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12 주일
시편 23편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들어가는 말
오늘 본문은 기독교인이라면 가장 사랑하고 암송하는 성경이다. 그만큼 공감이 크고 위로가 많다. 오늘은 거두절미하고 본문으로 바로 들어가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
정말 그러한가? 내게 정말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까 부족한 게 없는가? 만족하고 감사한가?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날 위해 죽기까지 하신 목자시다. 가짜도 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11-12).” 진짜가 진짜인 만큼 가짜도 진짜 같은 법이다.
그 목자 되신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는 복음이고 진리이다. 진리는 토론의 주제가 아니다. 우리가 동의하든지 동의하지 않든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곧 우리의 믿음은 전적으로 주의 것이라. 주의 책임 하에 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는 고백은 그리 맡은 자의 실제다.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2).”
우리의 악함은 생수의 근원을 곁에 두고 우물을 파는 일이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그렇게 오늘 하루는 쉴만한 물가에서였는가?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우리 육신은 정욕을 추구한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 없다. 세상에 성자는 없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성경의 지론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를 두고 토론이 벌어지고 어떻게 하면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갑론을박이 이어진다. 다들 강박적으로 경건을 도모한다. 자칫 우리가 갖는 경외심이 그릇된 신념이 될 수 있다.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32-33).” 이번 주간 우리를 놀라게 한 누구의 자살과 저의 삶의 족적을 비춰보면 알 것도 같다. 자신의 강직함으로 자신을 경건하게, 주를 온전히 경외함으로 섬길 수 있다고 여겨서는! 이를 경외심으로, 주를 섬긴 자들이 있었으니, 저들은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막 7:4).”
자기 이름을 위하여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3).”
우리는 모두 죽었던 자라.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다른 방법은 없다. 대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 62:5).” 이 구원은 불가항력적이다. 이는 모두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가장 큰 영광은 그 영광을 받으실 때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로 의의 길을 가게 하신다. 혹자는 말하길,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살다 내가 택함 받은 자이면 어떻게든 부르실 것 아닌가? 실은 그렇게도 하신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쉽게 말해 세상에서 멸망하게 하느니, 일찍 죽여서라도 살리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요일 2:24).”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다. 물을 마시고, 숨을 쉬어야 산다. 삼시세끼 먹어야 살고, 피가 돌아야 산다. 이는 찬반의 문제가 아니다. 곧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눅 11:23).” 아닌 건 아닌 거다. 서로 다른 게 아니라, 엄연히 틀린 것은 틀린 것이다! 존중이니 배려의 차원이 아니다. 즉 잘 믿다 중간에 떠나거나, 버림받았다는 소리는 그래서 틀린 말이다. 저는 처음부터 믿지 않은 자이다. 가룟인 유다는 저의 신념을 믿었을 뿐이다.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
삶의 굴곡에 있어 고난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비유하고 계신다. 실제 우리는 고통이 있어야 주를 찾는다. 참 희한하지? 평안할 때는 외면하고 멀리한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 참 좋은 세상이다. 아직 건강할 때, 여력이 되어 젊을 때는 모른다. 악, 소리 나면서 ‘살려주세요!’ 할 때가 오나니, 그래서 C. S. 루이스도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라고 하였다. 가만히 다정하게 부르면 들은 체를 하지 않으니까!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시 107:14).” 결국은 당해봐야 알고, 죽음이 가까이 임박해서야 산다는 것에 대해 절감할 수 있으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고 끝이 아니다. 생명이 있다면 살아야 하고, 산다는 일은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내 잔이 넘치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5).”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많은 사람의 존경과 환대 속에 사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로 사는 일이고(마 5:10).” 이는 예수 믿는 일로 인하여 욕을 먹고 박해를 당하는 일이다. 곧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11-12).” 앞선 믿음의 사람들도 그러했다. 마치 예수 잘 믿어 좋은 일 많이 생기고 이 땅에서 출세 성공하는 것을 복으로 친다면,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마 19:24).” 이와 같은 말씀은 어폐가 있다.
그럼에도 오늘 시편에서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신다고 했다. 무슨 소릴까? 이를 사도 바울의 설교로 들어보면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하나님이 더하시는 복으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이다. 우리에게는 분명하여서, 그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
산다는 일과 죽는다는 일에 대하여,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렘 8:9).” 스스로 내가 하려 하면 그 모든 지나침으로 우리는 더욱 악하게 되거나 추구하던 선행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지혜자는 말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우리의 지나침이 화를 부른다.
우리의 본향은 이 땅이 아니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시 44:6).”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 안식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온전히 얻게 될 것이지만, 이 땅에서도 간헐적으로 누릴 수 있는 안식이다. 그 방법은 무엇인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예수의 멍에를 메는 것이다. 내 몸도 내 것이 아니다. 지나친 열심이 우리 영혼의 성장을 멈추게 할 수도 있다. 때론 우리의 선한 의도보다 악한 것도 없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것으로 진리다.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우리는 산다.
나오는 말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
자기 십자가는 팔자소관이 아니다. 운명론적인 체념도 아니다. 오히려 수긍이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바울은 이를 알고, 자신의 남은 생을 ‘예수의 남은 고난’을 지는 것으로, ‘교회를 이루어 가는 일’로 삼았다. 곧 우리가 사는 우리 이야기는 내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편지>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우리의 사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된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주의 십자가를 지고 사는 일이 스스로 자기 운명을 지고 사는 일보다 쉽다.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주의 짐은 새털처럼 가볍다. 그리하여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히 13:3).” 속된 말로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가 누구를 위한단 말인가? 오직 우리의 싸움은 나 자신과의 싸움뿐이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2-23).” 그래서 바울은 절규하였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다들 자기는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장 모른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렘 8:18).”
이를 앎으로 주를 바란다. 그러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오늘 이 고백은 우리의 것이다. 아무리 생이 어렵고 힘들다 해도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를 살면서 삶으로 느끼고 답할 수 있는 자는 복되다. 이에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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