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05 주일
시편 22편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에 대하여
들어가는 말
사는 일이 지옥 같을 때도 있다. 우리 삶은 영구적이지 못하다.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 13:14).” 재세례파니 안식교니 하는 데서는 죽음으로 비로소 우리 영혼이 평안히 잔다고도 한다. 그렇듯 이 땅의 삶은 고되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12:28).” 말씀은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나라’ 곧 ‘영구한 도성’이 있음을 약속한다. 지금은 비록 거류민과 나그네 같이 살지만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우리 안의 정욕을 제어해야 한다. 그리고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
곧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또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하는 질문을 오늘 말씀을 통해 던지고자 한다. 곧 우리의 도덕은 무엇이고 왜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우리의 선과 도덕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다소 철학적인 질문을 던짐으로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에 대해 말씀으로 상고하려 한다. 하나님이 없다면, 그래서 죽음으로 모든 게 ‘무: 없음-無’로 끝이 난다면, 굳이 오늘 우리의 열심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칼빈은 거두절미하고 ‘오직 성경’을 외쳤다. 우리는 오직 말씀으로 산다. 삶의 기준, 도덕과 선의 표본, 곧 모든 생명체의 삶과 죽음의 바탕은 성경이다. 이를 믿는 우리는 오늘 본문을 이해하고, 성경이 명령하는 아홉 가지의 ‘하라’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 본문 이해
고통: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1-2)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1).” 앞서도 말했듯이 사는 일은 종종 고단할 따름이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2).” 그러할 때 우리는 주 앞에서 서러워한다. 주께 부르짖는 우리의 기도는 특권이다.
기도: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3-5)
기도는 자신을 주 앞에 꿇어앉히는 일이다. 우리 공동체는 주의 거룩을 바라게 돼 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3).” 믿음의 고백이 기도이고 의뢰다.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4).” 어려움 중에서 주가 건지실 것을 바라는 게 믿음이 아니라, 이미 건지셨음을 고백하는 게 믿음의 기도다.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5). 현실은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우리는 주의 거룩을 찬양한다(시 73편 참고).
현실: 멸시받는 삶 가운데서(6-8)
이렇듯 주 앞에 설 때 전혀 다른 고백이 나온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6).” 때로는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어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7-8).” 아무리 믿는 자로 사는 일이 바보 같다 해도, 그와 같은 현실에서 우리의 고백은 늘 역설적이다(고후 6:8-10).
믿음: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도다(9-10)
믿음은 어려울 때 더 참된 고백이 된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9).” 세상이 아무리 어떻다 해도,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10).”
산다는 것: 나의 환난의 때에(11-20)
산다는 일은 대부분 고역이라, 다윗은 꽤 긴 부분에서 환난에 대해 우리의 도우심이 주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11).” 우리를 공격하는 것을 우리는 당해낼 수가 없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12-13).” 저들과 견줄 때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14-15).” 아, 사는 게 죽는 일보다 어렵게 여겨질 때,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16).” 환멸과 고통 중에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17-18).” 그러할 때 누구를 의지할까?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19).” 곧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20).” 주의 개입만이 살 길이다.
구원: 응답하시고 구원하셨다(21-22)
고난 중의 위로라,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21).” 믿음이란 구원하실 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 구원받았음을 붙드는 일이다. 그래서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22).” 우리의 사명은 전도다. 현실과 다르게 주를 자랑한다. 경배하는 것이다. 주는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구원하셨다!
지혜: 주를 경외하는 자들에게(23-26)
이를 알게 하는 것이 우리 안의 두려움이다. 주를 앎으로 온당하게 두려워한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23).” 우리는 이렇게 자랑한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24).” 우리의 경험이다. 믿음의 사람들만이 가진 고백이다.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25).” 그리하여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26).”
영원한 나라: 영원무궁하신 하나님께 예배하라(27-31)
죽음은 끝이 아니다. 비로소 시작이다. 죽은 이를 일컬어 ‘돌아갔다’ 하는 것도 그래서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27-28).” 이에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29).” 결국 우리는 영원한 나라에서 환희를 누린다.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30-31).” 아멘.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 답할 차례이다.
※ <오직 성경>으로, 아홉 가지의 ‘하라!’
1. 말씀을 읽어라.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엡 3:4).”
2. 말씀을 분별하기를 힘써라.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3. 말씀으로 비추어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전 4:6).”
4. 말씀을 찾아라.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잠 2:4-8).”
5. 말씀을 생각해라.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7).”
6. 말씀을 표현해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7. 말씀이 기억해라.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딤후 2:8).”
8. 말씀을 전해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9. 말씀으로 기다려라.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시 37:5-7).”
이를 토대로 우리에게 있어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 산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곧 신앙의 기본이다. 도덕의 기준이며 선의 축약이다. 신은 죽었다고 한 니체도 공리주의를 비웃었다. 공리주의란 ‘최대다수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기틀이 다수결의 원칙이다. 이를 종교로 구현하여 ‘만인구원설’을 주장하는 곳도 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누구도 이 사랑을 끊을 수 없다.
곧 우리는 주의 사랑으로, 주의 사랑 안에서 산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를 위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곧 우리가 산다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일이다(17). 이 땅의 생은 극히 한시적이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간다. 단지 이 땅에서 잘 살기 위해 죽어라 하고 사는 일보다 어리석은 것도 없다.
※ 죽음에 대하여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3-14).” 죽음에 대한 우리의 몰이해가 종종 삶의 회의를 가져온다.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던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가까운 동료나 가족들의 죽음에 당혹하였다. 이에 바울은 저들에게 일러 ‘죽음’을 ‘자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잔다는 것은 곧 깬다는 말이다. 예수님도 죽은 야이로의 딸을 두고 ‘잔다’ 하시고,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막 5:41).”
성경은 우리의 죽음을 다시 깰 것으로 확정한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한편 강도에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곧 죽으면 다 끝난다고 하시지 않고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른다.’고 하셨다. 이는 거지 나사로도 죽어 즉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그곳에는 모세도 엘리야도 다윗도 있는 곳이다. 그곳에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머물다 ‘예수 재림하실 때에’ 다함께 올 것이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곧 우리의 죽음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 5:8).” 그래서 오늘의 삶은 더욱 더 값지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9).” 오늘을 사는 일은 마치 ‘사는 것’과 ‘죽는 것’ 사이에 끼인 것과 같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2-24).”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을 하루 더 살아 있는 까닭은, 주를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나오는 말
요즘 부쩍 죽음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웰-다잉’이니 ‘존엄한 죽음’이니 하면서, 심지어는 자살을 호도하기까지 한다. 한 마디로 사는 일뿐 아니라 죽는 일에까지도 자의적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를 일갈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시 37:5-7).” 고로 우리는 죽으나 사나 주의 것이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이것이 우리의 길이다.
이를 믿음으로 받지 못하면, 저마다 ‘광야 40년’의 먼 길을 돌아야 하는 수밖에! 행여 더는 돌이킬 수조차 없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경고하셨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안이하게 굴다 누구는 데려감을 당하고, 누구는 버려둠을 당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눅 17:34).” 아차, 하면 그때는 이미 늦었을 수도 있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35).” 마치 자신은 이 모든 것에서 예외적인 존재라고 오해하지 말자. 선택 받은 백성이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바울도 고백하였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왜 그럴까? 그렇게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9:27).”
죽는다는 일은 두려운 것이지만 산다는 일은 더더욱 두려운 일이다. 저의 고백은 그런 것이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산다는 일과 죽는다는 일)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3-24).” 곧 오늘 우리의 유익은 스스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곧 ‘주를 위하여’ 사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맡기신, 이 땅에서의 삶의 이유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오늘 우리의 사명이고, 사는 목적이고, 죽는 이유이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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