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에스겔 15:2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시편 108:12-13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의 말씀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겔 15:2).” 열매를 맺지 못하면 불에 던져져 땔감으로도 쓸모가 없다. 하등에 시원찮은 나의 하루는 혼자 이런저런 생각에 시달리고는 한다. 이는 매우 병적이라, 이를 나에게 두심은 주의 표지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0-32).” 이제는 종종 힘들 때면 주께서 더하신 은혜로 생각한다. 은혜는 받는 자의 것이다. 칭의가 올 때 함께 온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만이 이를 알아본다. 칭의가 없으면 은혜도 모른다. 매일 부어주시는 만나를 거절하고 원망하였던 자들도 있다.
결국 내 안이 이런저런 생각들로 시달리는 중에 경건의 열매를 맺어가게 하신다. 당최 주를 바라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뭐라 할 때,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벧후 2:20-21).” 나는 저의 나중 형편이 더 강퍅하여졌음을 본다. 우리 본성은 주를 멀리하게 되어 있다. 결국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그런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것으로 추구하고 바라는 것이 선할 수 있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 힘겨움에 대하여는 일찍이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 119:131).” 말씀을 사모하고 이를 추구하며 살기가 헐떨거려야 할 정도로 갈급할 따름이다. 다들 괜찮은 듯한데, 우리 영혼은 마른 땅 같이 척박할 따름이다.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143:6).” 이는 모두 죄로 인한 세상의 풍토와 그 이상 때문이다. 아, “내가 오랫동안 조용하며 잠잠하고 참았으나 내가 해산하는 여인 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사 42:14).”
힘에 겨워 살 수가 없다. 생각이 아무리 많은들, 그리하여 더 나을 게 하나도 없는 현실을 직면할 때 마치 발정 난 짐승들 같이 아우성이다.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들이 그들의 성욕이 일어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발정기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그것을 찾는 것들이 수고하지 아니하고 그 발정기에 만나리라(렘 2:24).” 그러므로 “내가 소리를 들은즉 여인의 해산하는 소리 같고 초산하는 자의 고통하는 소리 같으니 이는 시온의 딸의 소리라 그가 헐떡이며 그의 손을 펴고 이르기를 내게 화가 있도다 죽이는 자로 말미암아 나의 심령이 피곤하도다 하는도다(4:31).” 다들 그 대열에 끼었다. 가령 의사들의 파업이나 각양 집단의 목소리가 헐떡거리며 포효하는 것들 같다. 그처럼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음이니이다(욜 1:20).” 이 땅의 모든 생명은 신음하고 있다. ‘주여 도우소서. 무엇을 하리이까?’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욥 9:12).” 나는 이런저런 모양과 사정 앞에서 헐떡거리며 주를 사모한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은 조급하고 생각은 넘쳐 나를 물에 가두는 것 같다. 그러할 때 주의 말씀을 마주하고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은혜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 34:6).” 나는 말씀에 밑줄을 긋고 여러 번 되뇌인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7).”
이 보응을 누가 견딜 수 있을까? 그 값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감당하셨다. 더는 형벌은 없다. 천대까지 만대까지 영원토록 나는 제외가 되었다. 그럼에도 이처럼 시달림에서 주는 또한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완전하시다. 나는 이제 형벌과는 무관하다. 그럼에도 온갖 시달림으로 헐떡거릴 때 주의 중보기도로 하루를 또 무사히 견딘다. 간혹 참을 수 없는 것들로부터 이제는 그 유혹을 자각한다. 주의 간구하심 때문이다. 내 안에 수시로 밀려드는 자책으로부터 주의 용기를 얻는다. 종교적인 의무나 권태로부터도 주의 이름을 의지할 수 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에 대하여 확신한다. 그래서 근원적인 은혜는 내 안의 믿음이다. 이보다 더 큰 기적은 없다. 그러므로 소망을 더하신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이 소망이 이제는 부끄럽지 않다. 성령이 나를 이끄심이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이를 묵상할 때 새 힘을 얻는다.
노간주나무보다 뜨거운 사랑의 불길이다. “도망하여 네 생명을 구원하여 광야의 노간주나무 같이 될지어다(렘 48:6).” 이처럼 주를 바라고 의지할 수 있다는 데서 소망이 더한다. 내 안에 주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으로 헐떡거림이 있었다는 데 놀랍다. 경건을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이처럼 여백도 공백이 될 수 없다. 혼자 있는 시간이 꽉 채워진다. 나의 상처와 수치로부터도 더는 고통당하지 않는다. 부르심에 신실한 사람이란 이런 것이겠구나!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아무 것도 않는 사람 같으나 모든 일을 감당하는 자였다. 이 땅의 모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하는 말씀에 이어,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당하는 게 그 끝은 아니었다. 일찍이 일러 말씀은 이를 준비하게 하신다. 후회가 없다. 기뻐함은 믿음의 역사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 1:11-12).”
이래저래 마음은 어지럽고, 유난히 잦은 비와 거듭되는 태풍으로 몸도 어려울 때,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마음을 두고 혼자 씨름하다보면 나는 주께 기도하고 있다. 그러다 문득 나의 기도가 얼마나 입술에서 가소로운지를 깨달았다. 기도는 기도하는 나와 무관하게 주께 향한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중보기도가 계시기 때문이다. 즉 나의 기도는 불안정하고 불완전할 따름이다. 여전한 불신앙에 붙들려 읊조리게 되는 무수한 의미의 말들과 감상과 간구들이 뒤섞이고, 그나마 나의 입술은 간구보다 빠르고 주를 바라는 마음보다 과장되어 열정적이거나 자아도취적일 때가 더 많다. 횡설수설 말 같잖은 말들로 기도는 감정만 건드리고는 하지만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주께서 지금도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 누구보다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더 잘 아신다.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겔 15:2).” 오늘 아침, 이 한 구절의 말씀이 나의 나 됨을 일깨우시는 것 같다. 나는 할 수 없으나 주께서 이루시고 함께 하시는 것에 대하여,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시 108:12-13).” 나는 나의 대적을 감당할 수 없다. 주가 잘 아신다. 주께서 대신 상대하신다. 이를 자각하고 알게 하심이 칭의의 역사다. 나를 의롭다 하신 이가 나로 하여금 주를 더욱 바람으로 헐떡거리게 하신다. 전에 사람의 구원을 바라며 헐떡거리던 그 헐떡거림이 아니다. 주의 은총을 구하고 긍휼하심을 바라는 헐떡거림으로, 이를 하나님은 영광으로 받으신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5).” 내가 어찌 주를 높일 수 있겠나? 무엇으로 우리가 주의 높임을 받으시게 할 수 있겠나? 그럼에도 기도이다. 헐떡거리는 간절함으로 주를 사랑하는 것,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6).”
하나님은 오늘 같은 오늘에서 내가 주를 더욱 바라고 사모함으로 헐떡거릴 때 영광을 받으신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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