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야 너는 두로를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으라
에스겔 27:2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시편 120:1
오늘 에스겔서는 두로에 관한 슬픈 노래다. 그토록 아름다웠으나, “네 땅이 바다 가운데에 있음이여 너를 지은 자가 네 아름다움을 온전하게 하였도다(겔 27:4).” 곧 세상 영광은 한순간이다. “그들이 통곡할 때에 너를 위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애도하여 말하기를 두로와 같이 바다 가운데에서 적막한 자 누구인고 네 물품을 바다로 실어 낼 때에 네가 여러 백성을 풍족하게 하였음이여 네 재물과 무역품이 많으므로 세상 왕들을 풍부하게 하였었도다(32-33).” 모든 영광과 수많은 나라들이 섬긴 곳이여, 영광은 사라지고 후회뿐이다. 집착할 게 없다. 많은 소유가 신실하게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을 훼방한다. 그래서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 30:7-8).” 기도의 바람이 다르다. 모든 운명은 하나님께 있음이다. 두로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에 연연하는 것은 어리석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약 1:9-10).” 우리의 자랑은 다 풀과 같을 뿐이다. 욥은 그 큰 슬픔에도 고백하였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 1:21).”
오늘 에스겔서의 말씀은 세상으로 대비되는 두로의 영광과 저의 패망을 그려주며 무엇을 바라고 어떤 영광을 구해야 하는가를 돌아보게 한다. 시편은 <성전을 올라가는 노래>로 이를 뒷받침한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시 120:1).” 결국 우리에게는 은혜밖에 없다. 그 언약을 붙들 따름이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램 31:33).” 주가 나의 하나님이 되심을,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32:38).” ‘하나님’은 전능자, 나의 구주, 나의 왕 나의 아버지의 직무에 따른 직함이시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39-41).” 저가 나로 그리하시겠다는 언약이 있었다. 이는 쌍방의 합의다. 은혜를 더하실 때 받아들임으로 받는다. 주의 법을 나의 속에 두시겠다는 약속이다. 이 말씀이 나를 붙드시고 이끄신다. 이것이 은혜다. 저는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삼위이시다. 나는 저들의 자녀이다.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겔 36:28).” 그러하시겠다는 말씀은 괜한 응원이나 공수거의 약속이 아니다.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그 영광되고 뭔가 찬란한 줄 알았던 임시적이고 잠깐 왔다 사라지는 것으로부터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하나님이 나를 직접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약속하신 땅이다. 하나님의 나라, 그 영광의 본향에서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비로소 나의 연약함을 벗어버린다.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나름은 잘 믿고 바라고 의를 구하며 선을 행하며 산다고 하였으나 그 모두가 거짓되고 헛되었던 가증스러운 것들로부터의 해방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나는 이와 같은 약속에서 늘 바라면서 또한 조금씩, 아주 미미하나 천천히 나의 굳은 마음이 제거되는 것과 부드러운 마음이 생성되는 것을 느낀다. 이는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말씀을 이처럼 구하고 바라며 귀 기울이게 하시는 데 복되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그리 하게 하시는 이도 나의 주, 영원하신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라(25-28). 잠시 동안인 세상의 약속이 아니다. 고로 이 은혜는 거저이나 약속은 요구하는 바가 있다. 곧 인격적인 관계란 맺어지는 것이지 일방적인 게 아니고, 맺어진다 함은 요구되는 의무도 따른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면서 무시될 수 없는 계약이다. 곧 받아들임과 순종이다.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은혜도 무용지물이고, 받아들였다함은 그에 걸 맞는 순종의 삶으로 나타난다. 성경에서의 행함을 강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억지가 아니고 더더구나 조건도 아니다.
믿기만 하면 저절로 그리 되는 순종의 특성이 굳은 마음이 제거되어 부드러워지는 것이 아닐까? 그 은혜 언약의 보증이 예수의 보혈이다. 저가 죽으시기까지 그 약속은 엄위하시다. 괜한 말로 그렇다라는 게 아니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통적인 활동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공연한 말씀이 아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괜한 게 아니라,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2).” 온통 성경의 약속이시다. 영원히 파기불가 한 언약이다. 이 약속은 늘 고통적으로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하셨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삼하 23:5).” 하는 것이 오늘도 내 안에 두시는 믿음으로의 언약에 대한 확신이다. 이는 공통되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 17:19).” 결국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 13:20-21).”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두로와 같은 영화로 만족할 리 없다. 세상 그 어떤 약속된 보장도 영구하지 못함을 이제는 안다. 가령 언제부턴가 내 몸에 못 보던 점이 하나씩 생겨난다. 나이 들며 색소가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증상이란다. 얼굴 어디에 못 보던 게 생겼다. 자꾸 손이 가면서 제법 불룩하니 커졌다. 은근히 신경이 쓰여 아내는 피부과에 가서 빼라고 하였다. 나는 굳이 돈을 주고 그리 할 게 뭐 있나 싶어서 미루고 있다. 하다못해 몸의 일도 그 끝을 예감한다. 하물며 세상에 추구하는 바이랴. 오늘 에스겔서의 두로가 이를 상기킨다. 그러할 때 우리에게는 영원하신 언약이 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6:17-18).” 믿음으로 이를 듣는다. 들리지 않고 보려 하지 않는 데야 별 수 있겠나? 이는 한 쪽의 일방적인 약속의 강요가 아니라 서로가 은혜 가운데 형성되는 자연스러운 합의다. 때론 왜 그 약속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나? 회의하고 되묻다 기다림이 지쳐 파기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을 종종 보는데,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9:16-17).” 그게 다 때가 있고 그 때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다. 숱한 믿음의 사람들도 소망을 받았으나 현실에 나타나지 않은 것을 붙들고 나아갔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11:39, 40).” 이를 증명하는 것은 내 안에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 나 사이의 화목이다. 부드러운 마음이다. 나는 이를 부정할 수 없다. 믿음의 사람들이 가진 공통적인 구역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이는 내가 어찌 이룩한 게 아니어서 더더구나 귀하다. 곧 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그때의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7-8).” 성경 어디를 펴도 이를 증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 7:22).” 단지 종이 서약이 아니다. 반지로 끼워주는 상징도 아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8:6).” 그러므로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9:15).” 그야말로 ‘빼박’이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12:24).” 허튼 게 아닌 것으로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이와 같은 믿음의 여정은 오늘부터 시작되는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의 첫 걸음이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시편 120편, 전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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