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그 가지 중 하나에서부터 나와서 그 실과를 태우니 권세 잡은 자의 홀이 될만한 견강한 가지가 없도다 이것이 애가라 후에도 애가가 되리라
에스겔 19:14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시편 112:1-2
어느 사회나 권세 잡은 자의 모양이 가관이다. 거짓과 술수가 난무하고 자신들은 그렇지 않은 듯 서로를 물고 뜯는다. 아무도 의인이 없다는 말씀을 저들을 보며 실감한다. 깜도 안 되는 것을 숨기고, 숨기느라 여러 거짓이 난무하게 되고 이를 또 들추느라 논점은 흐려져서 어느덧 본질은 사라지고 자신들의 치부만 서로 까발리며 사회를 어지럽힌다. 오늘 말씀은 그런 방백들, 당대의 권세 있는 자들에 대한 슬픔의 노래이다. “불이 그 가지 중 하나에서부터 나와서 그 실과를 태우니 권세 잡은 자의 홀이 될만한 견강한 가지가 없도다 이것이 애가라 후에도 애가가 되리라(겔 19:14).” 그도 그럴 것이 나 같아도 그럴 것 같은데 국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부추겨 언론들은 널뛰기 하듯 연일 불난 곳에 부채질하고 있다. 말씨름은 끝도 없이 부풀려져 이내 서로의 도덕성을 운운하곤 하는데 당최 그 밥에 그 나물이라, 누가 누구를 뭐라 하는 것인지. 나는 더욱 말씀의 선명함이 드러날 따름이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갈 3:10).” 나의 그 무엇으로도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없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0:38).” 그러니 계속 뒷걸음질하듯 서로의 지나온 날들을 언제까지 물고 뜯을 것인지. 당장 코로나로 심신이 피곤하고 화병이 날 것 같은 국민들은 저들의 추태에 더더욱 가라앉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39).” 내 안에 이처럼 주를 바라고 주께 나아가는 믿음을 주신 것에 대해 어느 때보다 귀하고 차분하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하나님 앞에 아무도 의롭다하심을 얻지 못할 것인데,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말이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욥 4:18-19).”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존재인 것을, 한 술 더 떠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15:15-16).” 거기에서 나는 아니라고 할 수 없어 주께 자복한다.
고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나는 누구보다 나아서 저들을 뭐라 할 자격이 있는 게 아니다. 다들 말 한 술을 보태며 감 놔라 배 놔라 할 동안 누구는 묵묵히 전염병과 싸우고 하루하루 자신의 삶에 충일할 따름이다. 누가 뭐라 하든, 더는 예전의 나를 돌아보며 자부하거나 자책하지 않는다. 여기서 바울의 진솔한 태도가 본이 된다. 저는 한때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6).” 나름 굳은 의지와 신념으로 살았을 모든 방백들의 자기 의가 위태로울 따름이다. 그럴 때에 바울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7-9).”
이제 다 버려 예수를 얻고 그의 안에서 살려함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버림은 그 모든 의는 다만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로우심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리 의롭다고 해주시는 의로 우리로 의로운 것이다. 우리 자신이 무얼 잘해서 얻는 의가 아니다. 일련의 사회 사건은 나로 하여금 그리하여 더욱 말씀 앞에서 말씀으로 선명하게 한다. 올 한 해 온 세계가 코로나로 몸살을 앓고, 우리나라는 3천 몇 명의 사망자를 낳을 정도였지만 그보다 전년도 대비 6월 통계로 6천 몇 백 명의 자살자가 있었다는 통계자료 앞에서 나는 놀랐다. 특히 그 내용 중에 2, 30대 여성의 비율이 좀 더 높게 나온 것도 우리 사회의 불균형을 그대로 반영하는 통계수치인 것 같다. 다들 그 좋아하는 자유의지대로 산다. 나름 옳다고 여기는 바를 추구하고 붙들어 신념을 다해 사는 것인데, 우리의 옳고 그름의 잣대로 생명을 얻을 수는 없다. 그 잘난 방백들 앞에서 소경이 눈을 뜨고 진술한다.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0-31).”
저들이 그처럼 경멸하고 구분하여 속되다 하는 부류의 사람만도 못한 것들이 위정자로들 서서 권세를 누리고 있으니, 그 잘난 것들을 의지하고 무엇을 도모하려 하는 것인지.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행 22:3).” 한때는 저도 저의 의를 붙들고 의로운 자로 살았다. 그러했던 바울이 이제는 고백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오늘 우리가 다 한데 사는 사회에서 우리가 사는 이유와 목적은 다르다. 저들은 저들의 신념을 따르나 우리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산다. 저는 곧 세상 그 어떤 정의와 법률과 원칙과 규례보다 그 이상이다. 그런즉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서로 헐뜯어 양심을 물고 늘어지며 서로를 들추어서 서로를 공략하지만 다들 같은 꼴인 것을.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악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고전 8:6-7).” 이 지식을 사람마다 다 가진 게 아니라는 대목에서 감사하면서도 두렵다. 그러니 이구동성으로 서로가 패가 갈려 제 목소리에 함몰된 사회에서 우리 믿는 자들이 어느 한 쪽에 속하려고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고 하는 데는 분명 우리 영혼의 문제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가령 상대적으로 요즘 분위기가 '신천지'는 사과와 용서를 구하며, 나름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 모습으로 사회의 환심을 사고 있는데, 정작 교계의 보수라고 자부하는 원로 지도자들은 편향된 이념처럼 어느 한 쪽에 서거나 자신들의 주장으로 사회의 지탄을 자처하면서도 진리를 외치듯 자기 주장에 함몰되어 가고 있다. 그러니 안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오히려 사이비 이단을 선호하고 구제하는 데 앞장서는 모양새이다. 그동안 교회는 갈리고 반목하고 서로들 몸살을 앓는다.
왜들 율법적으로 붙들리나 했더니,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요 5:45).” 즉 스스로 믿는 자들이 되레 말씀으로 자유하지 못할 때 말씀으로들 서로를 고소하는 꼴이었다. 서로를 고소하는 것은 정작 사탄이 가장 바라는 바이다. 저의 술책은 언제나 우리의 종교적인 양심을 건드린다. 정죄함으로 스스로 정결을 도모하게 한다. 이럴 때일수록 말씀에 더욱 굳게 서야 하는 것은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롬 10:3-4).” 그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음은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5).” 굳이 그 고집, 양심의 소리에 눌려 자신들이 옳다 하는 것이었으니, 오늘 우리 시대는 믿음의 리트머스 용지와 같은 시절인 것 같다. 가짜와 진짜가 색깔로 구분된다. 눈이 가려져 이를 보지 못하거나 서로의 색깔로 서로를 정죄하는 것이니,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후 3:14).” 그렇다고 율법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이 사랑은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그리스도의 의의 사랑으로 저가 우리를 사랑하심이다. 그래서 나는 자주 고하여 주의 마음을 달라 하고, 주의 사랑으로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내 마음이나 나의 수고와 소망으로는 어림없다. 그리 행하거나 믿거나, 어느 것도 따로 일어날 수 없다. 그러니 왜 이처럼 사회가 어지럽고 교회까지도 우왕좌왕 하는 것인지 모른다. 행위만 강조하거나 믿음만 부르짖거나 하느라,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9:32).” 다른 이유 없다. 자신들의 의로움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으려는 행위 때문이다. 세상이 그리 일찍부터 교육하고 가르친 것을 답습한 까닭이다. 그러니 그 결과는 절규뿐, 아,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시 51:8).” 그러므로 오늘 시편의 말씀은 이에 따른 우리의 자세로 교정하시는 것 같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112:1-2).” 오늘 내가 주를 경외함은 단순히 나의 생의 이야기로 그치는 게 아니라 후대에도 이어지는 복의 통로였다. “저가 영영히 요동치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념하게 되리로다(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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