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스스로 속여 말하기를 갈대아인이 반드시 우리를 떠나리라 하지 말라 그들이 떠나지 아니하리라
예레미야 37:9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시편 73:23
주가 얼굴을 가리시면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를 얻을 길 없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21-22).” 오늘 시인은 주를 바란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23).” 욥은 그 두려움에 대하여, “주께서 침묵하신다고 누가 그를 정죄하며 그가 얼굴을 가리신다면 누가 그를 뵈올 수 있으랴 그는 민족에게나 인류에게나 동일하시니 이는 경건하지 못한 자가 권세를 잡아 백성을 옭아매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욥 34:29-30).” 연일 쏟아지는 폭우로 산사태가 나고 불어난 강줄기가 휩쓸고 지나가는 것을 보면 얼마나 겁나는 일인가? 그 앞에서 하찮기 그지없는 사람으로 서는 일은 겸허하게 한다. 하루아침에 집과 산지를 잃고 망연자실한 어느 촌락민의 실음어린 하소연을 보면서, 어느 훗날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때에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모습을 상상하면 등줄기가 오싹해온다. 그야말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에서, “그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갑자기 너를 엄습하며 어둠이 너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홍수가 너를 덮느니라(22:10-11).” 욥의 기록은 함의하는 바가 크다. 다른 해변에서는 이 와중에도 어디 클럽 밤샘축제에 입장하려 길게 줄을 선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뭐라 한들, 그러니 말씀 앞에 온전함이란 바로 두려워할 줄 아는 경외함이 아니겠나?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내가 젊었을 때에 지은 죄를 내가 받게 하시오며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점검하시나이다(13:26).”
혼자 있는 시간이 많으면서 나는 주를 바라는 마음의 소중함을 더욱 여실히 느낀다. 우리가 의지하고 바라는 것들의 허상이 끔직하기만 하다. 갈대아인의 도움을 구하고 애굽의 등살에 굽실거리다 바벨론에게 당하고, 이리저리 주변국들에게 시달림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스스로 속여 말하기를 갈대아인이 반드시 우리를 떠나리라 하지 말라 그들이 떠나지 아니하리라(렘 37:9).” 그 또한 애국애족이라 여겨 여러 갈래의 진영논리와 다툼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이처럼 주의 부르심은 고귀하고 영광스럽기만 하다. 이를 듣고 부르심의 작정된 자는 믿는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38).” 아예 상관없이 지음 받은 자들이 있고 부르심에도 거절하는 자들이 있으며 어떠하든 강권하심으로 붙들어 주시는 자도 있다. 말씀을 이리저리 보다 보면 내 안에 이는 알 수 없는 감정과 믿음은 놀랍기만 하다. 어찌 이러한 말씀에서 아멘, 하고 감사가 나올까? 더는 세상을 구하지 않으려하고 저들을 부러워하다 또 미끄러질까 조심하게도 되는데,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 73:2-3).” 이 짓은 사는 날 동안 되풀이 되는 어리석음이겠으나, 주의 부르심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실 것을 확신한다. 여기까지 그러하셨고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을.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행여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시면 그보다 더 끔찍하고 두려운 일은 없다.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 마침내 너를 멸하리라(신 28:24).” 늘 모래를 입 안 가득 물고 사는 사람들처럼 고역도 그런 고역이 없다.
사는 게 일이라. 종종 누구와 통화하면 저는 늘 하나님께 억울하다. 하라 해서 학위도 따고 그처럼 주의 종들도 섬겼는데 어찌 나에게 하나님은 이리 갚으시는가, 하는. 마치 은혜의 주객이 전도된 듯 한 저의 말을 듣다보면 뭐라 해줄 말이 없어 답답할 뿐이다. 누구는 이런데도 잘 살고 누구는 저런데도 일이 잘만 풀리는데, 나는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은 내게 이러실 수 있어요? 하는 저에게 나는 몇 번이나 오늘 본문 시편 73편을 읽어보라 권했던 것 같다. 일 년에 몇 번씩 성경통독을 하고 아직 어린 자식 둘도 벌써 성경을 몇 번 읽었네, 하며 자랑은 하는데…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열어주지 않으셨는지. 그런 거 보면 복음도 구원도 보편적인 게 아니다.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딤전 1:9-11).” 말씀이 나를 불러 세우지 못하고, 그 교훈이 나를 때리지 못하고, 돌이켜 주를 바라게 할 수 없다면 그가 그토록 열심을 다해 믿는 저의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가끔은 저의 열심보다 불쌍한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의 믿음의 수고를 삯으로 받으려 드니.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무엇으로 우리가 은혜의 값을 할 수 있다고!
그러할 때 주어지는 고통이 오히려 은혜라. 그것으로 주를 부르고 바랄 수 있어 자신을 돌이켜 주 앞에 세우시는 주의 강권하심이 특별하신 거였다. 아무나의 일이 아니다. 기어이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을 드러내신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그러니 나는 참 복 있는 사람이라. 어제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였다. 전날에 비해 허리가 좀 덜 아프고, 마음은 덜 어려워, 조금은 편히 앉아 새로 주문하여 온 유진 피터슨의 <사복음서 설교>를 읽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하였다. 나도 모르게 이런 데 자꾸 손이 간다. 이제 교회 재정을 분리하여 내가 직접 관리하며 장부 정리를 하기로 하면서 책 한 권을 사는 데도 몇 권을 찾아서 한참을 고르다가 모처럼 한 권을 샀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러고 있는 내 자신이 신기한 것이다. ‘이런 책’에 자꾸 손이 간다. 존 번연이나 칼빈 같이 흔히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신앙의 토대에 자꾸 손이 가는 게 이상한 것이다. 칼 바르트니 니버니 하는 소위 현대 신학자들의 폼 나는 이론보다 곧이곧대로 말씀으로 말씀 앞에서만 살아가려 했던 ‘고전’이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이 말이다. 그러다 누구의 사복음서 설교도 생각보다 군더더기 같은 자기 말이 너무 많아서 실망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나는 언제부턴가 성경을 많이 옮겨 적고 자기 생각은 적게 말하고 그 말씀 한 구절, 한 어휘로 씨름하는 이들의 묵상이나 설교, 사고의 고투가 감명 깊다.
그래서 그런가, 어제는 설교 원고 초안을 작성하다 쓸데없는 내 말은 다 빼고 그냥 성경만 여러 번 같이 읽고 또 읽고 하면 참 좋겠다하는 생각을 문득하였다. 우리가 복음만을 간직해야 하는 뚜렷한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 구구한 사연의 이런저런 논쟁이나 주장은 다 쓸모없고, 것도 아무리 중요한 의미라 해도 그림자 같은 것이니 정작 그 몸의 주체는 그리스도시라.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 했던 다른 말이 말씀보다 크게 들리고 오래 남는다면 이보다 더 불미스러운 선포가 어디 있겠나? 전날에도 묵상했던 것처럼 개인의 체험이나 특별한 은사가 정작 하나님의 뜻과 은혜보다 더 귀하고 강하게 다가온다면 그 무슨 헛수고일까?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자주 헛발질을 해대며 똥볼을 차곤 하는지 모른다! 오히려 주의 입에서 나온 검 같은 말씀은 무섭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 2:16).” 기껏 살뜰히 챙겨 포인트도 적용하여 아껴서 여러 권 중에 한 권을 우선 샀는데, 생각보다 너무 목사의 말이 길이서 실망했다. 그걸 또 그리 느끼며 아쉬워하다 그러고 있는 내가 이상하고 희한했던 것이다. 이런 책에 자꾸 손이 가고, 그 가운데서도 점점 더 고리타분하게 빤한 내용일 것 같은 번연이니 칼빈이니 어거스틴과 같은 이의 고전을 더 찾고 있다니! 것도 팔 할은 성경을 그대로 옮겨 적어 인용한 것을 더 선호한다. 점점 이상한 나의 독서에 피식, 웃음이 났다.
하나님에 대해서 말고 하나님을!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시고, 어떠하신가 말고 그 자체로! 말이 되는 소린가 모르겠는데 전해 듣는 말로 말고 직접 듣고 싶은 욕심이 자꾸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어땠다거나 그래서 인생살이가 좀 나아졌다거나 하는 따위의 말에는 점점 더 관심이 없어진다. 선생은 누가 쓴 ‘사후생’과 ‘죽음의 연구’ 따위를 출판하여 보내왔다. 목차와 저의 앞머리를 조금 읽다 던져두고는 다시 손이 가지 않는다. 죽었다 살아난 이야기나 살아서 죽음 너머의 체험 따위로 사람을 현혹하려 드는 그 따위 내용에는 관심이 없다. 사실이니 아니니 하고 논하는 것 자체도 부질없다. 그러든가 말든가, 정작 중요한 것은 오늘 시편의 고백 같은 것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73:24-25).” 다른 그 무엇도 사모할 게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28).” 이보다 더 값지고 신나고 즐거운 일이 또 있겠나? 누가 뭐래도, 그래서 나는 오늘 나의 불안증과 신경쇠약을 사랑한다. 쓸데없이 기웃거리며 다른 데 용기 낼 수 없는 나의 소심함에 감사한다. 그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를 바라고, 주께 도피하는 수준이라면 나는 나의 비겁함도 사랑한다. 남들의 조롱이나 한심하게 여기는 따위의 관심에는 관심도 없다. 좀 웃기는 소리지만 어제는 아무도 안 만나고 거의 혼자 앉아 그렇듯 설교 원고를 작성하다, 누구의 책을 뒤적거리며 보다, 그러한 소소함이 가장 귀하고 복된 것에 놀라워하였다.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더는 질투하지 않기로 하면서부터 달라진 것이다. 그들이 잘 되고 잘 되는 일이야 말해 뭐하겠나?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4-9).” 해도 해도 끝이 없다. 그래서 부러워한들? 갈대아인이 도움인 줄 알았다가 바로의 도움을 받고, 애굽인가 하였다가 바벨론에게 당하기 일쑤인데… 주변 강대국들의 등살에 못 견뎌하는 까닭은 어느 쪽에 붙어 도움을 바랄까, 하는 것 때문일 텐데. 보면,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시 73:12).” 그러니 종종 허탈함에 빠져,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13).” 그런 마음이 들만도 하겠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7).” 반드시 깜깍 놀랄 것이다.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19).” 그러니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23).” 이와 같이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24-25).”
곧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26).” 그리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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