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내가 이런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겠다 한 말이 헛되지 아니하니라
에스겔 6:10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시편 99:8
두려움을 느낄 줄 아는 것이 복이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이 모든 사태를 짐작하고 온전히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이내 우리는 고통 중에서야 주를 찬양한다. “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내가 이런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겠다 한 말이 헛되지 아니하니라(겔 6:10).” 나는 이를 두려워, 근신하고 조심할 것을 당부하지만 가족이라도 그러한 경고를 느낄 수 있는 영역이 다른가보다. 자꾸 그러는 나를 '병적인 문제'로 돌리는 듯하여 입을 다문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9:8).” 내가 아는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다. 오늘 우리로 의롭다 하심은 우리의 어떤 의로운 행위 때문이 아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묵묵히 입을 다물고 주의 뜻을 헤아리는 것도 지혜다. 내가 나서서 뭔가를 꼭 해야 하는 일은 아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나야말로 거저 얻은 바, 주의 은총을 더욱 더 바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믿음은 상극이 될 수 있다. 자신이 무얼 행했다고 먼저 여기는 한, 순수한 믿음의 정도는 어렵다. 그러나 믿음이 주체하면 행위를 내세울 게 없어진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 3:12).” 그래서 한두 번 말하고 마는 이유는 여러 말이 도움이 안 된다. 내가 강압적으로 주장하고 이를 강요하면 오히려 반감이 일어 소망은 좌초한다. 율법은 그렇게 우리를 좌절시킬 뿐이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롬 10:5-7).” 믿지 못하는데 행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행함이 남다른데 믿음이 어찌 순수하겠는가!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9-10).” 우리가 행하려 하는 것은 폐하시고 우리가 주를 의뢰하고 바라는 마음은 세우신다. 그러할 때 행함은 고요하고 드러나지 않음으로 주와 농밀하다.
보다 젊고 뭔가 할 수 있다고 여겨질 때, 나는 할 수 없을 때를 준비하라고 당부한다. 지금은 기력이 되고 뭐라도 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곧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이르리니, 그때에는 기도와 말씀뿐이라. 이를 몸에 배지 못하면 너무도 새삼스러워 할 수 있어 기도도 안 되고, 말씀은 어렵고 따분하다. 언제든 읽을 수 있고 묵상할 수 있다 여겼는데 그보다 어려운 것도 없다.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요 3:33).” 아무나 읽고 묵상하고 누리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기하게도 이를 열 사람에게 말하면 아홉 사람은 피식, 웃는다. 성경을 그저 책 읽기로 알고, 기도를 그저 구하고 바라는 정도로 알기 때문이다. 언제든 할 수 있다고 본다. 지금 우리가 처한 이 코로나 정국이 우리로 말씀 앞에 앉히고, 기도로 이끄는 기회를 주는데, 좀이 쑤셔 살 수가 없겠나보다. 나다니지 말라는데 더 나가고, 서로 거리두기를 하라는데 오히려 들러붙는 모양이니, 누구는 뜬금없이 무슨 장애인재활교육자격증을 땄다고 하고, 아내는 이참에 노인복지요양사자격증을 딴다고 저 수선이다. 나만 괜히 애가 탄다. 나의 당부는 무색하고 뭐라 한들, 그러는 나는 광신적이고 병적이게 된다.
자주 잊게 되는 일, 우리가 먹고 마심은 달랐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과연 나는 예수를 먹고 사는가?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36).” 일련의 사태를 눈 앞에 두고도 안이하다. 천년만년은 더 살 것처럼 군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37).” 나라도 이 진리를 붙든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38).” 내 곁에 두시는 아이들을 건사한다. 주일에 모이기 어려운 처지라, 나는 두 아이와 차례로 통화하고 권면하고 기도해주었다. 그 가정에서 믿음의 기둥이 되고 말씀으로 이끄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39). 둘러앉아 예배가 되고 드려지는 나눔이 될 수 있기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40).” 예수님의 바람도 이 모든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심이었다.
그저 다만 우리는 믿음으로 믿고 맡길 따름이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5-26).” 그러니까 이 일은 우리의 의로움을 나타내려는 게 아니다. 주의 거룩하시고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일이다. 의로 여김을 받는 것이지, 의인이 되거나 행함으로 그 자격을 얻는 일이 아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그러니까 그리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다. 어떤 행위나 노력에 의한 의가 아니다. 이를 은혜로 받는 자와 부채로 느끼는 자가 구분된다. 묵상과 기도를 숙제로 여기니까, 뭐라 더 할 말이 없다. 오히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7-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9:18).” 하나님의 비밀, 이 놀라운 구원의 원리는 새들에게조차 감추셨던 일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누구의 어떤 죄도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보다 크거나 깊지 않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의 그 어떤 죄악보다 넓고 또 높으시다. 그러므로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2:7).”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8).” 오늘 이처럼 우왕좌왕 고통 가운데서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의해 힘겨워할 줄 누가 알았겠나? 세계 어느 나라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이 머무는 곳은 어디인고,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려졌으며,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욥 2:20-22).” 아무도 알 수 없어 공중의 새들도 눈치 채지 못했던 일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그것도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을 위해서 말이다.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6).” 이를 위하여 율법의 요구를 다 들어주시고 충족시키셨다. 누구라도 더는 율법을 채울 필요가 없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그런데도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5-6).” 서로 다른 두 길을 두고 우리는 걸어간다. 주의 성령이 함께 하실 것을 구하였다.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점점 입을 다문다. 다만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시 99:9).” 주만 바람이여,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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