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아, 슬프도다

전봉석 2020. 7. 25. 06:20

 

내가 너희에게 나의 종 선지자들을 꾸준히 보내 그들의 말을 순종하라고 하였으나 너희는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예레미야 26:5

 

,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시편 62:9

 

 

저의 장인은 일찍이 선한 뜻이 있어 주께서 더하시는 자신의 부를 잘 활용하였다. 강남 쪽 어디에 살 때 가지고 있던 건물 몇 층은 귀국하여 돌아온 선교사의 숙소로 제공하여, 저들이 안착하는 동안에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저의 꿈은 노년에 강원도 어디 마을에 치유 동산을 마련하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즉 선교사로 나갔던 이들이 은퇴 후 돌아와서 함께 정착하고, 저들의 경험과 실력은 병들고 상한 영혼들을 섬기는 데 뜻을 같이 해 합심하는 거였다. 이 이야기는 벌써 십여 년 전에 들은 이야기였다. 아이 문제로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그런 마을이 있다면 아이가 가서 일손도 돕고 함께 생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던 것이다. 그러한 뜻을 카톡으로 얼핏 남겼더니, 초등학교 교사로 있는 친구는 퇴근길에 전화를 주었다. 워낙에 좀 무심한 사람이라 그렇게나마 통화하는 일도 오랜만이었다. 저의 장인은 그리 시도하여 열 채 열 가정 정도 선교사들을 입주시키다가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고, 오히려 선교사 몇으로부터 고소를 당하고, 누구에게는 사기를 당하고 급기야 손을 떼고 그곳을 떠났다고 하였다. 저도 구구절절 말하지 않았고 나도 시시콜콜 묻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략 어떤 내용인지 알 것 같았다. ‘사람을 너무 선히 봤다! 더욱이 목사나 선교사면, 오죽하니 하나님이 저들을 그리 붙들어 세우셨을까!’ 나는 혼잣말처럼 그리 대꾸하다 얼버무렸다.

 

오늘 말씀이 그런 내 마음을 더욱 울리신다. “내가 너희에게 나의 종 선지자들을 꾸준히 보내 그들의 말을 순종하라고 하였으나 너희는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26:5).” 순종은 우리 의지의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의 강권하심이 붙들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의 옳고 그름을 떠나 얼른 다른 안부로 이야기를 바꾼 까닭은 주의 일이 그처럼 낭만적인 게 아니다. 돈이나 사람의 경험과 능력으로 되는 일도 아니다. “,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62:9).” 생의 가벼움에 대하여는 남의 인생을 두고 말할 것도 없다. 나는 누가 목사라고 추켜세우면 그게 그렇게 송구하고 불편하다. 목사라는 철갑옷을 입히지 않으셨다면 과연 내가 지금처럼이나마 주의 뜻을 바랄까? 나 잘난 줄 알고 여전히 어디 기웃거리고 자기 멋에 겨워 살겠지? 선교사로 얼마나 수고하고 애쓰다 귀국하였는가는 모르겠으나 저마다 한가락 하다 온 경력을 가지고 남은 생을 주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듣기에는 낭만적이고 멋진 그림인데 본디 사람은 그리 선하지 못하다. 최소한 나는 그래서 나의 목사 됨을 감지덕지 여긴다. 누가 목사입네, 하고 자신을 추켜세울 때면 소름이 돋는다. 내 곁의 몇몇만 떠올려 봐도 선교사로 나갔던 이들 중에 겸손히 주의 일에 쓰임 받는 이를 보지를 못했다. 특히 비즈니스선교니 무슨 협력목회선교니 하는 이들의 태반이 사업가나 장사꾼 같다. 심지어 그나마 직함도 여기서는 내밀고 저기서는 감춘다.

 

,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62:5).” 친구와 통화하고 나는 우울하였다. 물론 아이 일로 혹시나 하고 알아본 것이지만 행여 나에게 맡기신 일을 회피하려 그랬던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마저 들었다. 그렇듯 나는 순수하지 못하다. 한 시도 말씀에서 눈을 떼면 어김없다. 그 속에 잔꾀가 가득하다. 다들 나 같을 거라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더욱 확실해진 것은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다시 원점이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6).” 도대체 누가 자기 선행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겠나? 주의 돌보심이 한도 없다. “내가 너를 들의 풀 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여전히 벌거벗은 알몸이더라.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16:7-8).” 굳이 실망도 낙심도 없이 허탈할 뿐이었다. 그야말로 나 하나 바로 건사하며 주 앞에서 온전하기를 바라는 게 소망이다. 그러니 나는 저들보다 나은가?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32:1).” 주가 나를 가리셨으므로 나는 나의 죄책으로부터 더는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것이지, 여전하여 언제든 불쑥 이는 열등감에 자격지심은 속수무책이다.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제풀에 시무룩하기 일쑤고 그렇게 내가 사람의 눈치를 본다. 의연한 척 굴지만, 주의 자비로만이 가려질 수 있는 것이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4:4-8).” 마치 저들 선교사들은 그리 대접받기를 원하였고 의당 그러한 대접을 받아도 된다고 못되게 굴었던가보다. 어쨌든 돈이 한두 푼도 아니고 또 법적으로 그 명의를 어찌 정리하는 데 있어 고소와 사기가 이어지고, 급기야 집 장사 하듯 헐값에 팔아넘기고 손을 뗀 꼴이었으니! 내가 일한 것에 대한 자기 몫의 삯을 바라는 마음에는 은혜가 없다. 그러게, 내가 얼마나 열심히 주를 위해 일했는데! 의당 이 정도 대접은 받아야지, 싶은. 참으로 가관이라! 대충 알만하다. 그러니 내가 참 평안하구나! 나는 저절로 그런 고백이 나왔다. 한 게 없으니 주장할 것도 없고, 목사가 된 것도 거저, 저절로 이루어 여기까지 오게 하신 일이니 내 직함을 내세우며 한가락 할 주제도 못 되고, 목회랍시고 하고 있으나 이게 다 주의 은혜라. 내가 하는 게 하나도 없어 나는 도리어 송구하고 민망할 따름이니, “하나님은 그의 권능으로 높이 계시나니 누가 그같이 교훈을 베풀겠느냐(36:22).”

 

나는 그래서 누가 뭘 좀 한다고 하면 그게 그렇게 위태로울 따름이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자신을 내세우며 그 지분을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여기까지 내가 어떻게 왔는데? 심지어 하나님이 나한테 이러실 수 있어? 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면 더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 하신 걸 자꾸 까먹는다! “여호와께서 낮에는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는 불로 밝히셨으며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를 가져 오시고 또 하늘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셨도다(105:39-40).” 어디다 자신의 공로를 운운하려 하는 것인지! 하나님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결코 양보하지 않으신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65:1-3).” 노년에 목사들이 또는 선교사가 일생으로 어찌 얼마나 헌신하고 희생하며 살았는지는 고개 숙인 각도에서 가늠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여러 줄의 이력을 가지고 다니는 목사를 선히 여기지 않는다. 어디서 무슨 자리를 했는지를 그처럼 스스로 새겨 내세워야 하는 정도이면 별 수 없다.

 

오늘 본문은 이를 지적한다.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언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26:13).” 주의 목소리를 청종하려는데 내가 말을 하여서야 들릴 리 없고, 그러니 오늘 시인은 간곡하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62:1).” , 입 좀 다물자는 소리다. 부디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자. 누가 뭘 하자, 뭐라도 해라, 하고 말할 때 나는 더욱이 이 말씀을 되뇐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2).” 특히 사람 볼 거 없다. 나 자신은 말할 것도 없다. 안 하면 마는 거다. 안 들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저를 탓할 것도 없다. 저도 저 스스로 안 되는 것일 테니,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할 뿐. 주가 하신다. 주가 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5).” 시인은 연거푸 강조한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8).” 사람으로 살아보니 사람보다 악한 것은 없다. “,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9).”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10).” 이는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11).” 그러므로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