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예레미야 13:23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편 49:20
자신이 책임지려 할 때 은혜도 결산해야 하는 무엇으로 여기게 된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마 25:24-25), 한 므나를 받은 사람(눅 19:20-26)을 묵상하다보면 저들이 어찌 그러하였나? 이해가 간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21).” 은혜에 대한 오해, 그 되돌릴 수 없는 무게감이 누구에게는 깃털처럼 가벼울 수 있고 누구에게는 물에 젖은 겨울외투처럼 엄청난 무게일 수도 있다. 오늘 말씀은 재촉하듯 이를 묵상하게 하신다. ‘사람이 아무리 존귀하다 해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장구하지 못함이 멸망하는 짐승 같다.’ 하지만 덧붙여 이르시기를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13).” 하시는 대목으로 보면 안 그럴 수 있고 안 그래야 옳은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렇지 않은 존재라는 소리인데, 어쩌자고 경건한 모양으로는 살면서 경건의 능력은 갖추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이를 부인함이 교만이었다.
오늘 예레미야는 유브라데 강가에 묻어두었던 썩은 띠를 가져다 매며 교훈을 듣는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렘 13:9).” 스스로 할 수 있다 하고 은혜도 갚아야 할 부채로 여길 때면 그 삶의 고단함은 알만하다. 할 수 있다 하나 한다 한들 그게 어찌 은혜로 여겨지겠나?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23).” 참으로 못 말리는 세월이라. 그러고는 한 므나나 한 달란트 받아 그리 행한 자의 변명이 가관이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잠 26:13).” 그저 하나님이 인색하고 무섭고 두려운 것이다. 필요는 하지만 달갑지 않은 것이다. 나의 의는 내가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님을,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굳이 그 안에 감사와 기쁨보다 염려와 고단한 수고뿐인 것을. 왜 그러는 것일까? 자신을 자신의 것으로 여겨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저의 간섭과 관여가 싫은 것이다. 자신이 온전히 자신 것이었으면 하고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저들이 불성실하게 함부로 살았다는 소리는 아니다.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롬 9:31-32).”
나름 한다고 애쓰고 수고하는데 그 모양이라, 저의 신앙도 비에 젖은 외투처럼 무겁고 으슬으슬 한기가 날 뿐이다. 은혜도 무게로 느껴지면 더는 가망이 없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무색할 따름이다(막 5:36). 믿는다고 뭐가 되겠나? 싶으니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그러니 은혜가 감사하기는 한데 것도 짐이라! 기껏 거룩한 성까지 가서 개들과 밖에 사는 꼴이니,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 22:15).” 교회도 다니고 예수도 믿고 나름 믿음을 가지고 신앙을 산다고 하면서도 지고 있는 책임이 너무 무거울 따름이라. 나는 내 아이를 볼 때면 이를 어찌 할꼬, 하고 염려한다. 무슨 말을 해주려다 날 세워진 대꾸에 말꼬리를 내린다. 우리가 사는 게 말로 인해 외롭지 않고,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는데. 말이 말 값을 못하면서부터 우리 사이는 냉랭하고 어려워지기만 한다. 이청득심(以聽得心)이라, 들어야 마음을 얻고. 과언무환(寡言無患)이라, 말이 적어야 근심도 적다. 어제는 저 둘을 소리 내어 여러 번 읽고 적어보며 그 의미를 되새겼다. 이청득심, 즉 ‘삶의 지혜는 말을 듣는 데 있고 삶의 후회는 말을 하는 데 있다.’ (이기주, <말의 품격>, 황소북스) 말이 많으면 후회가 있기 마련이고 말을 적게 하고 많이 들으면 지혜가 있다. 또 하나 과언무환은 사람의 모든 감정은 침묵 속에 있는 법이어서, ‘말이 적으면 근심할 것도 적다’는 소리다.
나는 요즘 말을 자주 삼키고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아들에게 말이 하고 싶고 누구에게 할 말이 참 많은데, 그런들…. 들려지지 않는 말들은 빈총 같아서 아무리 쏘아대도 소리만 요란할 따름이다. 모든 힘은 밖으로 작용하는 것만큼 안으로도 영향을 끼친다. 단지 화풀이를 하듯 쏟아내면 그만일 것 같지만, 상처를 주면 그 상처로 자신의 출혈도 크다. 속이 문드러진다는 것은 말을 해도, 말을 안 해도 다를 게 없다. 나는 다시 은혜로 눈길을 돌렸다. 성령의 은혜가 아니면 나 하나도 다스릴 수가 없다. 오늘 말씀도 이를 강력히 주장하는 것이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아무리 귀한 진리라 해도 이를 알아듣지 못하면 개밥그릇에 진주 같은 꼴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그렇다면 성령의 은혜를 우리가 어찌 붙들까? 먼저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한탄이다. 오늘 말씀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검불 같이 흩으리로다(렘 13:23).” 나름 줏대를 갖고 열심을 다해 산다고 하나 사막 바람에 불려 다니는 검불 같은 것이어서 거기에 붙을 붙인들 물을 데울 수도 없다. 그 이유는 명료하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네 몫이요 내가 헤아려 정하여 네게 준 분깃이니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까닭이라(25).” 누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이는 온갖 잡념이 또는 쓸모없는 근심이 그러하여서 나는 자주 입을 다물고 하고 싶은 말을 삼킨다.
그리고 주께만 아뢰는데,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전에 태도와는 다른 것이다. 아내는 나더러 많이 늙었다고 하고, 순해졌다고도 하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간수장의 난감함으로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16:30).” 내가 어찌 할꼬,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까? 하고 주 앞에 고한다. 참 성경의 논리는 야박하기 이를 데 없다. 먼저 살리고 보자는 게 아니다. 죽여야 살린다. 상처를 덧나게 하고 치료하신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 7:9-10).” 그러니 어쩌면 지금 내 안에 죽겠다 죽겠다하는 것은 오히려 긍정적인 신호라. 나는 나의 죄를 확인하고 확신함으로 주께 더욱 머리를 숙인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요 16:8-11).” 그러니 마음이 답답하다가도 그 마음으로 아이를 더 이해하고 그 속에 응어리진 것을 두고 나만 주께 아뢴다. 말로 풀어줄 수 없고 말로 이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면, 주님께 아뢴다는 것은 나의 침묵, 골방에서 주께 기도하는 일이라.
가만히 길을 걷다가도 혼자 아이의 뒷모습을 보다가도 헉, 하고 숨을 몰아쉬며 주님, 하고 주를 찾는다. 주님의 성품을 본받는다는 일은 저와 같이 거룩하여지는 일인데 성품(聖品) 거룩함이 몸에 배어 품에 있으려면 한자로 품을 살펴봐도 놀랍다! 입구(口) 자가 셋이나 쌓였다. 할 말을 쌓았다가 허물고 허물었다가 도로 쌓고 하기를, 주 앞에서 나의 할 말은 끝도 없으나 쌓으면 허물어지는 모래성 같은 것이어서. 말할 수 없는 말들이 안으로 쌓여서 이것이 비로소 삭아지고 발효하여 주의 잔을 채우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향기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의 냄새 같으나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부어지는 포도주라.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이라. 저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는데 여전히 앓는 소리로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이 은혜의 값을 무슨 수로 갚으려고! 다만 예수의 보혈뿐이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말씀 앞에 나의 생각도 접는다.
그리고 귀를 기울인다. “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시 49:1).” 들음으로 마음을 얻는다. 이청득심(以聽得心).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 나는 말씀을 보고 말씀을 듣는다. 다른 더 좋은 길을 알지 못한다. 오늘 시인은 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12-13).” 그러니 어쩔 것인가? 사는 게 지긋지긋하고 그 날들이 지옥 같은가?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20).” 우리에게는 오직 말씀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셀라)(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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