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전봉석 2020. 9. 1. 06:06

 

 

끝이 왔도다, 끝이 왔도다 끝이 너에게 왔도다 볼지어다 그것이 왔도다

에스겔 7:6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시편 100:4-5

 

 

모든 것의 끝은 있다. 이를 곁에 두고 사는 것이 지혜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7:2).” 그리하여 우리 얼굴의 근심이 우리의 마음을 맑게 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3).” 이는 역설이다.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11:10).” 곧 근심을 위한 근심이 아니라, 헛된 일을 따르지 않기 위한 방어로써의 근심이다. 고로 너는 잔칫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앉아 먹거나 마시지 말라(16:8).” 이 땅에서는 희희낙락 즐기고 노는 것이 유일하지 않다. 이른 아침, 성경의 일갈은 나로 하여금 근심하게 한다. “볼지어다 그 날이로다 볼지어다 임박하도다 정한 재앙이 이르렀으니 몽둥이가 꽃이 피며 교만이 싹이 났도다(7:10).” 우리 사회를 그대로 함축하고 있는 말씀 같다. 온통 말도 안 되는 것들이 난무하다. 어쩌면 이번 코로나19’ 사태는 기형적인 우리 한국교회와 왜곡된 복음에 대한 하나님의 바로잡으심이다. 최소한 내가 보기에는 강당에 태극기를 붙이고, 희한한 구호를 표어로 내걸고, 신유도 아닌 은사도 아닌 이상한 회유와 선동과 사상놀음 같은 메시지가 난무하였으니, 저것이 우리의 실상이었는가? 하는 부끄러움과 분노와 자성이 함께 온다.

 

나는 문득, ‘잘하다-못하다좋다-나쁘다의 구분을 생각하였다. 가령 아이들의 글을 두고 나는 항상 잘 썼다, 못 썼다 하는 식으로 평가하는 것을 옳다고 여기지 않는다. 글이란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니 좋다 나쁘다로 보면 충분하겠다. 좋은 글은 감동을 주고, 나쁜 글은 꾸미거나 거짓으로 위장한다. 나쁜 글은 감동과 느낌을 강요하고 좋은 글은 무심한 듯 오래도록 마음을 감동으로 맴돈다. 좀 더 들어가 보면 잘했다, 못했다 하는 것은 율법적인 특징을 띈다. 어떤 도달해야 하는 기준이 있고 이를 지키면 잘했다, 이에 못 미치면 못했다가 된다. 다른 의미로 좋다, 나쁘다는 것은 은혜의 특징을 갖는다. 서툴고, 못나고, 미숙해도 그 안에 담긴 진실성으로 이미 충분히 좋다. 깔끔하고, 완벽하고, 능숙해도 그 안에 담긴 거짓으로 나쁘다. 아이의 안간힘이 어느 기술자의 능숙함보다 더욱 더 좋을 수 있다. 어제 아침, 성경공부하는 전도사와 같이 전날의 설교원고를 두고 말씀을 나누면서 이와 같은 대화에 심취하였다. 저는 '잘하다, 못하다'와 '좋다, 나쁘다'의 차이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이에 맞는 성경 한 구절이 떠오른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6:14).” 즉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은 무얼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좋으시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죄 된 몸으로 살아가지만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만큼 잘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은혜 아래서 보시기에 좋기 때문이다.

 

그렇듯 우리는 잘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좋게 여기시는 바, 그의 은혜 가운데 거하면 되는 것이다. '잘하다, 못하다'는 자격의 의미로 그 주체가 '나'다. 하지만 '좋다, 나쁘다'는 감상-평가의 의미로 그 주체가 내가 아니라 '너'다. 그리 여겨주시는 이의 것이다. 은혜의 영역인 것이다. 즉 글은 '잘 쓴다, 못 쓴다'의 작가의 영역이 아니라, 읽는 독자의 영역으로 '좋다, 나쁘다'의 의미를 띈다. 나는 그렇게 아이들의 글을 지도하였다. 문장이 오문도 많고, 문법적으로 여러 곳 틀렸다 해도 이는 모두 '좋다, 나쁘다'의 영역이면 크게 문제될 게 없다. 왜냐하면 읽은 이로서의 나는 그것보다 그 안에 담긴 아이의 정직과 솔직함이 크고, 그 순수함에 감동하기 때문이다. 이를 다시 성경에서 보면 율법적으로 완전하게 없이 살려 했던 사울과 이를 벗어나 바울로 사는 한 인물, 두 인생을 가만히 묵상해도 이해가 된다. 가령 나의 오늘을 '잘했다, 못했다'로 놓고 평가한다면 주눅이 들어 살 수가 없다. 그러나 '좋다, 나쁘다'의 의미로 보면 주의 은혜로 덮히는 하루여서 잘함도 못함도 모두 좋다, 하시는 주의 품에 안겨 용서를 구하고 평안을 누리면 되는 일이다. 즉 율법이 우리를 다스리고 길들이는 것은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내 안의 더러움을 부추기는 것이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숙제 같이 사는 게 지옥이고, 은혜도 무서운 빚처럼 여겨진다. 잘했다면 더 잘해야 하는 일이 되고, 못했다 하면 그것으로 징계를 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좋다 하면 그만해도 충분한 것이 된다. 그리 좋게 여겨주시는 주의 은혜로 족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3:2).” 이를 풀어보면 우리가 선을 행하고 의로운 삶을 얼마나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것으로 인정을 받아 성령을 받는 것이면 천년의 갑절을 살며 선을 행한다 해도 모자라다. 오늘 날 우리 교회들의 그릇됨은 거기 있었다. 잘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을 부추겨 자신들도 지지 못할 무게의 은혜를 빚으로 떠넘겼다. 그리고는 매주일 공갈과 협박으로 우리를 옥죄고 붙들어 신앙을 무슨 천국행 티켓 값을 갚아야 하는 일처럼 버겁게 하였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3:10).” 무슨 구호처럼 주여, 삼창을 외치고! 통성으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부르짖기를 강요하고, 방언으로, 울부짖음으로, 성령의 감동을 강요하는 교회들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와중에도 여전히 말씀을 전하는 강당에서 선동과 구호가 난무하고 정권을 비판하고 구국일념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보도하는 언론은 싸잡아 교회를 매도하고, 사람들은 무턱대고 교회를 비난하며 신앙을 조롱한다. 문제는 그러는 중에 주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는 것이다. 암울하고 착잡한 현실이다. 한국교회의 실태는 누워 침 뱉기 식으로 뭐라 하기 난감하다.

 

스스로 거룩한 행위에 사로잡힌 친구들 몇을 나는 잘 안다. 저들은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하고 성경을 의무적으로 읽는다. 피곤한 날이 끝이 없는데, 몸은 천근만근인데도 집안일은 제쳐두고 기도실에 들어가 주여, 삼창을 외치며 부르짖다 잠든다! 안 그러면 살 수가 없다는 게 저들 신앙의 실태다. 은혜가 은혜답지 못하다. 은혜 또한 잘 해야 하는 일처럼 여겨져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 같다. 그렇게 행위를 강조하고 거기에서 위로를 찾고 그러는 자신을 의지한다! 한데 성경은 이를 불의하다고 일갈한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3:10).” 그러니 그 삶이 늘 고단하고 피폐한데, 은혜라 여기며 꾸역꾸역 은혜 또한 얻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져 빚에 빚을 더하듯 갚아야 하는 채무만 늘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신앙이다. 잘 써야 하는 글쓰기와 다를 게 없다. 죽어라 하고 자기 의에 빠져 율법을 따라야 한다. 아니라고 하면, 은혜는 너무 막연하여 이해가 어렵다. 대체 누가 왜 나의 이 빚을 탕감해준단 말인가! 그러자면 뭐라도 해야 하는 게 맞지! 그래서 기도하고 그래서 말씀 본다. 내 가까운 친구의 고단한 신앙이다.

 

그러나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11).” 이를 알면서도 벗어날 길이 없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나는 그러하여 어느 구절의 성경도 어느 구절의 성경과도 이어지고, 어또한 사회적인 현상도 어느 것 하나 주의 말씀이 아닌 것이 없다. 허투루 듣고, 보고, 흘려버릴 것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없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0:38).” 은혜는 거저 주시는 것인데 이를 한사코 값을 지불하려 드니, 뭔가 아직 그만한 힘이 자신에게는 있다고 여기는가보다. 율법은 의무를 요구하고 의무는 마음을 재촉하지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것이우리들이다. 그러자니 은혜조차 고역이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4:9).” 참 희한한 것은 우리 본성이 이를 행하려 하지 않는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8:3-4).”

 

말씀이 연관되어 구절마다 새로웠다. 율법으로는 턱도 없다. 뭘 얼마나 더 해야 그 요구를 채울 수 있을까? 다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가르치는 일이다. 율법의 역할은 우리로 불가능을 인정하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12:14).” 나는 이 아침, 심판의 경고를 들으며 오히려 희망을 그려본다.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웠으니 사는 자도 기뻐하지 말고 파는 자도 근심하지 말 것은 진노가 그 모든 무리에게 임함이로다(7:12).” 이제는 네게 끝이 이르렀나니 내가 내 진노를 네게 나타내어 네 행위를 심판하고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보응하리라(3).” 하시는 말씀 앞에서 두려움은 잠깐이요, 나는 나의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이어지는 오늘의 [감사 시]는 역설적이게도 나를 일으키신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시편 100편 전문,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