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에스겔 17:24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편 110:3
주 앞에 내어놓는 일. 아뢰고 고하여 주밖에 나의 복이 없음을, 이로써 주를 찾는 것이 기도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다들 괜찮다 좋다 하는데, 나는 자주 속상하고 답답하고 안쓰럽고 애달프다. 이처럼 말씀을 묵상하면서도 아직 들어오지 않은 아들로 인해 마음이 어렵다.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공부를 하는데, 나는 그것이 기특하고 대견하기보다 위태롭고 답답하기만 하다. 뭐라 말을 한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것으로 나는 기도를 배운다. 기도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서이다. 미주알고주알 주께 아뢰며 주를 바라는 일, 기도는 더욱 더 주께로 나를 세우는 일인데 때로는 나의 아룀이 너무 안이하고 막연한 것만 같아 송구하기만 하니.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를 인하여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호 7:14).” 기도를 통해 나의 가증한 기도를 또한 마주하고는 한다. 단지 속풀이가 아니다. 입에 발린 소리로도 아니다. 영혼의 갈망이고 신실함이 기도다. 그런데 그게 어디 내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던가. 나는 주를 소망한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시 62:8).”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5).” 아들의 앞날을 내가 어찌 알까. 다만 나의 사소한 이 안달과 애달픔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일 텐데,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24).” 기도는 마치 이 구원의 실상을 몸소 체험하게 하시는 것 같다. 하여 내가 주께 아뢰고 고하나 그것이 너무 소소하고 보잘것없으나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 기도를 통하여 기도를 배운다. 말씀을 통하여 말씀을 바라고, 이것이 나의 연약함인 것을 주께서 더 잘 아신다는 것에 안도한다. 단지 이를 부모 자식의 일로 국한 지을 게 아니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처럼 몸소 알아가고 배워가게 하시는 주의 놀라운 권능 아래에 있음을. 오늘 말씀에서 나는 나를 높이려는 마음과 주께서 나를 높이시는 것의 차이를 묵상한다.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겔 17:24).” 내가 높이면 주가 낮추신다. 내가 낮아지면 주가 높이신다.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 75:7).” 기도는 이를 알게 하신다. 안이하고 태만하게 구하고 바라고, 아니면 말고, 하는 것이 기도일 리 없다. 기도는 한없이 주 앞에 나를 낮추는 일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그런 날 위해 예수께서 하늘 보좌에서 날 위해 간구하시고, 성령께서 늘 나의 어리석음을 탄식하시며 대신 주께 아뢰고 계시는 것이었으니, 나는 다만 마음을 기울이여 주를 바랄 따름이다. 하면 오늘 시편의 말씀에서처럼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주가 이루신다. 시작도 끝도 주의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주가 하신다. 하실 수 있도록 나를 더욱 의탁하는 것이 기도의 힘이었다. 때로는 나의 심장이 뛰고 기력은 쇠하여 내 눈에 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는데, 그리하여 더더욱 주를 바라는 게 기도였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시 38:8-10).” 때로는 나의 기도가 나를 피곤하게 하니,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69:3).” 무슨 주절거림과 넋두리로 쏟아 붓기만 하는 말들로는 감당이 안 된다. 주께서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정녕히 들었노니 이르기를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렘 31:18).” 나는 종일 아이와 같이 있으면서도 곁을 주지 않는 아이 주변을 맴돌다 마음이 상하고는 한다. 부디 그 마음에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굳건하기를.
함께 저녁을 먹은 후에 둘러 앉아 찬송을 하고 성경을 읽는다. 어제는 그때 처음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멘, 하고 아이가 기도 끝에 화답하는 소리에 마음이 즐겁다. 너무 그러면 애가 더 부담스러워서 안 된다는 아내의 핀잔 때문에도 나는 아무렇지 않은 태연하게 굴려고 한다. 공부를 빙자한 아이의 세계에 갇히는 것은 아닌지, 나의 우려를 주께 아뢰다보면 저절로 기도밖에는 달리 손 쓸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는 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요즘은 말씀만이 위로다. 밑줄을 긋고 여러 번 웅얼거려 되풀이해서 읽으며, 그 뜻을 묵상하다 위로를 얻는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그러기 위해서도 기도하는 것이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된다. 하나님을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찬송과 감사로 드려지는 기도이다. 존재 이유로도 이미 충분하여 감사하다. 어떠하든지 내 안에 이는 이 모든 회오리바람 같은 마음도 잦아들게 하는 것이 기도이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삼하 7:27).” 주가 세워 가실 집이다. 우리는 각각이 주의 성전이라. 어느 훗날 완공되어 낙성식을 치를 때, 나는 설교원고를 작성하면서 내가 받는 은혜가 더욱 더 컸다. 곧 일련의 수고와 마음 씀이 헛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시 30:11-12).”
기도는 앞서 이 맛을 상상하게 하고 기다리게 한다. 소망이 그 안에 있다. 주가 더하시는 마음이었다. 내 것이 아니다. 어떤 위로, 여전한 현실에서 벌써 앞서는 기쁨의 마음은 성령과 성자의 날 위한 기도와 간구 때문이었다. 기도는 나를 주께 쏟아 붓는 거였다. 가만히 또 아픈 아이의 일기를 읽다, 병적으로 써대는 성경을 보다, 저 아이의 어쩔 수 없음을 두고 내가 주께 중보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실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간구하심이었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 9:19).” 다니엘도 기도로 더욱 주를 소망하고 의뢰할 수 있었다. 앞서 에브라임의 탄식도 그러했고, 훗날에 베드로의 눈물과도 같은 맥락인 것을 알았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5).” 기도는 더더욱 몸 둘 바를 모르게 하는, 그리하여 속절없이 주만을 바라게 하는 우리의 하염없음이었다. 나의 전부가 쏟아 부어지는 일이었다. 주님, 하고 부르면 어느새 눈물이 핑, 돌고... 예수께서도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이와 같은 기도를 배우는 것이다. 나의 소원은 올려드리고, 내려놓아지고, 주를 경외함으로 들려짐을 얻는 체험이 기도였다.
아니면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몸도 마음도 내 의지나 뜻으로 가눌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아,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시 116:3-4).” 주께 나의 영혼을 맡기는 자리가 기도다. 다른 무엇으로도 위로 받기를 거절한다. 오직 주, 주만을 의뢰함이 기도이다. 주만 바람으로 주께서 낮추시고 높이시는, 기도의 올리어지는 것과 주의 은총이 내리어지는 일에 대하여, 나는 “나의 환난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77:2).” 이는 모두 주가 이루실 것이었다. 기도에서 소망을 배운다. 환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소망을 이루는 줄을 기도는 알게 하신다. 말씀이 이를 알게 하시고, 현실이 이를 목격하게 한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 110:4).” 고로 날 위한 주님의 간구로 오늘도 살아가는 것이었다. 하여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7).”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0) | 2020.09.13 |
---|---|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0) | 2020.09.12 |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0) | 2020.09.10 |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0) | 2020.09.09 |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0) | 2020.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