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전봉석 2020. 8. 29. 06:04

 

 

너 인자야 토판을 가져다가 그것을 네 앞에 놓고 한 성읍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고 그 성읍을 에워싸되 그것을 향하여 사다리를 세우고 그것을 향하여 흙으로 언덕을 쌓고 그것을 향하여 진을 치고 그것을 향하여 공성퇴를 둘러 세우고 또 철판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벽을 삼고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

에스겔 4:1-3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시편 97:12

 

 

앞서 3장까지는 에스겔에게 소명을 부으시는 내용이었다면 오늘 4장의 말씀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각각의 범죄한 날을 계수하여 그 고통을 계수하신다. 북이스라엘은 390일 동안이고 남유다는 40일인데, 하루를 1년씩 쳐서 40, 그렇게 하면 도합 430년 범죄한 것을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물론 날마다 범죄한 일수에 포함시켜도 무방할 정도이다. “내가 그들의 범죄한 햇수대로 네게 날수를 정하였나니 곧 삼백구십 일이니라 너는 이렇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고 그 수가 차거든 너는 오른쪽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라 내가 네게 사십 일로 정하였나니 하루가 일 년이니라(5-6).” 하긴 하루도 빠짐없이 죄를 일삼고 살았던 저들로서는 할 말이 없는 셈인데, 이에 죄악을 담당하라는 말씀 앞에 숨이 막힐 것 같다. 죄는 우리로 벙어리가 되게 한다. 할 말이 없게 만든다. 그러니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어찌 담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54:7-8).”

 

누가 전화를 하였다. 두려움에 살 수가 없다는 하소연이다. 저가 사는 아파트 1층에서 고령의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는데 병상을 기다리다 하루만에 죽었다. 2층에도 확진자가 있어 격리되었고, 저는 광화문집회에 참석한 이였다. 3층과 7층에 1층 사망자의 자녀들이 몰려 사는데, 죽은 이를 두고 역학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집은 6층이라 격리 아닌 격리가 된 상태였고, 부부는 회사도 재택근무로 돌리기는 하였으나, 초등학교 1학년 다니는 쌍둥이아이들이 걱정이라. 엎친 데 덮친다고 친정엄마는 이 와중에 미끄러져 엉치뼈가 금이 갔고, 전공의들의 파업으로 전전긍긍하다 우선 입원수속을 하게는 되었다고 하면서하소연 끝에 돌아오는 말은 기도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왜 자꾸 자신들에게만 이런 일이 겹쳐오는 것인지, 남편 집사는 간신히 목 디스크를 견디고 있는데 허리 디스크가 터져 얼마 전 시술까지 하였고, 며칠 출근을 하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집에서 재택근무를 한다고 하는데, 평소 몰랐던 잔소리 잔소리가 끝도 없다는 것이다. 해도해도 끝이 없는 집안일에 자기 일도 밀려 밤을 지새우기 일쑤인데,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물어도 답이 없는 것 같다고 죽는 소릴 하였다. 다들 난리라. 원주 어디 초등학교 선생으로 있는 친구는 학교들도 비상이라 재택근무가 실시 중인데, 오히려 할 일이 더 많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며, 그러는 중에 주를 더욱 의지하며 동행하고는 싶은데 꾸역꾸역 억지로 끌려가는 것도 힘들다며 장문의 카톡을 보내왔다. 그리고 우리 아픈아이는 형이 같이 집에 있는데도 불안을 느끼며 횡설수설 말을 오래하다 끊었다. 나 역시 숨이 터질 것만 같아 진정제를 겹쳐서 먹었다.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사탄들의 공격이 펼쳐지고 있는 것 같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5:3-5).” 마치 오늘 날 광적으로 가짜뉴스를 생산하고 병상에서도 헛된 망상으로 국가와 방역 체계를 공격하는 일부 극우세력들의 행태와 같다. 같은 사안을 두고 의료진들의 반발도 극렬하다. 이를 보며 누구는 정권을 탓하고 누구는 무책임한 정공의들을 비난한다. 서로의 말은 불꽃을 틔기며 부딪치고 한 치 양보도 없이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치닫는 형국이다.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8:27).” 누가 저들을 제지할 수 있겠나. 기어이 폭동이 일어나고 전염병은 창궐하며 사람들은 악에 받쳐 덩달아 교회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목사님, 안 그래요? 교회가 좀 너무 한 거 아니에요?’ 하고 옆 사무실 노인은 공격적인 말투로 내게 시비를 걸듯이 물었고, 나는 다들 미쳤다는 소리로 얼버무리며 그와의 자리를 피했다. 분출하는 분노는 그 대상을 무분별하게 찾고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 다들 악에 받쳤다. 터진 입을 다물 줄 모르고, 정부를 비난하거나 교회를 욕한다.

 

이런 가운데 옥석은 가려지고 소명은 부여된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5:18-20).” 가만히 주시는 말씀으로 순종하는 삶이란 복되다. 앞서 저는 귀신들린 자였다. 주체할 수 없는 자기 성질로 모두를 괴롭히던 자이다. 주의 권능은 도무지 선할 수 없고 악하기 그지없는 자를 이처럼 돌이켜 선으로 인도하신다. 그러하다면 똑같은 은혜인데 누구에게는 한없이 크고 한량없고, 누구에게는 번번이 사소하고 별 거 아닌 듯 여겨진다. 여기 그 둘의 사례가 있다.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7:41-42).” 나는 그 금액의 정도보다 이를 실감하는 개개인의 차이로 본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다. 사랑의 빚을 졌다. 이를 크게 여기는 이가 있고 별 것 아닌 듯이 여기는 이도 있다. 누구는 이런 일련의 사태에서 그러므로 더욱 주를 의지하고, 이는 그가 세우신 정부를 신뢰하며 방역수칙에 따라 협조한다. 하지만 누구는 진영논리에 갇혀 편을 가르고 상대를 비난함으로 자신의 우월함과 그 주장을 굽힐 줄 모른다. 여기서 나는 왜 자꾸 빨갱이가 운운되고 좌파, 주사파 하는 사상논쟁으로 치닫는지 어렵다. 전염병의 창궐함과 방역에 사투를 벌이는 일에 좌우, 부자와 가난한 자가 구분이 없을 텐데.

 

나는 그래서 한 목사의 묵상 글을 되새기며 이를 내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성경의 근거를 가지고 다시 묵상하였다. <부산샘터교회 안중덕 목사가 쓴 글을 읽고 공감하여, 이를 좀 더 성경적인 근거로 되새겨본 것이다. ‘마스크를 쓰라는 것은 당분간 입을 다물고, 막말을 금하며, 남에 대해 헐뜯고 증오하는 것을 멈추라는 것이다.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30:32).” 또한 손을 자주 씻으라는 것은 자신을 청결히 하고, 주 앞에서 늘 온전히 하라는 소리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73:13).” 그리고 서로 간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라는 것은 우리가 너무 사람을 의식하며 살았던 것에 거리를 두고, 오히려 무심하던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아 내밀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껴보라는 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29:25).” 이어 당분간 교회들의 대면 예배를 금지하라는 것은 그간 형식적이고 무책임하게 모이고, 습관적이고 수동적으로 드려졌던 예배를 회개하고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참 예배를 회복시키라는 것이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4:23).” 그밖에 불필요한 만남이나 모임을 피하고, 지역 간의 이동을 자제하라는 것은 그만큼 끼리끼리 모여 즐기던 것을 멈추고 그동안 돌아보지 못했던 내 곁의 소외된 이웃과 마음을 나누라는 것이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10:24-25).”>

 

모두가 죄인이다. 목사도 예외가 없고 교회도 배제될 수 없다. 이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4).”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신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5:20).” 정작 그 당사자인 중풍병자보다 저를 들춰 주 앞에 데려온 이들의 믿음이 귀하다. 비록 죄사함은 모르겠고, 병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예수의 예수 되심을 듣고 나온 이들었다. 그렇게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65:1).” 이를 바울은 같은 의미로 설교하였다.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10:20-21).” 오늘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손을 벌리고 계심을, 일련의 고통과 재난을 통해 실감한다. 아침에 일찍 성경공부로 오는 전도사와의 대화에서도, 나는 그리하여 순종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 다만 주님이 오신 까닭은 잃어버린 자를 찾고자 하심이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10).”

 

일련의 사태에서 나는 그리 양극화되어가는 것을 목격한다. 빈부격차는 물론 사상도 주장도 믿음도 신앙도 모두 양분화되면서, 누구는 진실로 주를 바라고, 누구는 더욱 주의 행하심을 회의한다. 누구는 비난의 대상을 찾고, 누구는 감사를 배우고 순종을 익힌다. 고난을 통해 누구는 순종을 배우고 누구는 허투루 자기주장에 도취된다.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의 범죄와 저들의 자초한 고통은 모형이다. 오늘은 이를 일깨우며 이우성친다.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확실한 것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97:10).” 하는 오늘 시편의 일갈이다. 안 믿는 저들과 다를 게 없는 관점에서 정부를 비난하고 교회를 욕하고 정권을 흔들어댄다면, 너는 또 왼쪽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짊어지되 네가 눕는 날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지니라(4:4).” 나는 이러한 오늘 말씀이 두렵다. 왼쪽을 보고 북이스라엘 편에 설 것인가? 오른쪽으로 누워 남유다가 좀 더 낫다고 두둔할 것인가? “그 수가 차거든 너는 오른쪽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라 내가 네게 사십 일로 정하였나니 하루가 일 년이니라(6).” 문제는 누구도 이를 담당할 힘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양쪽 다 고통뿐이라. “떡과 물이 부족하여 피차에 두려워 하여 떨며 그 죄악 중에서 쇠패하리라(17).” 

 

이런 와중에도 신앙을 고백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묵묵히 주어진 삶을 다하는 성도들도 있다. 세상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3:13-18).” 그러니 너희는 어쩔 것인가가 아니라, 나는 어쩔 것인가? 오로지 믿음뿐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바라볼 뿐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22).” 그러니 누군들 여기서 무얼 자랑하고 자부하며 자신은 옳다 말하고 버틸 것인가?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27).” 나는 나의 연약함과 죄악됨을 주께 아뢰며 주의 긍휼하심만을 구할 뿐이다. 그러할 때 오늘의 시편의 말씀이 강한 의지가 된다.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97:11).” 그러므로 이를 아는,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