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전봉석 2020. 7. 26. 06:12

 

너희는 너희 선지자나 복술가나 꿈꾸는 자나 술사나 요술자가 이르기를 너희가 바벨론의 왕을 섬기게 되지 아니하리라 하여도 너희는 듣지 말라. 너희는 그들의 말을 듣지 말고 바벨론의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살리라 어찌하여 이 성을 황무지가 되게 하려느냐

예레미야 27:9, 17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시편 63:3

 

 

묵묵히 주신 상황에 순응하는 것. 무엇을 더 애쓰고 수고하여야 한다는 식의 자기 노력이 숭상이 되지 않기를. 목사나 누구도 결국은 사람이라, 저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것이지 저의 지도력이나 영력을 따르는 게 아님을.’ 나는 누구와 통화하면서 그리 생각하고 메모하였다. 저의 특징은 늘 바쁘고 분주하다. 오전에 일찍 전화하겠다고 하더니 점심때가 다 되어 연락이 왔다. 그것도 무슨 일 처리를 하면서 하는 것이라 오히려 내가 집중할 수가 없었다. 다들 믿는 사람이나 그 형태가 각각이라 신봉하듯 따르던 교회 목사님이 시내에 있는 큰 교회로 다니라 해서 그냥 큰 교회로 다니고 있다는 소리에 갸우뚱했다. 전후사정을 묻지 않았으니 뭐라 할 말은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가끔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보다 말씀이 더 쉽다.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란 저의 온 생을 가름하는 일이어서 섣불리 뭐라 할 수도 없고 그리 여겨 판단하기도 옳은 게 아니다. 엄연한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복되다는 것.’ 그럼 그게 무얼까? 주신 대로 묵묵히 주의 뜻을 헤아려 순응하는 것. 순응이란 그 상황에 맞추어 부드럽게 대응하는 것이다.’ 이를 성경은 온유함이라고 하신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5).” 그 땅은 여기서 주어진 현실이며 내세에 들어가 누릴 영광이다.

 

순응에 있어 오늘 말씀은 들을 말과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분별하게 한다. “너희는 너희 선지자나 복술가나 꿈꾸는 자나 술사나 요술자가 이르기를 너희가 바벨론의 왕을 섬기게 되지 아니하리라 하여도 너희는 듣지 말라.” 어떤 원리와 원칙이 우리의 갈피를 어지럽게 할 수 있다.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실제 우리 생활에서 우리와 같이 활동하신다. 성경은 일러 너희는 그들의 말을 듣지 말고 바벨론의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살리라 어찌하여 이 성을 황무지가 되게 하려느냐.” 하시며 오히려 주어진 상황에 충실할 것을 말씀하신다(27:9, 17). 듣기 좋은 말로만 하는 위로나 권면이 최악이고 원리 원칙을 따져 율법주의자처럼 내모는 말이 그 다음이다. 나는 저의 말 중에 목사님이 이제 시내 큰 교회에 다니라고 하셔서 벌써 꽤 됐어, 시내에서 제일 큰 교회로 다니는지!’ 하는 소리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 것인지. 나름의 사연이 있었겠으나 본래 병 고침이나 신유의 은사로 맺어진 관계는 다소 주종관계처럼 된다. 아내가 죽을 정도로 아프고, 실제 죽고 싶어 할 때 만난 교회이고 목사라, 그의 기도 받고 나음을 입었다고 하는 소릴 아주 예전에 들었다. 그게 동기가 되어 저 또한 믿음이 생겼고 주와 함께 하는 생활이 되기도 한 것이니. 여러 모로 추측을 하다 그만두었다.

 

상대적으로 누구와의 통화에서는 저의 나른한 오후 같은 생이 오히려 또 저의 영혼을 아둔하게 하고 있음을 알았다. 전에 내게 부탁하려던 조카 녀석은 기어이 또 교도소에 들어간 것 같고(?) 가족들도 오히려 그게 더 안심이 된다고 하는 소릴 하니까, 내가 뭐라 할 말은 없었다.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코로나로 인해 교회를 가는 것도 아니고 안 가는 것도 아니고, 이번 주에도 꼭 가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어쩔까 하고 있는데, 오후에는 기타 치는 언니들 만나고 월요일에는 도자기를 나가고아이들 가르치는 일은 목요일 하루만 하고, 그럼 생활은 어찌 하는가? 물었더니 같이 사는 이가 벌어오는 것으로그럭저럭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나른한 오후처럼 사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또한 믿는다는 사람이라 나름은 믿는데 뭘 믿는다는 소린지! 서울 시장의 자살과 경기지사의 정치행보에 그처럼 열을 올리며 지지와 응원을 퍼부으면서 정작 자기 영혼의 나른함에 대하여는 전혀 문제의식이 없다.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하는 것이 순응은 아니다. 순응은 그와 같은 환경과 여건을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가장 강한 순종이다. 오늘 시편의 말씀은 이를 일깨운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63:3).”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주의 인자하심을 찬양하겠다는 소리다.

 

어쩌다 두 친구와의 통화에서 내게 더하시는 교훈이 컸다. 마치 이를 보란 듯이 다른 한 친구와는 돌아오는 월요일부터, 오전 7시 함께 성경모임을 하기로 하였다. 그런 시간을 사모하기도 하였고 마음이 그리 기울고도 있었는데 서로 만날 수 있는 시간도 여의치 않아 망설이던 중이었다. 그런데 오전 6시 반, 7시면 교회에 나가면서 혼자 있는 시간을 만끽하고부터 저를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이해하는 순응은 이와 같은 상황이나 여건이 주어질 때까지 하나님은 쉬지 않고 물밑 작업을 다 해 두신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다. 가령 내게 두시는 아픔도 질병도 괜한 게 아니다. 우리 형편의 어려움도 어쩌다 그리 된 게 아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셨고, 하나님은 여전히 조성하신다. 가장 좋은 환경과 여건이 무르익으면 나의 마음은 물론 누구의 마음도 여시고 관여하신다. 아침에 그렇듯 와서 같이 성경모임을 가지고 싶다는 저의 말에 나는,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생명보다 귀하고, 이를 내 입술로 찬양하겠다.’는 시인의 고백이 내 것이 되었다. 해보는 거다. 하다 어찌 하실지 알 수 없으나 그건 그때 가서의 일인 것이고! 어쨌든 하나님은 선하시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5).” 나는 다만 권하고 전하고 내가 그리 살려는 것뿐이지, 다른 관여는 가당치않다.

 

하나님이 아신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1:17).” 난들 저들 속을 어찌 알겠나?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시절이라, 친구들에게도 부디 너 하나 신앙 온전히 믿음 안에서 바로 지키게 해달라고 기도해라, 나는 당부하였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하여는 우리의 이해와 상식을 초월한다.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30:4).” 특히 오래 된 친구들과의 모처럼 대화에서는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을 알았나? 몇 년 전 함께 어울려 세상모르고, 하나님 두려워할 줄 모르고 살던 시절을 돌아보면 아찔하기만 하다. 한데 하나님은 산의 무게도 달아보신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 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40:2).” 그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안다면, 저가 오늘 내게 조성하시는 삶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나? 주어진 삶에 감사뿐이다. 다만 우리는 그 주를 힘입고 사는 것일 뿐!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17:28).”

 

때론 그것을 분간할 수도 없고 무엇을 어떻게 판단하고 선택할 수 없이 미세한 소리가 전부라 해도,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26:14).” 우리가 미처 알 수도 없는 하나님의 세계에서 그러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유일한 자세는 순응이다. 이 모든 것을 더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 그 확신은 내 뜻과 달리 나를 죽이신다 해도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생명보다 나음이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48:9).” 돌아보면 오늘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뿐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13:6).” 나는 친구들에게 부디 환경 탓, 남 탓, 정치 탓 운운하지 말고 자신의 믿음 온전히 지키며 살기를,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그러니 다른 무엇을 찾아 구할까?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113:4-9).”

 

그 주의 보응은 따로 정해져 있다. 그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26:12).” 말씀 앞에 가만히, 오직 주만 바라고 의뢰하는 것이 순응이다. 고로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63:1).” 주를 앙모함으로 이를 알게 하신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