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전봉석 2020. 10. 1. 07:26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스겔 37:14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시편 130:7

 

 

마른 뼈 같은 우리를 향하여,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겔 37:3).” 그런데 주께서 살아나게 하셨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5).” 곧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6).” 이를 나는 지금의 나로 묵상한다. 추석날 아침, 말씀을 묵상하기 위해 로비로 내려왔다. 모두가 잠든 시각이라 어찌 조용히 앉아 말씀을 펼치고 노트북을 끌어다 당길 수 없었다. 불편하게 앉았던, 나의 뼈들에 살을 입히고 가죽을 덮으신 후에 그 속에 생기를 넣으셨다. 코로나로 유익한 것 중에 하나는 사람들이 많이 없다는 것이다. 서로들 마스크를 쓰고 말을 걸기 꺼려한다. 이렇게까지 자리를 찾아 내려오고 보니,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하시는 대목에서 돌아보아 내게 두시는 유익을 알겠다.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37:14).” 오히려 편하고 안락한 소파에 앉아 혼자 독차지한 테이블에 말씀을 두고 노트북을 펼쳤다.

 

내 속에 두신 영은 길을 찾고 그리로 나아간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곤한 잠을 깨워 나를 이리로 이끄시는 것이 어찌 나의 의지로 되겠나? 어쩌다 이런저런 이야기 가운데 평소 나의 모습을 드러내는 말이 오갔다. 저녁상을 물리고 그렇듯 드러나는 나의 나 됨에서 죄 된 나를 보았다. 먼저는 누군가에게 ‘목사로서’ 비춰졌던 나의 나 됨과 실제의 나는 달랐고, ‘에이 설마’ 하는 정도의 나의 수준에 대해서도 나는 그렇지 않다고 부정할 수 없었고, 멋쩍은 웃음이었으나 그런 나의 부끄러움 가운데서 주께서 얼마나 사랑하시고 귀히 삼으셨는가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다 내가 어찌 나를 돋운 게 아니다. 오늘 에스겔서의 말씀을 다시 읽어보면,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고 선지자 에스겔이 전한다.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그렇듯 연결되어 형태는 갖춘 것 같은데,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겔 37:8).” 실제 우리 몸을 다루고 이끄는 것은 우리 안에 두시는 영이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9).” 이와 같은 일련의 말씀이 오늘의 나를 연상케 한다.

 

가만히 창가에 앉아 바라만 보고 있어도 먹먹한 울산바위 위로 짙게 비구름이 얹힌 하루였다. 날이 차고 바람이 매서웠다. 나는 어디로 나가지 않았고 숙소를 맴돌거나 조용히 앉아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기도 하였다. 가족들은 여전하였고 시끌시끌하였다. 두고 온 아들 때문에 마음이 쓰여 자꾸 우울감이 맴돌고는 하였다. 그러난 나를 동정하시는 하나님이시라.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눅 21:6).” 어떤 것은 아름답고 성스럽고, 어느 것은 추하고 보잘것없으나, 이 모든 것은 새로워진다.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그러자 주님의 대답에 애정이 가득 담겼다.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8).” 너무 그 될 일에 연연해하여 오늘을 망각하는 것에 대한 경고로 들린다. 곧 오늘 이 모든 것이 어느 것도 과하나 넘치게 해서 안 되고 어느 것이 모자라나 궁핍하여 나를 비루하게 해서도 안 된다. 그것에 전념하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유혹에 빠지게 십상이다. 그러한 나를 위해 오늘도 내 안의 영, 성령께서 중재하신다.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8:12).” 아니면 어찌 살 수가 있겠나? 그러나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13).” 나는 이 또한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것은 단지 막연하게 우리 영혼의 일로만 여겨지는 것이 아니다. 실제 몸의 연약함에 대해서도 늙고 병들어 점점 쇠하여 가는 마음까지도 실은 낡아질 수밖에 없겠으나, 아 나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 간다니! 이 은혜의 말씀 앞에서... 슬슬 부산하고 시끄러워지는 로비에 앉아, 이어폰을 찾아 꽂고 찬양을 들으며, 이처럼 묵상글을 쓰고 있으면서 마음은 벅차오른다. 감사가 넘쳐난다. 이것은 우리의 인격뿐 아니라 나의 허접한 일상의 행위도 아버지 하나님 앞에 오른다는 소리다. 이를 위하여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히 7:24).” 여전히, 앞으로도 영원히, 시작도 없었고 끝도 없으신 이가 여전히,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아,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분에 넘치는 사랑인지!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나의 오늘이 어떠하든, 아니 지난 날 과거의 내가 얼마나 죄 된 삶으로 얼룩져 말할 수 없는 죄악 중에 거하였든지,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26).” 그가 날 위해 간구하신다!

 

참으로 벅차고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내가 뭘 좀 잘하고, 그래서 좀 나아져서가 아니었다. 새삼 주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에 이루어지는 일도 아니겠다. 영원 전에, 아니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그 때에부터.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하시는 말씀을 이루려하심이었으니, 이는 반드시 자기가 계신 곳으로 오늘의 우리를 이끌어 들이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날 위해 기도하신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요 17:14).” 그것도 탄식하심으로 말이다. 왜냐하면 나의 간구와 기도가 얼마나 오늘을 사는 데 연연하여 버벅거리고 사는지, 나도 나를 숨길 수 없는데도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는 낱낱이 드러나지 않겠나? 그러한 나를 위하여 날마다 바로 살리시고, 주의 자녀로 바로 세위려함이었으니. 어스름 날이 밝아오고, 로비가 어수선해지면서 1층에 있는 어디 식당에서 아침 준비를 하는지, 음식 냄새가 진동을 하고, 짙게 가려진 안개로 서서히 걷히며 주변 풍경은 뿌옇게 열리고 있으니.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4).”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나는 구한다. 우리들로 실족하게 하는 모든 것을 제하여 주시기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7).” 여타 엉뚱한 감정과 쓸모없는 일들로부터 휘둘리지 않게 하시기를. 그리하여 오직 주만을 바라며 섬기는 바른 삶으로 이끄시기를.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시 130:7).” 다른 길은 없다. 예외도 없다. 오히려 나는 이제 이와 같은 외길이어서 더더욱 감사하다. 내가 어찌 찾아 헤매야 하는 게 아니어서도 기쁘다. 젊은 날, 나름 애쓰며 궁리하고 찾아다녔던, 마치 <선을 찾는 늑대>로 살았던 날들을 이제는 회개한다. 나의 더러웠던 날들을 주의 망토와 두루마기로 덮으시니 은혜로 은혜 가운데 거하기를.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계 6:11).” 이에 나는 이제 이 두루마기가 더럽혀지지 않기를 바라나,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22:14).” 그래서 뭘 좀 더 나은 삶을 살겠다고 그런 게 아니라,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시 130:1).” 나는 주께 호소하고 부르짖을 따름이었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2).”

 

아, 이럴 수 있는 게 얼마나 귀하고 감사하고 영광스러운가! 이른 아침, 이렇듯 이럴 수 있는 마음과 처소와 자리를 주시고, 찾아 주 앞에서 영광을 올릴 수 있도록 하시니,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3).” 나는 결코 선하지 못함을 이제는 과감히 또 주께 아뢴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4).” 이와 같은 불편? 또는 불편한 환난과 시련을 통하여,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5).” 그것이 단지 어쩌다 그만인 게 아니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6).” 이제는 다른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다 해도,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7).” 이를 알게 하시는 이가 여호와시라.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결국은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