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1 주일
시편 32:1-2
죄와 회개
32: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32:2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들어가는 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이런 소릴 들으면 원론적으로 자신은 죄인이라는 데 동의한다. 철학적으로도 인정한다. 그러나 ‘회개하라.’ 하면 그때부터는 불편해진다. ‘내가 왜?’부터 ‘도대체 누구에게 잘못을 인정하라는 거야?’ 하는 의문이 든다. 심지어 반감이 들면 ‘그렇게까지 내가 뭘 잘못했는데?’ 하고 어이없어 한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는 죄인이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이를 다만 종교적인 이해와 상식으로 치부기 때문이다. 안 믿는 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 안에서도 다를 게 없다. 우리는 ‘죄’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면 상대적으로 판단하여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뉘우치고 반성하는 정도에서, 죄의 경중을 따져 법이 정한 형량을 선고 받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통회하라’, ‘자복하라’ 하면 거의 발작적으로 반응하고 두드러기라도 난 것처럼 진저리치고 강하게 회피한다.
회개는 모든 기도의 토대다. 기도는 필요에 따른 것을 구하는 정도가 아니다. 잘못 구하는 기도도 있다.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우도 있다. ‘히스기야의 기도’처럼(왕하 20장), 저는 죽을병에 걸렸다. 그러자 자신의 의를 붙들고 살고자 구한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3).” 그래서 하나님은 저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해주셨다. 그러나 주어진 15년의 생은 병들기 전보다 나을 게 없다. 그때 낳은 므낫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극악한 왕이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례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가증하였다가 한 날에 둘 다 죽음을 맞았고(행 5:1-11), 마술사 시몬처럼 돈으로 성령의 역사를 사서 자신의 유명세를 더하려고도 하였다(8:18-22). 특히 솔로몬이 죽고 분단을 맞은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예배하러 갔다가 자신을 버릴까하여, 그 길목에 인위적으로 산당을 지었다(왕상 12:26-33).
나름 저들은 다 선한 의도에서였을지 모른다. 잘못된 기도 즉 우리의 바람은 생각보다 끔찍한 죄다. 하나님은 끈질기게 우리를 거룩으로 이끄신다. 거룩은 ‘분리’다. 죄와의 분리다. 세속적인 것으로부터의 분리, 자신의 권리주장으로부터의 분리,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지나친 친밀감에서부터의 분리, 저마다의 자유의지로부터의 분리다. 분리 단계는 언제나 거칠고 혼란스럽다. 우리를 괴롭게 한다. 하지만 비로소 ‘팔복의 사람’으로 거듭나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는 사람으로 자라간다.
오늘 시편은 3연 11행으로 전형적인 두괄식 진술 시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가로막는 것이 ‘죄’라는 것과 이를 유일하게 분리하는 것이 ‘회개’뿐인 것을 진술하고 있다. 곧 기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길이고, 이에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혀 별개의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한다. 결단코 회개가 없으면 우리는 내내 죄로 시달린다.
1연. 회개하지 않으면 사는 내내 고달프다(1-4)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1).”
거두절미하고 죄의 문제를 두괄식으로 언급함으로 시의 진술은 주제를 배양하고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영과 육의 죽음이면서 사는 내내 죽지 못해 사는 값을 물어야 한다. 우리에게 부여하신 권능, 하나님의 은사는 새롭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는 죽고 난 뒤의 일이 아니라 오늘을 포함해서 지금으로부터의 영원한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다(롬 6:23).” 우리는 이미 “허물과 죄로 죽었다.” 그런데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입어 우리는 새사람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즉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3-24).”
우리의 믿음은 거룩을 지키고, 우리 죄의 속성은 세상으로 기운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죄인이다.’ 그러므로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우리는 새사람으로 살면서 옛사람의 속성을 그대로 지녔다. 이를 벗는 길은 회개밖에 없다. 회개가 없이 새사람은 호흡도 없다. 이를 매순간 은혜로 체험한다. 그럼에도 누구는 한 데나리온의 품삯에도 감지덕지하는데 누구는 불평한다. 불평하는 저에게 주인은 단호하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마 20:13-14).” 즉 불평하는 저는 자신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받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받아 제 육시, 구시, 십일시에 각각 정도가 다른 은혜를 입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마치 누구는 다섯, 누구는 두 달란트를 받는데 자신은 한 달란트를 받았다고 여겼던 종처럼……(마 25:24-25).
하루하루의 날이 우리에게 맡기신 은사다. 각각의 건강과 재능과 능력과 일상이 다 다르다. 앞서 오늘 시편 6절의 말씀을 먼저 가져오면,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시 32:6).” 곧 누구는 은혜로 받고 누구는 삯으로 받는다. 자신을 통회하고 자복하는 회개의 정도가 은혜의 정도다. 즉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2).” 이는 실제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간사한지를 돌아보게 한다. 간사함은 모두를 속이지만 자신을 가장 먼저 속인다. 모두에게 발각돼도 자신에게는 들키지 않는다. ‘이 정도면 됐지 뭐!’ 하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는 껍데기 같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이 같은 자들에게는 아무런 소득이 없다. 애써 수고한 인생이 덧없음으로 끝난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차라리 저에게는 안 들어주시는 기도가 복이다. 먹고사는 일에 전전긍긍하는 기도뿐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눅 12:27).” 우리 기도의 절반은 돈 때문이다. 나머지는 건강과 출세, 온통 자녀가 잘되고, 남들처럼 사는 게 목적이다. 그러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고 성경은 일갈하신다. 먹이시고 입히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미덥지 않은 것이다. 모름지기 이런 게 거만이다. 그러니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거니와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쉬우니라(잠 14:6).”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없는 기도는 세상 사람들의 기원과 다를 게 없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시 32:3).” 수시로 아뢰지 않으면, 그 뼈가 쇠하는 것 같다. 내 안의 죄성으로 양심이 찌른다. 그런데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딤전 4:2).” 오늘의 우리들이다. 하나님 앞에서도 죄를 숨기고 시치미를 뗀다. 그렇게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우리는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면,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4).” 성도는 애통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남을 긍휼히 여김으로 박해를 당한다. 그 심령이 늘 가난하여 주의 은혜가 아니면 매순간 그의 영혼은 배고프고 목마르다. 회개는 날마다 매순간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주께 직고하는 일이다. 우리는 상한 심령으로 아뢰는데, 입바른 소리가 먼저 나오고, 말로만 가증스럽게 중언부언한다. 왜 그럴까? 성령과 하지 않는 기도는 헛되고, 예수 이름으로 하지 않는 기도는 허사다. 온전한 회개는 ‘구원의 노래’가 된다.
2연. 회개는 구원의 노래다(5-8).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32:5).”
회개는 바로 효과가 나타난다. 내가 죄를 “자복하였더니, 사하셨다.” 날마다의 회개는 첫째, 더 이상 쾌쾌 묵은 지나간 죄로 인해 자책하지 않는다. 둘째, 남들의 판단이나 비난에 대응하지 않는다. 셋째, 미래에 있을 심판에 얽매이지 않는다. 오히려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94:12-13).” 하는 고백이 자신의 것이다. 그뿐인가?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119:71).” 더는 현실적인 문제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32:6).” 오늘 시편은 회개의 진면모를 보여준다. 마치 깨끗하게 목욕을 한 사람이 더 자주 씻고, 새 옷을 입은 사람이 더 깔끔하게 옷을 관리하고, 집을 치우고 청소한 사람이 바로 정돈을 한다. 결국 살아서 기회가 있을 때 회개도 소용이 있다. 지혜자는 이를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전 9:4).” 왜? 무덤에서는 회개가 쓸모없다.
노아 홍수 때 기어이 방주의 문이 닫힌 뒤에 들어간 사람이 없고,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할 때 나중에 그 성을 빠져나온 사람은 없다. 그렇게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렘 8:20).” 그때는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뿐이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 25:30).” 다 때가 있다. 회개할 수 있을 때 회개해야 한다. 기회를 잃으면 다시는 없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7).” 이를 앎으로,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시 32:7).” 곧 회개는 ‘구원의 노래’다. 그 주님은 우리의 길을 가르치시고, 주목하시며, 훈계하신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8).” 이를 알면 알수록,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그럼에도 회개가 남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은 왜일까? 한 마디로 ‘자기 고집’ 때문이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완고함 때문이다. 굳이 회개할 게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께 바라고 의지하는 것보다 스스로의 노력을 더 중시한다.
3연. 우리가 회개하지 못함은 결국 무지 때문이다(9-11).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시 32:9).”
우리는 답을 쥐고 있다. 다 알면서 안 한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행 28:27).” 별 수 없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어쩌겠나? 그러니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시 32:10).” 그 차이는 확연하다. 기도는 분명한 효과가 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11).” 우리는 절대 우리 의지로 기도할 수 없다. 기도는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세상에서 바라고 추구하는 기원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이를 안다. 앎으로 회개로 날마다 기도를 연다.
나오는 말
앞서 살펴보았듯이 오늘 시의 구성은 각각의 두괄식으로 되어 있다. 어쩌면 아주 간단하다. 회개하지 않으면 그 인생은 고달프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열심을 다해 산다고 사는데 나아지는 게 없고, 나름 믿음으로 온전히 충성을 다한다고 하는데도 심령에는 평안을 얻지 못한다. 기도가 건조하게 메말라서 그렇다. 가문 논바닥처럼 우리의 믿음이 쩍쩍 갈라져 황폐하다. 그 마음에는 푸석푸석 먼지만 날린다. 교회를 다니고 나름 신자로 사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돈이 좋고 명예와 출세가 우선이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여유가 없다. 척박한 영혼으로 산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려야 하는데, 그러자면 구름이 끼고 잔뜩 습한 공기가 일어야 하는데, 회개밖에 없다. 회개는 은혜의 단비를 부어주는 통회와 자복이다.
예수님의 베드로에게 경고하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우리는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의 간구를 구해야 한다. 살인에 앞서 가인에게도 경고하셨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6-7).” 우리의 죄를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회개뿐이다.
오늘도 이처럼 주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것이 기회다. 앞서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다.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살전 2:10).” 저들은 동일하게 고백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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