무엇을 하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우리는 가만히 ‘주님’ 하고 부르기만 해도 주님으로 가득한 평강을 위해 기도한다. 기도로 열심을 다한다. 최선을 다하며 소제의 삶을 산다. 곧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그와 같은 기도로 평강을 누린다.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능했던 것이다. 그것으로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곧 우리는 무얼 하든지 주를 전하는 삶을 산다. 이 땅에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얻게 하려 하심이다.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게 하신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계신다. 우리가 기도함으로 비로소 회복한 감사는 단순히 나 혼자 평강을 누리게 된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저들로도 그리하게 하여서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다시 말해 저들로도 우리의 사명을 같이 나누게 하시려는 것이다(사 61:1-3).
오늘 다윗은 ‘환난 날에’ 우리로 이 놀라운 ‘응답의 원리’를 알고 기도하는 평강의 날이 되게 한다.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시 20: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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