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서 너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에스겔 16:62-63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시편 109:26
주의 백성, 예루살렘의 행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오늘 본문의 말씀이 황망하기만 하다. 그 정도로 음란하여 죄악 되었으면 그대로 버려두어 잊으실 만도 한데, 오히려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서 너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겔 16:62-63).”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있을까? 오늘 이 땅에 벌어지는 일련의 갈등과 반목과 온갖 거짓과 그 추함을 어찌 다 가릴 수 있을까?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시 109:26).” 말씀 앞에 엎으려 나의 어리석고 연약함을 고한다.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27).” 오늘 이처럼 나를 주 앞에 세워 주를 바라며 주만 의뢰하게 하시는 것에 대하여… 그러나 여전하여 죄악 되고 더러우니 어찌 이를 다 감당할 수 있을까?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 34:6-7).”
그러하심을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시 109:30-31).” 오늘 시편의 말씀으로 대신 아뢴다. 같은 날의 반복인 것 같으나 여러 결의 사고와 사연과 상황들이 이어지고 그때마다 드러나는 나의 민둥산 같은 마음은 황폐하기 이를 데 없다. 누구와 모처럼 통화하며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해 자신이 더 주를 갈망하며 예배를 사모하게 되었다는 말에 기특하였다. 그런 거 보면 같은 상황인데도 양분된다. 그래서 주를 더욱 가까이 하는 것과 그래서 주를 멀리하며 세상을 더욱 악착같이 행음하듯 사랑하게 되는 것. 대면예배니 비대면예배니 하며 교회마다 말들이 많고 나름의 주장들이 팽배하지만 누구는 그래서 더욱 예배를 바로 알게 되면서, 평소 놓치고 외면하던 하나님과의 시간을 더 많이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처럼 할 수 있다는 우리 안의 선한 의지가 그리스도의 것이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심을 내가 말씀으로 더욱 확신하게 된다. 그렇게 성별된 자들이 있어 저들을 더욱 온전하게 하시고, 혹은 영광을 위하여 더욱 그들을 성별하신다. 이는 나의 주관된 것이 아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 1:5).” 이처럼 주의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성도의 삶에 대하여, 마침 설교원고 본문으로 시편 30편의 말씀을 초안으로 작성하다 마주하였다. 시편에 앞서 붙은 부제는, “다윗의 시, 곧 성전 낙성가”라 하여, 성전을 완공하고 부른 노래인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나는 첫 소절부터 의미부터가 새로웠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1).”
성전이란 그야말로 성별됨의 함의다. “그 성소에서 나오지 말며 그의 하나님의 성소를 속되게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성별하신 관유가 그 위에 있음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21:12).”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곳이라는 의미다. 이를 바울은 우리 성도의 삶으로 비유하여,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나는 문득 이와 같은 말씀과 마주하면서 오금이 저렸다. 다윗의 진술에 의하면 이를 위해 주께서 나를 끌어내셨다니! ‘끌어내다’는 타동사로 강제로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다. 끌려나올 때는 몰랐는데 거기는 애굽이었다. 대적의 땅이다. 대적이 나로 인하여 기뻐한다? 교회가 조롱거리가 되고 믿는 자들이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오늘 날 한국사회에서, 성전으로 성별된 자로서의 이 한 구절의 말씀은 새삼스러웠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시 30:1).” 결국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7).” 우리가 거룩하니 우리로 웃음거리로 삼은 자들은 주의 대적이라. 그렇게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시 30:3).” 곧 여기가 음부라. 음란하고 음탕하며 온갖 악행이 난무하고, 고통과 죄악의 쇠사슬이 매인 곳이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4).”
말씀은 어느 구절이든 어느 구절과 놓여도 서로 연결이 된다. 모두가 하나님의 이야기다. 저가 우리를 구원하시는 내용이다. 이로써 영광을 받으시는 이야기다. 그렇게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2).”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는 응답하시고, 나를 고치시는 관계가 새로웠다. 주는 내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은혜와 사랑과 그 모든 것을 더하시고 하는 의지를 가지셨다. 이는 곧 스스로의 말씀에 대한 약속의 의지이고 용서와 구원의 이야기이다. 몸이 허락한다면 종일이라도 나는 이처럼 말씀과 말씀을 오가며 주의 이야기를 살피고 싶다. 여전히 불완전한 자로 살고 있는 나로서도 이를 알면 알수록 그러므로 더욱 주의 기도와 간구가 나를 살리고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나의 기도는 가증하고 허울뿐이다. 요구하는 바가 세상을 바라는 마음과 다를 게 없고 입바른 소리에 빤한 기도가 늘 나의 필요에 의한 요구뿐인데, 그럼에도 나의 이 불안정한 기도를 주께서는 기뻐하신다. 곧 내 기도가 불안정하고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성령의 탄식과 날 위한 간구하심이 송구하면서도 절실하다.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막 8:12).” 직접 우리 믿는 자들의 표적이 되셨다. 내 속,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시면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날 위해 간구하시는 주님이시다. 이는 모두 나를 성전으로 삼으시고 세우시고자 하는 것이었으니,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시 30:9-10).” 오직 주의 긍휼하심만으로 나는 오늘을 산다.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롬 14:16).” 그런데 오늘 이 땅의 교회와 성도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자처하여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이를 어쩌면 좋을까? 세상보다 더 세상스러우니 이를 어쩌면 좋을까?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 아우 소돔 곧 그와 그 딸들은 너와 네 딸들의 행위 같이 행치 아니하였느니라(겔 16:48).” 말씀 앞에 낯부끄러워 나를 더욱 돌아본다. 그러나 주의 은혜다.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서 너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62-63).” 고로 나는 입도 열 수 없이 부끄러움을 느끼며 주께 숨는다.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시 109:15).” 모처럼 누가 건너와 고1 된 아들놈이 스스로 그처럼 공부하려한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허허, 웃었다. 나는 저의 얼굴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였다. 주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게 저런 것일까? 초등학교 중학교 때만 해도 그리 속 썩이듯 공부를 멀리하고 게임에만 빠져서 근심이더니, 이제는 ‘목사님 아드님 덕분에 우리 아들놈도 사무실에 나와 열두 시 한 시까지 공부하다 들어옵니다.’ 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시겠구나, 우리 주님의 기쁨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고 하려고 하는 그 의지나 노력만으로도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는 일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저의 말을 들었다.
우리 인생은 한 날, 그 찰나 같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시 109:26).” 이 모두가 주께서 하신 일이라.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27).” 그렇게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30-31).”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0) | 2020.09.12 |
---|---|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0) | 2020.09.11 |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0) | 2020.09.09 |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0) | 2020.09.08 |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 (0) | 2020.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