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볼지어다 그 날이 와서 이루어지리니 내가 말한 그 날이 이 날이라
에스겔 39:8
내가 그의 원수에게는 수치를 옷 입히고 그에게는 왕관이 빛나게 하리라 하셨도다
시편 132:18
주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를 알겠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그 시간에 그 장소에서 하던 일과 해야 할 일을 하게 하심이 기적이었다. 모든 지나간 것은 꿈결 같고 다가올 일은 막연하여서, 순간 시선을 놓치면 일상은 순식간에 흘러갔거나 아직 오지 않았다. 어제의 날씨가 이를 여실히 알게 하듯 가을이 왔는가했더니 너무 추운 날씨에 당황스러웠다. 그러할 때 주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지점이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행하는, 지금이었다. 평소대로 일찍 교회에 나가 정돈을 하고 차를 한 잔 마시고 설교원고를 작성하였다. 말씀을 준비할 때면 ‘나의 일’이 복되다. 거룩한 부담이다. 목사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 일을 행하였겠나? 주가 나를 사랑하심에 대하여,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계 3:9).” 누가 뭐라 하든지, 상황이 어떠하든지,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할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이었다. 그렇게 여느 금요일과 같이 출력을 하고 주보를 작성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하면서 한 주를 마무리하였다.
뚱하니 말을 주지 않는 아들의 심사가 늘 마음이 쓰인다. 공부도 좋지만 너무 그 일에 함몰되는 게 아닌가 하고, 뭐라 하지도 못하고 그러니 기도뿐이라. 가만히 나는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의뢰한다. 기도는 나의 막연한 바람이 아니라, 주께 아뢰는 대화다. 이는 성령이 주도하신다. 하게 하실 때 하게 되고, 하게 되는 아룀 가운데 주의 뜻을 바란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2).” 어쩔 때는 속상하고 어쩔 때는 안타까울 뿐이지만 그래서 나는 더욱 주가 곁에 계심을 느낀다. 그러니 지혜자의 말이 옳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 16:1).” 다들 저마다의 옳은 일에 전념이고 말은 그런 자신을 두둔하느라 시끄럽다. 하나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2).” 심령, 내 속에 있는 것. 겉으로야 거룩한 유대인처럼 굴 수 있겠으나 온전히 주를 바란다는 것은,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3).” 그렇게 마음의 생각은 내게 있는 듯하나, 말의 응답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한 구절의 말씀이 오늘 나의 행실을 바로 하게 한다.
누구에게 뭐라 하기 전에 주께 아룀으로 굳이 뭐라 하고 말고 할 게 없어지는 것.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시 25:1-3).” 이렇듯 주께 아룀은 말의 응답이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내 속의 간구가 주께 들려지기까지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은 부어주시는 것이다. 내가 임의로 요구하고 구하고 얻으려 드는 어떤 행위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게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가만히 내 자리에 있는 것.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구하기를 쉬지 않음은 그때마다 주시는 심령의 일이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깨어 구하고 힘써 구하게 하신다. 하게 하실 때 올려진 ‘기도의 손’으로 주를 바란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출 17:12).”
나의 날들 그 주어진 일상에서 주를 바라는 것이란 막연하고 애매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추석 연휴의 하루, 평소처럼 일상을 꾸려가게 하심이 귀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의 일이다. 맡기신 사명이란 터무니없지 않다. 억지스럽지도 않다. 어제는 그렇듯 주어진 나의 일상에서 온갖 생각들이 난무하게 일어나고는 하지만 그 또한 일상이라. 행여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수시로 또는 얼마나 자주 나는 아니 그런가? 주의하여 돌아보고 주께 나를 내어드리는 일은 나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입으로만 주를 신뢰하고 아뢰고 바라며 사는 것은 아니겠나? 그저 관습처럼,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마 15:8-9).” 그럼에도 묵묵히 같이 하는 아들의 행실이 고마웠다. 둘러앉아 가정예배를 드릴 때,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읽을 때, 마다하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 와 앉는 것으로도 나는 충분하였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하여, 내게 기도를 가르쳐주소서.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 86:11).” 오직 나의 한 가지 소원이 되었다. 금세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때로는 당황스럽게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게 되지만, 간구하게 하시는 영의 도우심 없이는 나의 바람이 얼마나 중언부언하는지. ‘하나님의 눈은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일보다 더 멀리까지 보고 계신다.’ 이를 알고 기도하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다. 내 안에 가만히 담고 있는 생각들, 어떤 안타까움도 답답함도 모두 주를 더욱 바라는 데 유용할 따름이다. 어, 성령의 내주하심이 이런 것이겠구나!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눅 18:1). 늘 같은 동선을 따라 같은 시간에 움직이려 하는 것은 허튼 데 마음이 흩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가령 오늘 뭐하지? 이제 뭐할까? 하는 따위의 일상은 두려운 일이다. 무던히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은 축복이었다.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빈 사무실들 가운데 우리 교회, 나의 자리는 다만 여전하였다. 그렇게 갈 곳이 있고, 할 일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더욱 나이 들어 무료함의 노예로 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다.
누가 뭐라 하든지, 묵묵히 말씀을 정리하고 집필하는 아버지의 노년이 그래서 나는 축복중의 축복이라고 감사한다. 내가 아는 누구 부친은 또 어떤 어르신은 무료함에 끌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산다. 혹은 뒤늦게 엉뚱한 교리나 공연한 진리를 붙들고 그릇 가는 경우도 더러 있다. 저들의 남은 생이 이제 길어야 몇 해뿐일 텐데. 아, 그래서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그와 같이 자신을 깨우고 돋우고 하였던 것이구나. 나 또한 주께 기도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0-21).” 나의 거룩한 이름이란 무얼까? 주께 부여받은 주의 자녀라는 이름, 내게 맡기신 사역자로서의 이름, 곧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라.’ 자신을 세워 성령으로 기도하라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나를 지키는 일이며 영생에 이르기까지 주의 긍휼을 기다리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오늘 에스겔서의 한 구절로 그리 읽힌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볼지어다 그 날이 와서 이루어지리니 내가 말한 그 날이 이 날이라(겔 39:8).” 그날이 이 날이다. 오늘도 이처럼 주신 시간에 일어나 앉아 하던 대로 말씀으로 이끄시는 일. 그러할 때, “내가 그의 원수에게는 수치를 옷 입히고 그에게는 왕관이 빛나게 하리라 하셨도다(시 132:18).”
이것으로 주를 신뢰함이었다. 곧 하나님이 하실 일의 증거가 되는 삶. “내가 내 거룩한 이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에 알게 하여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인 줄을 민족들이 알리라 하라(겔 39:7).” 주가 이루신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사랑을 베풀지라(25).” 그리고 “내가 다시는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내 영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음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9).”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마음이 설렌다. 나의 설렘은 내 안의 성령이 귀 기울이심이겠다. 나로 하여금 주를 더욱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시 132:6).” 그러할 때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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