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을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가라앉으리라 내 분이 그들에게 다한즉 나 여호와가 열심으로 말한 줄을 그들이 알리라
에스겔 5:13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은 박수할지어다 산악이 함께 즐겁게 노래할지어다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시편 98:8-9
일련의 사태는 주의 말씀이다. 종종 ‘하나님이 어찌 이러실 수 있지?’ 하는 의문이 드는 일도 실은 다 사람이 저지른 일들 때문이다. 그 마음에 평안이 없다.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4-18).” 곧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을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가라앉으리라 내 분이 그들에게 다한즉 나 여호와가 열심으로 말한 줄을 그들이 알리라(겔 5:13).” 이를 통해 하나님의 열심을 아는 것에서 은총이다. 두려움이 엄습하고 어떤 갈등과 원망으로 둘러싸일 때, 우리는 비로소 한 의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21).” 그 의는 우리의 옳고 그름을 능가한다. 판단 영역에 있지 않다. 스스로 내세우던 것에서 손을 거두고 입을 다문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27).” 오직 주의 선하심을 믿고 의뢰하는 것.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나는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고 그 동선을 따라 움직인다. 토요일이고 공휴일이고 없다. ‘이것만이라도!’ 하는 심정으로 내게 허락하신 한 날의 움직임을 사랑한다. 어떤 날은 어디가 아프고, 어떤 날은 마음이 어떠해도, 그래서 덜 아픈 몸을 아직은 견딜 수 있는 마음으로 나에게 허락하신 한 날을 받든다. 텅 빈 토요일 이른 아침의 글방을 나는 사랑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찬양을 들으며 새벽에 쓴 묵상글을 읽고, 전날에 읽던 책을 읽고, 습관적으로 메모를 하며,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일처럼 무던할 따름이다. 이를 수행이라 여긴다. 또는 순응이다. 그래서 유익한 것은 ‘이제 뭐하지? 이 일을 어쩌지?’ 하는 낭패를 겪지 않는다. 하던 것을 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할 뿐이다. 이 의는 차별이 없으시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하나님의 사랑은 차별이 없으시다. 다만 사람이 그렇듯 가를 뿐이다. 가령 큰 아들의 경우처럼 동생이 돌아와 기뻐하는 아버지의 마음에 참여하지 못함으로 자신이 지운 차별일 뿐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31-32).” 그런 뒤 큰 아들은 어찌 했을까?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했을까? 이내 고집을 부리며 집에 들어가지 못했을까?
다들 생각이 많은 때이다. 저마다 옳은 것을 붙든다. 위기 앞에 사람의 본색이 드러난다. 바닥을 드러내는 것이다. 나 또한 다르지 않음으로 더욱 더 주를 바란다. 말씀에 선다. 늘 일어나는 시간에 일어나 말씀에 앉는다. 그 결은 일정하여 여지를 두지 않는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땠을까?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롬 4:1).”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실패다.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갔고, 수많은 허다한 무리의 자손을 보지 못했고, 그저 길 위에 살다 길 위에서 죽은 인생일 뿐이다.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9:32).” 우리의 수고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11:7).” 이는 누구도 육체를 신뢰할 수 없음이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그러나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4, 6).” 하지만 아브라함은 엄연히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하나님을 대변하는 품이 되었다. 인생의 양면적인 것에서 나는 종종 현기증을 느낀다.
오늘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시련을 통해 나의 속을 뒤집어보곤 한다. 남 얘기할 것 없다. 자신을 돌아보아 주께 바른 모습을 취하려 근신함이 필요하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 3:10).” 아니면 한 입으로 두 말 하고, 찬송과 저주를 동시에 머금고 산다. 다들 저마다의 사정과 여러 여건이 있는데, 이에 휘둘리면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를 알면서 묵묵히 무던하게 하루를 받든다. 일어나던 시간에 일어나고 눕던 시간에 눕는다. 누가 오든 안 오든, 보든 안 보든 해야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대로 수행할 따름이다. 누구에게도 이를 권하였다. 특히 생각이 많을 때에는 생각하기를 하지 말란다고 안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다음에야 무던함이 상책이다. 나는 종종 한 쪽 다리가 어려우면 아직 한 쪽 다리가 움직일 수 있다고 감사히 여긴다. 심장이 벌렁거려 두려움이 엄습해서 죽을 것 같다가도 그래도 약을 먹고 진정을 시킬 수 있다는 데 안도한다. 주시는 바, 하나님은 반드시 피할 길도 주신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오늘의 이 모든 시련과 역경도 다를 게 없다. 내가 이고 지는 염려와 근심에 대해서도 그리 단정한다.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하는 일에 따른 준행이다. 이를 아브라함의 발걸음으로 묵상한다. 묵묵히 저는 노구를 이끌고 하나님이 가라 하시는 땅을 향해 길을 나섰을 뿐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마지못해 하는 일 같으나 모세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음에도 미디안 광야를 떠나 애굽으로 들어갔다. 나는 오늘 어떤 일을 해야 하나? 따로 염려하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것은 하던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으로 족한 거였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그래서 나는 요즘 이 말씀을 너무 사랑한다. 솔직히도 하는 게 없으나 바랄 염치도 없는데, 그때마다 주께서 채우시고 이끄시는 은혜의 장중이 안락하다. 그렇듯 혼자 있는 글방을 사랑하고 외로움을 즐긴다. 그럴 수 있는 것은 뭘 해서가 아니라, 해야 하는 것을 해서이다. 일로 치면 나의 일이란 고작 일주일 내내 설교원고를 작성하는 일이고, 하루의 첫 시간을 말씀에 이끌려 이처럼 묵상글을 쓰는 일이고, 움직일 수 있을 때 움직이고 해야 하는 일에 무던할 뿐이다. 잘 하고 못 하고, 잘 쓰고 못 쓰고 하는 평가에서 홀가분할 수 있는 것이 은혜다. 더는 누구의 평가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사람들이 교회를 욕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데 분노하지만 저들은 또 그러라고 사는 사람들이어서 자기 일을 하는 것뿐이다. 버려두라!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 16:11).” 다윗은 그 원리를 알고 있었다. “왕이 이르되…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10).” 이를 심판하실 이는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롬 1:24).” 일련의 사태를 통해 나는 점점 입을 다무는 훈련을 하게 하신다. 주의 경고라.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나훔 1:3).” 오늘 시편의 말씀에서도 이를 읽는다. “여호와와 앞에서 큰 물은 박수할지어다 산악이 함께 즐겁게 노래할지어다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시 98:8-9).” 주가 하신다. 우리가 입으로 저주할 일이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찬송이 있다. 감사뿐이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1).”
찬양과 감사가 나의 일이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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