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에스겔 18:32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구속을 베푸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시편 111:9
본심을 다 드러내며 살 수는 없다. 이런저런 경우에 빈말을 한다. 별로 고맙지 않지만 고맙다고 인사도 하고, 달갑지 않은데도 반가운 척을 한다. 또는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닌데도 꾹, 삼키고 다른 말로 듣기 좋게 하고 만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빈말이 8할은 되는 것 같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러는 게 서로를 위해 낫다. 그러니 너와 나, 우리의 사이란 게 얼마나 가증스러운가. 정말 좋아서 좋기보다 좋자고 좋아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돌아서면 떫다. 진정한 기쁨과 온전한 마음으로 다하기란 어쩌면 스스로에게는 불가능한 게 아닐까? 이와 같이 우리의 기도가 가증스럽다. 구하고 바라는 것이 모두 그런 식이다. 가령 누가와 모처럼 통화가 됐다. 한참 너스레를 떨며 안부를 묻다 용건은 다른 데 있었다. 사촌 조카아이가 곧 귀국을 하는데 서울에 살 곳이 없다는 둥, 하던 일이 어려워 무슨 보험을 시작했다는 둥, 나름 반가운 척은 다 했는데 알고 보니 꿍꿍이속이 따로 있었다. 문득 나의 기도가 주께 구하는 마음이 전심으로 주를 바라는 데 있지 못함을 깨닫는다. 하나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엇으로 나의 요구는 쓸려가기 일쑤다. 구하고 바라는 용건이 죄다 떫다. 그럼에도 나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의 사랑이 놀라울 정도이다.
영혼의 한탄과 비애가 기도는 아니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시 69:3).” 그러니 아쉬울 때만 아는 척 하며 반가운 척 구는 나의 습성을…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삼삼 1:10).”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놀랍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시 62:8).” 나는 어제 하루, 이 말씀에 매료되어 붙들렸다. 시시로 주를 의지함은 내 마음을 그 앞에 토하는 일이다! 언제든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시다. 읽고 또 되새겨도 하나님만 손해시고 참 득이 될 게 없을 것 같은데…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38:8).” 아쉬울 때만 주를 찾고, 그 마음을 토하니 더럽고, 역겹고, 추한 것들뿐인데…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9).” 누가 마음을 쓸 때 별로 달갑지 않을 때도 우린 서로에게 빈말을 한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빈말, 마음에도 없는 소릴 듣고 싶으신 게 아니다. 때론 주를 원망하고, 서러워 꺼이꺼이 청승만을 떠는 것일 텐데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토하라.’ 하신다. 아니면 그 속을 아이에게 토한다. 아내에게 토하고, 애꿎은 남 탓으로 토한다. 화가 많은 계절이다. 다들 건들기만 하면 폭발할 것 같은 시절이다. 울고 싶은 아이고, 죽지 못해 사는 노인이다.
‘기도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삼하 7:27).” 주가 나의 집을 세우시리라. 나의 집은 성전이다. 주가 거하시는 성소이다. 예전에, 아주 형편없이 살던 시절에 나는 무슨 아쉬운 기도를 할 때면 우리 글방이 주의 성소가 되게 해달라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하곤 하였다. 세상을 좇고 저들이 즐기는 것을 추구하며 살면서도 그런 걸 기도랍시고,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을 가지고 그처럼 뻔뻔스럽고 가증하게 입 바른 소릴 하였다. 글방이 주의 성소가 되게 해달라?!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렇듯 되뇌고는 했었다. 지금 와 생각하면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기도였다. 한데 오늘에 이르러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 그 말씀이 내게 응하였다. 하는 것도 없이 글방이 교회가 되었다. 자격도 가치도 못 되면서 나 같은 사람이 목사가 되었다. 누구와 성경공부를 한다. 함께 말씀을 나누다가 말씀으로 놀란다. ‘마음을 토하라.’ 내 마음의 토악질을 하나님은 허투루 들으시지 않았다. 오후에 설교원고를 다시 다듬으며 새삼 나의 기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성령이 그런 나의 허접한 기도를 첨언하고 감수하고 탄식함으로 대신 간구하신 거였다.
나는 탄식함으로 괴로움에 속이 볶여 마음을 토했더니,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 성령께서는 이를 하나님께 오르는 기도로 바꾸어놓고 계셨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내가 참 가증되고 빈말투성이로 가식과 거짓이 가득하여, 도대체 그 마음에 구역질나는 것들뿐인데… 기도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시 38:9).” 기도는 마음과 영혼을 쏟아내는 것이다. 토하는 일이다. 나의 토악질을 다 받아주시는 주의 긍휼하심 앞에서,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42:2).” 모두가 나를 건성으로 대한다 해도, 내 안에 온통 빈말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떠도는 섬 같다 해도,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4).” 한다고 나름 열심히 한 일에 대해 꿍꿍이가 없어져야 한다. 이를 다 비워낼 때까지 토하고 토해서 쓴물이 올라올 때까지 토해야 한다. 토하고 또 토하지 않으면, 그것이 고스란히 너에게 또는 나에게 토하여져 악취가 진동을 하는 생활로 속만 볶인다.
한참 주를 갈망하며 그 걸음을 뗄 때, 기근도 같이 오는 법이다. 아브라함은 이내 남방으로 슬금슬금 내려가다 애굽으로 갔다. 아뿔싸, 돼도 않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엉뚱한 일로 사건은 겉잡을 수 없이 우리를 빨아들인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창 12:10-11).” 요즘 성경공부를 같이 하는 사역자 내외의 사연은 그맘때 나의 갈등과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별 거 아닌 일로 서로가 서로를 불편해하고 예민하게 군다. 누가 먼저든 건드리면 바로 폭발할 것처럼 전투태세를 갖추고 날을 세운다. 그 땅에 기근이 들 듯 생활은 또 옥죄고, 누구에게 말도 못하겠고, 속이 볶여 아주 죽을 맛이다! 내가 그때, 목사 고시를 두 번씩 낙방하고 있을 때, 나의 영혼은 바닥이었다. 주의 강권하심에 붙들려 신대원을 간신히 마치고 목사고시를 준비하면서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반평생 논술을 가르쳐오던 사람이 다른 건 다 붙고 논술 과목에서 탈락을 하고, 또 다시 준비해서 이든해 치른 시험에서는 논술은 어찌 통과를 했으나 새롭게 도입된 인성검사에서 또 탈락을 했으니! 저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자격미달로 여기는가... 당시 마누라는 왜 그렇게 꼴도 보기 싫은지, 하는 일은 점점 꼬이고, 기껏 곁을 같이 하던 아이들은 마치 한 날 한 시에 증발한 것처럼 사라지고, 그런 와중에 누가 화장실에 두고 간 담배를 슬그머니 주워다 며칠씩 숨겨두고 피우곤 하였으니, 속된 말로 갈 데까지 간 거였다.
그렇게 열등감과 열패감에 사로잡혀 더는 내 길이 아닌가보다 하고 돌아서려 할 때, 하나님은 오히려 애굽 왕 바로를 꾸짖으시고 아브라함의 실책과 사라의 수모를 갚아주시듯이… 뜬금없이 친구 동생이 위암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와중에 저이와 함께 보내는 50일간의 성경공부 여정은, 버림 바 되어도 하나도 아까울 게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참으로 과분한 시간이었다. 결국 저이의 죽음은 슬픈 일이었으나 그 마지막 임종을 나에게 지킬 수 있도록 하신 일은 두고두고 나의 남은 인생에 있어 가장 귀한 영적인 자산의 시간이 되는 셈이다. 모든 우여곡절이 우리 영혼을 더욱 단단하게 한다. 특히 부르심을 입은 사명자의 길은 좀 더 남다르다. 겁나는 일이지만 겁낼 게 없는 것은, 그 또한 돌아보니 내가 한 게 하나도 없었다. 아니, 더 큰 은혜의 순간이었다. 뜬금없이 요즘 왜 저와 같이 성경공부를 하게 하셨나 하고 생각해보니, 같이 말씀을 나누며 말씀만을 붙들도록 하신 것을 나는 알겠다. 저들 부부의 이런저런 사연을 접하면서 허접한 나와의 시간이 복되고 귀한 영적인 자산의 시간이 되기를. 갈 바를 알지 못하나 주는 이미 다 예비해놓으신 길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어느 훗날 그의 등에 업혀 평안히 그 길을 가면서 깨닫게 된다. 그러니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시 62:8).” 그러할 때,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신 4:29).” 나의 신물나는 실체에서, 아주 더럽고 추하여 역겹기만 한 나의 마음에서 오히려 희망을 느끼는 것은, 이를 주께 토할 때 주의 사랑이 과하시게 넘치시는 것이라. 나도 나를 환멸하고 싫증내는데도 주가 나를 붙드시고 더욱 귀히 삼아 주신다.
나는 오늘 말씀을 그리 단순한 눈으로 다시 읽는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2).” 오만가지 변명과 핑계가 늘 내 안에 우글거리고 있지만,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구속을 베푸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시 111:9).” 아, 나는 주의 백성이라. 시시로 내 주를 의지함은 나의 더럽고 역겨운 마음을 토하는 것이라니! 그럴 수 있는 게 복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씩 알 것 같다.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5-6).” 내 스스로 즐거움을 찾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시 111: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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