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가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시키시더라
에스겔 3:14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
시편 96:10
태풍이 지나가고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새벽이다. 전염병은 창궐하고 사람들은 강퍅하며 저마다의 주장으로, 고스란히 우리의 악함은 드러나는 듯하다. 가만히 말씀을 끌어다 안고 여러 생각에 젖곤 하는데, “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가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시키시더라(겔 3:14).” 이는 오늘 나만의 일이 아니고,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시 96:10).” 하나님의 엄위하심이 새삼 두렵고 떨림으로 다가온다. 이쪽 말은 이래서 강하게 주장할만하고 저쪽 말은 또 저래서 강하게 주장할만하다. 서로가 양보 없이 치닫는 상황에서 나는 주의 살아계심을 여실히 되새긴다. 주님의 세계라.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13).” 어둠이 깊을 때 빛이 더욱 강렬한 것처럼, 사람들의 죄악 됨이 짙을수록 주의 선하심을 확신할 수 있다. 가장 큰 은혜는 여전히 죄인의 몸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이미 의롭다 하신 주의 은혜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오늘 일련의 사태는 주의 은혜를 찾을 기회다. 사람의 악함을 자꾸 되짚을 필요가 없다. 이 땅은 노아의 때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때나 여전하고, 사람들의 악함은 전혀 달라진 게 없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4:25).” 곧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러니 나는 이제 의로운가? 여전히 죄악 된 몸을 입고 산다. 쉴 새 없이 염려와 근심은 나를 쥐고 흔들고 그럴 때마다 자구책으로 나의 혈기와 악함은 앞서 달려나간다. 그럼에도 주가 나의 죄를 가리시고 나를 자녀로 붙드시는 일이었으니… 아담의 경우 저는 범죄 한 후 스스로 숨어 은폐하고 가리어 주의 낯을 피하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저를 먼저 부르시고 찾아오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저가 스스로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지어 입은 옷을 벗기시고, 가축을 죽여 그 피를 모두 뽑은 후에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셨다. 그리하여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내가 당해야 할 고통을 전가하시고 나는 다만 속량하심으로 새 옷을 덧입었을 뿐이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그러므로 내가 주장하고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다.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고 자기주장을 앞세우며 이를 합하여 세를 과시하는 오늘의 적대관계들 앞에서 나는 안타까울 뿐이다. 또 한 사람, 아벨을 묵상할 수 있다. 저는 일찍이 형의 손에 죽은 인류 첫 번째 살인의 피해자다. 표면적으로는 슬프고 잔인한 결과이나 저를 통한 교훈은 크다. 가인도 제물을 드려 제사를 지냈으나 아벨은 제사 전에 자신을 드렸다. 그 차이는 엄연하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창 4:4).” 문맥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벨이 먼저 드려지고 제물은 부수적으로 드려진 것을 알 수 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4).” 예물이 증언한다? 제단 앞에 드려지니 예물은 거룩하게 되고, 성전에 올려지니 금은 더욱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마 23:16-22).”
한국교회가 대면예배를 잠시도 멈출 수 없다는 주장은 성경이 가리키는 예배와 예물과 참된 헌신-맹세의 의미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서 드러내는 난맥상이다. 분명한 사실은 아벨이 먼저 받아들여졌다는 사실! 저의 예배는 대면이든 온라인이든 믿음으로였다는 것! 믿음은 다만 할 일을 하게 할 뿐이지, 하는 일로 믿음의 가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의롭다 하심으로 우리의 행실이 나아지는 것이지 우리의 행실이 나아짐으로 의롭다 하시는 게 아니다. 믿음으로 먼저 자신이 드려지는 것이지 드려놓으니 믿음이 있다 일컬음을 받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어제 대통령과 기독교계 원로들의 만남을 보도로 보면서 답답함을 느꼈다. 지금 교회가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는 듯도 하였다. 대통령이야 저가 무얼 믿든 어떤 사람이든, 주가 이 시대에 세우신 것이고… 나는 그보다 교회가 자성의 목소리를 내고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어 그 의미와 목적이 최소한 대통령의 목소리보다 성경적이고 말씀을 중심으로 드러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시국에 파업을 강행하는 전공의들이나 교계의 자기주장이나 참으로 다들 자가당착에 빠졌다는 생각을 한다. 주장에 앞서 사명이다. 의사가 사명감을 잃으면 일개 직업군이다. 목사가 부르심을 잊으면 일개 삯군이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 성경의 가장 큰 명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 25:23).” 우리의 택하심은 무슨 선이나 악행에 앞선 결정이다. 행위나 존재의 이유로 된 것이 아니다. 솔로몬이 여느 형제들보다 주의 사랑을 받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저에게 특별한 은혜와 은총을 부어주심도 저의 탁월한 성품과 놀라운 희생이나 지략으로가 아니다.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선지나 나단에게 일러 저를 ‘여디디야’라 하셨다.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삼하 12:24-25).” 여디디야는 여호와의 기쁨, 사랑하시는 자, 주의 사랑을 입은 자이다. 저가 뭘 했다고? 다만 주의 그 기쁨으로 오늘의 내가 있다. 이와 같이 말씀이 전하여주는 말씀 앞에서 나는 다만 놀라워한다. 주의 은혜라. 주의 극진하신 사랑하심이다. 비록 추하고 더러우나, ‘너는 피투성이로 살라!’ 나는 주와 말씀을 나누는 내용이 깊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겔 16:6).”
어쩌면 그저 추하고 못난 것을 어쩜 그리도 사랑하신 것일까? 아직 씻기지도 않고 강보에 싸이지도 않았고 자기 의사표시도 제대로 못하며 발버둥치는 것을,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8).” 이런 사랑이 말이 되나? 그러니 가장 난해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은 하나님이 왜, 하필, 나 같은 자를 주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러하시기까지 온갖 수모를 다 겪으시며, 그 값으로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내어주시기까지 한 것일까? 내가 뭐라고! 이 한국교회가 뭐라고! 선조들이 피땀 흘려 세운 교회여서? 여느 믿음의 나라들 보다 나은 선을 행하고 의를 바라는 교회들이더 많아서? 이 모두보다 앞서는 것은 주의 사랑이다. 우리는 그 사랑을 알기에는 지식이 부족하여 넘친다. 넘치는 지식으로는 주의 사랑을 다 다 헤아릴 길 없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하나님은 에스겔에게도 말씀하셨다.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노라.’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6:8).”
위대한 지도자 여호수아는 여전히 더러운 옷을 입고 주 앞에 섰다.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슥 3:3).” 사탄은 이를 빌미삼아 ‘그슬린 나무’ 같이 들추어 그를 정죄하고 고소한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2).”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호수아를 감싸신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4).” 누가 뭐라 하든지, 율법의 정죄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보다 넓을 수 없고, 길이보다 길지 못하며, 깊이보다 깊지 않고, 높이보다 높지 않다. 곧 이 시대의 죄가 아무히 노아의 때와 같다 해도, 그 죄가 한도 끝도 없이 넓고 깊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그 모든 것을 감싸고 남을 정도로 넓고, 깊다.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5).” 그러니 그러한 주의 사랑이 가인의 눈에는 불공정할 수밖에. 에서는 늘 야곱을 두고 억울할 따름이다. 그렇게 사탄은 늘 우리를 괴롭히고 하나님께 정죄한다.
오늘 말씀을 나는 그런 각도에서 묵상하였다. “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가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시키시더라(겔 3:14).” 이 큰 주의 은총을 무엇으로 보답할까? 더는 감사뿐이다.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시 96:10).” 이 모든 일의 결정은 이미 정해졌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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