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8 주일
시편 21편
승리하는 삶
들어가는 말
우리의 삶은 ‘승리하는 삶’이어야 한다. 자신을 다스리고 남을 위하여, 주의 살아계심의 증거가 되는 날들이어야 한다. 이는 마치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공의와 찬송을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시리라(사 61:11).” 하는 말씀과 같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가?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이 따라주지를 않고, 가슴으로도 뜨거워졌는데 현실에서는 멀기만 하니!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욱 말씀이 필요하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시 31:14).” 내 비록 연약하고 보잘것없으나, 또한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23).” 우리는 주 앞에서 성실할 따름이다. 그렇게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24).” 이와 같은 말씀이 늘 우리를 붙드시는 것이다.
지난번에 나눈 시편 20편과 오늘 함께 나눌 21편의 시는 한 짝을 이룬다. 20편은 전쟁에 나가면서 부르는 출정(出征)시였다면, 오늘 21편은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개선(凱旋)시이다. 곧 날마다 전쟁인 나날 속에서 우리는 ‘환난 날에 주께 부르짖는 주의 군병’ 된 성도들이다. 그와 같은 특권에 대해 잠시 언급하고, 오늘 나누고자 하는 ‘승리하는 삶’으로 넘어가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시편 20편 1-3절에서, “환난 날에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첫 번째로 살펴보았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시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높이 드시는 일이기에 더욱 더 분명하다. 두 번째로 그 하나님은 성소, 곧 시온에서 우리를 붙드신다. 흔히 아이의 소원을 마음대로 아무 때나 들어주는 부모는 없듯이…. 세 번째는 우리가 드리는 소제 곧 온 마음과 정성을 합하여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은 끝까지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4-6절에서는 그와 같은 “우리의 기도를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해 나누었다. 즉 우리 기도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다시 말해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이 간단한 원리에서 하나님을 야박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고, 더 깊으신 뜻을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다. 무응답이 응답일 때도 있다. 우리 삶이 주의 성소인가? 나의 온 마음이 시온에 머물고 있는가? C. S. 루이스는 이를 <존재론적 딜레마>로 설명하였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선이시고 악은 있을 수 없는 분이심으로, 절대 선인 그 하나님이 우주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우리에겐 아무 소망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는 원수가 되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늘 죄 속에 사는 우리 자신으로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없고, 하나님과 함께 살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죄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
다음은 7-9절 말씀으로 찬송에 대해 나누었다. 찬송은 자랑이다. 우리가 하는 전도다. 어디 부동산을 소개하고, 주식을 권하고, 투자 가치를 운운하는… 이 모든 자랑이 곧 찬송이다. 그렇게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고 자랑하지만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하는 시인의 말에 우리 자신도 그러한가? 그 결과는 엄연하여서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8).” 이 명백한 사실을 알고 우리는 날마다 일상의 전쟁터로 나간다. 매번 환난은 난데없고 죽음은 느닷없다. 그러할 때 성경의 공통된 음성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승리하는 삶>
오늘 시편의 말씀은 우리가 그와 같은 전쟁터에서, ‘환난 날에 주를 부를 때’ 그에 따른 승리의 삶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게 한다.
첫 번째 우리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시는 하나님에 대해 노래한다(1-2).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셀라)(시 21:2).” 즉 전쟁과 같은 일상에서 우리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크신 긍휼로… 구원자들을 주어 (우리를)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신다(느 9:27). 즉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시 34:6).” 이는 이미 그리 되어진 일이다. 우리의 승리는 이미 거둔 결과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다만 그 우선순위의 문제였으니, 하다못해 아이를 키울 때도 지혜로운 부모는 그 요구를 다 들어주지 않음으로 거절하지 않는 지혜를 발휘한다. 무조건 안 되는 게 아니라 왜 안 되는지, 가령 나름의 목표를 위해 열심히 사느라 가정을 소홀히 하는 가장이 있다면? 자신이 속한 조직과 직장에서 인정받고 출세하기 위해 옳지 못한 관행과 악습과 타협하고 눈감는다면? 수고하고 애쓴 자신의 노고를 스스로 치하하기 위해 스스로 ‘욜로족’으로 사는 데 있어 별다른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면? 욜로는 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여기며 과감히 소비하는 것이다. 곧 우리의 소원과 그에 따른 열심이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한가? 모두가 스스로는 옳다 여기는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우선순위를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씌우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찬양한다(3-5).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그를 영접하시고 순금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셨나이다(시 21:3).” 곧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91:14).” 그러므로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3-4).” 겸손과 순종은 믿음의 엄연한 형태이다.
곧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이다. “그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그에게 주셨으니 곧 영원한 장수로소이다(시 21:4).” 오늘 본문에서 곧 감사와 겸손으로 사느냐 자기 수고와 노력으로 사느냐 하는 문제가 갈린다. 후자만 더해지면 보상을 따르는 신앙이 된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했는데?’ 결과에 따른 억울함만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곧 우리에게 맡기신 것으로 주의 멍에를 멘다면, 그 책임도 주님이 지신다. 우리의 결과는 하나님의 것이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 16:1).”
자주 언급하였듯이 브레이너드는 선교사가 되어 인디언 마을에 갔다가 5년 만에 폐렴에 걸려 숨졌다. 저가 남긴 것은 일기장 하나뿐이었다. 존 번연 목사는 공교회에서 설교를 한다는 이유로 12년간 감옥에 갇혔다. 그때 저가 남긴 것은 <천로역정>이었다. 수많은 젊은 선교사들이 하나님의 뜻을 품고 조선으로 왔고 무참히 죽임을 당했다. 저들은 오직 하나,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곧 저들은 죽어서도, 저의 일기장 한 권이 세계 각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천로역정>은 성경 다음으로 수많은 신자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었고, 빛도 없이 죽어간 조선의 선교사들의 죽음으로 한국교회가 세계복음화에 중심이 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복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오늘 시인은 노래한다. “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시 21:5).” 주께서 우리로 존귀와 위엄의 옷을 입히신다. 곧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73:28).” 이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결국 우리는 말씀으로 산다.
세 번째로는 우리의 승리는 범사에 주를 의지함이다(6-13). “그가 영원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시 21:6).” 곧 우리 ‘승리하는 삶’은 주 앞에서의 기쁨과 감사이다. 이는 흔들리지 않는다.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존하신 이의 인자함으로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7).” 그러므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곧 우리의 바른 신앙은 숱한 우리의 원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왕의 손이 왕의 모든 원수들을 찾아냄이여 왕의 오른손이 왕을 미워하는 자들을 찾아내리로다(시 21:8).”
원수가 수도 없이 공격한다. 염려와 근심이 에워싼다. 육신의 고통과 뜻하지 않은 상황이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언제나 돈이 문제다. 먹고 사는 게 고역이 되었다. 원수도 이런 원수가 없다. 그런데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과연 이와 같은 말씀이 가지고 있는 통장잔고보다 든든한가?
그러므로 시인은 승전가를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악한 날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한다. “왕이 노하실 때에 그들을 풀무불 같게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그들을 삼키시리니 불이 그들을 소멸하리로다(시 21:9).” 승전가는 이를 일깨운다. “비록 그들이 왕을 해하려 하여 음모를 꾸몄으나 이루지 못하도다(11).” 이는 “왕이 그들로 돌아서게 함이여 그들의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리로다(12).” 무슨 소리인가?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시 44:5).” 주께서 다 하셨다는 것이다. 이 악한 날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오늘 우리가 부를 최후의 승전가이다.
나오는 말
<승리하는 삶>을 위한 세 가지 힘
첫째, 세상을 사는데 있어 ‘새 힘’을 얻어야 한다. 본래 처음 사람은 먹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웠다. 죄가 들어오면서 먹고 사는 문제는 고역이 되었다. 먼저는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그러니 이 땅에서는 우리의 수고가 끝이 없다.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18).” 이에 ‘밥벌이의 지겨움’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무슨 능력으로 살아야 할까? 곧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둘째, 날마다 거룩하게 살 수 있는 힘을 공급받아야 한다. 얼마나 유혹이 많은가? 진리가 온통 긴가민가하다. 잘 믿던 자들도 속수무책으로 이단에 빠져든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우리의 거룩은 주를 인정하는 일이다. 셋째, 희생하려는 힘이 필요하다. 사회학자들은 말하길 미래사회에는 점점 서로가 희생할 이유를 잃게 된다고 하였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도 우리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K방역’이 이나마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실제 누군가의 희생 없이는 살 수 없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곧 십자가 없는 희생은 자기만족으로 허영심을 더하고, 십자가 없는 거룩은 자기위안으로 스스로 자존감을 더하고, 십자가 없는 새 힘은 세상을 지배하고 호령하려는 괴물을 만들뿐이다. 이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말씀으로 붙들려 말씀 안에서, 말씀과 같이 사는, 날마다 승리하는 삶이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아멘.
'[설교원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편 23편 /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0) | 2020.07.10 |
---|---|
시편 22편 /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에 대하여 (0) | 2020.07.03 |
시편 20편 / 환난 날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0) | 2020.06.12 |
시편 19편 / 하나님의 영광 (0) | 2020.06.05 |
시편 18: 1-3 /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0) | 2020.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